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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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류군에서 거둔 연전연승을 발판으로 삼아 동군으로 진출한 조조 군은 흑산적 군세까지 모두 격멸함으로서 연주의 패자에 등극하게 되었다.
동군(東郡). 제음군(濟陰郡),
산양군(山陽郡). 산음군(山陰郡). 임성국(任城國).
원소군의 무장, 순우경이 점거하는 동평국(東平國) 지역을 제외하면 뿔뿔이 흩어졌던 연주 전역을 사실상 통일했다고 볼 수 있었다.
‘순우경은 본초의 휘하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숙장(宿將)이다. 순우경에게 3천 병력을 위임하여 동평국에 깃발을 꽂다니…. 동군과 가까운 동평국 지역을 거점삼아 나를 견제하기 위함인가.’
조조는 동평국을 차지하는 순우경을 매우 껄끄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청주로 물러난 황건적 군세를 견제하기 위해 군세를 주둔시켰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장차 확장을 거듭하게 될 연주 세력을 쥐고 흔들겠다는 속셈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순우경이 동평국에 계속 주둔한다면 청주의 황건적도 감히 준동할 수 없을 터. 세력권에 들어오게 된 군현들의 포섭과 방위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아군에게는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니다.’
향후 연주 정벌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면 동평국에 주둔하는 순우경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원소군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다.
“벌써 포석을 깔아 둘 줄이야. 본초를 너무 우습게보고 있었군. 웃는 낯짝을 망설임 없이 등에 칼을 꽂을 성정을 가진 여자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니.”
조조는 가늘고 보드라운 손가락으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면서 경계에 찬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입술을 툭툭 치면서 중얼거리던 중,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새하얀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딸꾹!”
귀여운 딸꾹질과 함께, 자기 손가락에 닿았던 메마르고 거친 감촉을 떠올렸다.
이 손가락에 닿은 것은 분명…,
연모와 경의를 표하는 상대의 ‘입술’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지극히 간접적인 접촉이긴 해도 포괄적으로 보면 손가락을 매개체로 한 ‘입맞춤’에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조맹덕이 연모의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풋내기 같은 어린 계집도 아니고 이까짓 간접 입맞춤에 동요할 리가… 이 손가락에 분명 부관의 입술이 닿았지. 역시 좋은 냄새가 나는군. 아직도 손가락 위에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어, 어쩌면 혀가 닿을 때 손가락 위에 부관의 타액이 묻게 되었을지도….”
최대한 용기를 내어 호감을 표시했다.
과연 부관은,
이성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조맹덕의 현모양처 같은 마음씨에 혹여 반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주군에게 연모의 마음을 진상하려는 발칙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후웃… 에헤헤….”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흑발의 여인은 열기에 찬 환열을 지으면서 헤픈 웃음을 연신 흘렸다.
마치 짝사랑하던 사내에게 고백이라도 받은 것 같은,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맹덕, 들어간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없이 기뻐하는 조조의 집무실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들어왔다.
성급한 성격만큼이나 성급하게 집무실 문을 연 하후돈은…
마치 첫 입맞춤을 시도하는 것처럼,
자기 손가락을 향해 수줍게 혀를 삐죽 내밀고 있는 사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 * *
사촌에게 부끄러운 광경을 발각당한 흑발의 여인이 고성을 내지르고 있을 때,
이성휘 또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무슨 짓을. 내가 무슨 짓을.’
호의를 베풀어줬다고,
아무 생각 없이 넙죽넙죽 다 받아먹다니.
조조는 나를 충성스러운 부하 겸, 말 잘 듣는 덩치 큰 애완견을 대하듯 나를 귀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잠시나마 그런 멍청한 망상해버린 자신이 너무도 바보처럼 느껴졌다. 잠깐 호의를 보여줬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나를 연모하고 있다는 그런 멍청한 망상해버릴 줄이야.
‘내가 무슨 사춘기 남자냐. 여자가 호의를 한 번 보여줬다고 온갖 망상들을 해대는 꼴이라니!’
지금까지 매번 무뚝뚝한 모습을 보인 이성휘였지만 오직 조조를 대할 때만큼은 다소 동요하는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을 뿐,
쉴 새 없이 박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속을 애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공.”
눈을 감으며 정좌한 채,
자기 자신과의 사투를 맹렬하게 치르고 있던 이성휘를 부른 사람은 분홍 머리의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옷맵시를 자랑하는 궁녀.
상체를 천천히 숙이는 것과 동시에 두 손을 공손히 포개면서 이성휘에게 극진한 예를 보였다. 마치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제후를 응대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혹여 소녀가 명상을 하고 계신 명공을 방해한 것이옵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주군을 향한 연심에 번민과 고심을 거듭한 이성휘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두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취하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실로 완벽한 명경지수(明鏡止水),
가히 절정 고수에 이른 수준의 무표정이었다.
“……?”
초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명공께서 명상을 자주 하시던 분이었나?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경직된 표정을 지은 채 명상을 하시다니.
분명 깊게 고민해야 할 문제를 떠안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명공께서 깊은 명상에 잠기신 채 복안(腹案)을 떠올리고 계셨사 온데… 얌전히 기다리지는 못할망정 명공의 명상을 방해하다니! 으으으, 또 명공에게 실수를 범했사옵니다…! 자비로우신 명공께서는 소녀를 용서해주시겠지만, 분명 내심으로는 소녀를 어디에도 써먹지 못할 글러 먹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이성휘가 여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새카맣게 모르는 초선은 자신을 자책하면서 머리를 두드렸다.
이렇게 계속 폐만 끼치다가,
결국 명공에게 버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암울한 망상까지 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실수와 민폐로 버림을 받게 되면서 어느 허름한 유곽(遊廓)으로 팔려 가게 되어 비참한 삶을 보내다가 결국 객사로 죽게 되는… 만약 이성휘가 들었다면 아연실색할 망상이었다.
“헌데 무슨 일입니까.”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초선은 망상의 늪에서 깨어나,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이성휘에게 용무를 전했다.
“명공께 긴히 논의하고 싶은 중차대한 일이 있사옵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명공께만 전하는 비밀이옵니다.”
“예.”
초선이 짐짓 무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긴장된 낯을 보이자 이성휘 또한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결코 허언을 할 성정이 아니었기에,
이성휘는 초선이 발언한 중차대한 일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심을 품고 있을 때, 이성휘는 초선을 따라 발걸음을 향했다.
그녀가 이성휘를 대동한 채 도착한 장소는 현재 진류왕이 처소로 사용하는 장소이며, 또한 궁인들이 묵고 있는 숙소이기도 한 진류태수의 치소였다.
“들어오시옵소서.”
초선이 외간 남자를 자기 침소에 들였다.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낙양제일미라고 불리는, 폐월수화(閉月羞花)의 고아한 아름다움을 겸비한 미녀가 유혹하듯 끌어들인 상황이었기에 언덕 위에서 눈뭉치를 굴린 것처럼 오해의 소지가 더욱 커져갔다.
‘좋은 냄새가 나…. 향료 냄새는 아닌 것 같은데.’
명문가의 수양딸이 거처하는 침소라고 하기엔 다소 협소한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된 이성휘는 코를 찌르는 달콤한 향기를 맡게 되었다.
가득 둘러싼 향기는 분명,
사내를 모르는 처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체취… 즉 살냄새였다.
처녀의 살냄새는 전율을 잠시 느낄 정도의 치명적인 달콤함을 품고 있는, 짐승 같은 육욕(肉慾)을 불러일으키는 매료를 품고 있었다.
“아앗!”
초선이 돌연 비명 소리를 냈다.
이불 아래에 반쯤 숨어 있던,
오늘 아침에 벗었던 속옷이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명공께서 속옷을 보셨을까. 큼큼, 하고 헛기침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아 속옷을 본 게 틀림없었다.
명공의 명상을 방해한 것으로 모자라 파렴치한 현장까지 보이고 말았다.
그냥 목을 매달고 죽어버릴까.
진심으로 죽고 싶어졌다.
“낙양을 떠나기 전, 아버지께서… 아니, 황상 폐하께옵서 소녀에게 이것을 맡기시었사옵니다.”
애써 부끄러움을 참아내며,
초선은 이성휘에게 언급했던 ‘중차대한 일’을 알려주었다.
알록달록한 색을 가진 이불들이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숨긴 사람조차 애를 먹을 정도로 깊은 공간에 보관되어 있던 작은 궤짝이 이윽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나라 황제의 옥새이옵니다.”
초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궤짝을 열어, 오색빛깔을 찬연하게 내뿜고 있는 옥새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황송스러운 듯,
옥새가 보관된 궤짝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오로지 한나라 황제에게만 허락된 보물. 황제의 위신을 상징하는 물건이자, 위엄과 위개를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찬연한 빛을 내뿜는 옥새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엎드린 초선의 모습을 본 이성휘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반동탁 연합군의 위세에 놀란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낙양을 불태울 당시에 궁녀와 함께 우물로 내던져져서… 원술의 휘하 장수인 손견의 손에 발견되어야 했을 옥새가 왜 초선에게….’
천하에 다시없을 최상의 옥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을 깎아서 만든 중원 왕조의 옥새.
아름다운 조형미와 함께,
둥그런 원형이 난연하게 휘광을 흩뿌리고 있었다.
옥새의 위에 장식된 용의 조각에 작은 흠집과 함께 그것을 덧씌운 황금이 보였다.
가황제(假皇帝)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황후에게 요새를 양도할 것을 강요했을 당시, 황후가 분개하여 힘껏 바닥에 옥새를 내던지면서 생긴 상처였다.
완벽(完璧)에 존재하는 하자(瑕疵).
그것은 도리어 이 전국옥새가 틀림없는 진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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