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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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적에게 빼앗겼던 동평국(東平國)을 단숨에 수복한 원소군이 연주성 포위에 합류했다.
1만이 넘는 군세가 단번에 가세함에 따라, 조조 군에게 애를 먹고 있던 흑산적은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탈영병이 속출한 것은 물론,
연주성 내부에서 잇따른 잡음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던 위병들이 술렁이는 모습을 빈번하게 보였다.
“강행군을 계속 거듭하여 연주에 왔을 터인데 많이 피곤하겠군.”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원소와 함께 군막으로 들어선 조조는 그녀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담소를 시작했다.
그간의 회포를 풀 겸,
연주성 공략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당장 연주성을 칠 건가요?”
원소가 물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연주성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도적 떼들은 한낱 목양(牧羊)에 지나지 않는다.
개 한 마리에게 수백 마리에 달하는 양떼들이 벌벌 떠는 것처럼, 성벽 밖의 아군이 고함만 내질러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흑산적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기주에서 악몽처럼 시달렸던 원소군이 군세를 이끌고 등장했으니 그 동요와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터. 놈들의 전력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소식을 듣고 놀랐어요. 30만이 넘는 황건적을 단숨에 격파하고 진류군을 거머쥘 줄이야…. 진류태수인 맹탁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실로 대단한 수완이네요.”
“발해군에 입성하자마자 수많은 사대부와 호족들을 휘하로 끌어들인 네가 그런 말을 하니 낯간지럽군.”
낙양에서 출병한 이후,
주(州)에 도착하자마자 일군(一郡)을 장악하는 기염을 토해낸 여걸들은 서로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담소를 이어 나갔다.
“무맹도위 정원과 병주목 동탁의 싸움이 날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고 있다고 해요.”
“늑대와 이리의 싸움이 길어지는군.”
“사예주와 가까운 기주는 물론, 형주(荊州)와 예주(豫州) 지역에 터전을 잃고 도망쳐 온 사예주의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원과 동탁은 백성들에게 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움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부와 권력에 미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승리.
숙적을 꺾어 버리고 대장군 하진이 올랐던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뿐이었다.
설령 그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넘는 낙양 백성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정원과 동탁은 그것을 ‘불가피했던 희생’으로 떠넘길 터였다.
“많이 심각한 모양이군.”
“억울하게 희생당한 백성들의 주검으로 사수(汜水)의 강줄기가 막혔다고 하더군요.”
피에 미친 군졸들이 병량을 확보할 목적으로 낙양과 사예주에 속한 군현들을 연이어 약탈했다.
반발하는 이들은 모두 죽이고,
창검으로 위협하면서 최소한의 식량마저도 모두 빼앗아버렸다.
정원과 동탁의 무자비한 살육은 13주 전역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참혹했다. 그에 천하의 명사들은 그들의 악행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뭐…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도적 떼들이 점거하는 연주성을 공략하는 것이겠죠.”
“그래, 네 말대로다.”
원소의 말에 조조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낙양에 있는 시랑(豺狼)들보다도,
지금은 눈앞에 있는 도적 떼들을 모두 토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장 해야 될 일은 주변을 위협하는 적수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연주를 점령하는 것이다.
머지 않아 낙양의 내전이 종결되고 중앙 세력을 독식하게 될 최후의 승자가 가려질 터였기에 그때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전력을 확보해야 했다.
“그럼 이제부터 연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도록 하죠.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전황을 계속 이어나가야죠.”
“물론이다.”
연주성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원소는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면서 탄성을 흘렸다.
“아.”
몸을 일으킨 두 다리가 흔들리면서 허리까지 내려온 아름다운 금발이 흩날렸다.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
마치 순도 높은 황금을 녹여내어 만든 금실처럼 고결한 기품이 느껴졌다.
폭넓은 예복을 입었음에도 옷 너머로 풍만한 가슴과 골반이 드러날 정도로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미녀는 다소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조조에게 입을 열었다.
“연주성을 떨어트린 연후에… 중원제일 검에게 낙양에서 하지 못했던 답례를 전달해도 될까요? 그때 아무 말없이 낙양을 떠난 뒤로 계속 그 사람이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조조의 눈에 질시의 감정이 서렸다.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흑발의 여인이 노골적으로 질시의 감정을 드러내자 원소가 후후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간악한 환관들에게 잃을 뻔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까요. 다른 감정은 없어요. 설마 맹덕은… 여남원씨 가문의 혈족인 제가, 중원제일 검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오히려 유쾌하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흘리면서 웃는 원소의 모습에 조조는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질시의 감정을 지웠다.
“아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목숨을 구한 은인을 향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예우일 터.”
“고마워요.”
원소는 여유로운 미소를,
반면 조조는 경계 섞인 우려를 드러냈다.
* * *
원소군이 합류한 직후,
신속하게 준비를 끝낸 군세들은 연주성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사나운 고함과 함께 연주성을 사방에서 포위한 병력들이 일제히 진격을 개시하면서 연주 구원전의 종결을 알리는 포문을 열었다.
“공격하라!”
“도적 떼들을 연주 땅에서 몰아내자!”
하후돈과 하후연이 이끄는 군세가 성문을, 다른 군세들은 성벽을 공격했다.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사다리들이 일제히 내걸리는 것은 물론, 격앙된 기세를 내뿜는 병사들이 연주성을 새카맣게 포위했다.
“성벽을 올라라!”
“기주 장병들이여, 두려워말고 진격하라!”
안량과 문추가 고함을 내지르면서 성벽 위를 오르는 병사들을 재촉했다.
우리들의 주군에게 위대한 명예를!
원소를 향한 선망과 경애의 감정으로 무장한 발해군 병사들이 연주성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성벽을 오르게 된 이성휘는 1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도적 떼들을 상대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커헉!”
“이… 이놈이!”
쌍검을 휘두르면서 무수히 많은 적들을 쓰러트리는 기예를 벌이면서 성벽을 피로 물들였다.
중원제일 검에게만 허락된 기예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쌍검을 휘두르는 이성휘를 목격한 도적들은 전의를 상실했는지 질겁하여 물러나기 바빴다.
“용맹으로 산천초목을 떨게 한 흑산도(黑山道)들이 저깟 놈을 이기지 못한단 말이냐!”
머리에 흉터들로 가득한 남성이 분탄을 토해내면서 벌벌 떨면서 뒷걸음질 치는 도적들에게 독기에 찬 일갈을 터트렸다.
그는 우독이라는 인물로,
수만 명이 넘는 군세를 이끌고 위군(魏郡)을 도모하려 했던 흑산적 두령들 중의 한 명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저 지독한 원가 년이 황하 건너까지 쫓아오다니!’
황건적을 대파했던 진류군의 조조에 이어지독하게 자신들을 괴롭혔던 원소까지 군세를 이끌고 가세하였음에 우독은 절망에 물든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성문이 뚫리게 될 터.
성문이 이대로 뚫리게 된다면 필시 몰살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백요와 수고에게 전해라! 어떻게든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야 한다고!”
흑산적은 살인과 약탈을 목적으로 보인 도적 집단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사(決死)를,
목숨을 내던진 옥쇄(玉碎)를 각오하지 않는다.
관군들과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행랑을 칠 뿐. 기주에서 원소군에 밀려 연주로 도망쳤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 퇴각한다!”
“벌레 같은 놈들아, 네놈들은 적들을 막아라!”
참패의 위기를 느낀 도적들은,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서로 먼저 살겠다고 밀고 당기는 것은 물론, 병장기를 버리고 건물 밑에 숨는 자들도 있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도적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조조군과 원소군이 성문을 뚫고 연주성의 내부로 진입했다.
“도적놈들을 모조리 참살하라!”
“나라를 어지럽힌 도적놈이다. 결코 관용을 베풀지 마라!”
몰살이 시작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이는 물론,
전의를 상실한 채 숨어 있던 자들 역시 모조리 끄집어내어 참수했다.
“흐, 흐아악!”
“대, 대체 어디로 달아나야 한단 말이냐!”
도적들에게 도망칠 곳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연주성에 숨어들었을 때부터,
그들은 그 어떤 활로도 존재하지 않는 궁지에 내몰린 상황이었다.
밭의 농작물을 갉아먹던 쥐들을 거침없이 물어 죽이는 사냥개처럼, 조조군과 원소군은 하북 일대를 중심으로 온갖 해악을 끼치고 다닌 도적들을 모두 토벌하여 화근을 짓밟아버렸다.
“이…, 이놈이…!!”
쿨럭, 핏물을 토해내면서 우독이 쓰러졌다.
부하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그는 중원제일 검의 검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다른 두령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주 호족들을 죽이고 약탈했던 막대한 재물을 들고 도망치려 했던 두령 백요는 하후돈의 월도에 목이 날아갔고, 일반 도적으로 변장한 채 연주성을 빠져나가려 한 수고 또한 정체가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도적 떼 대장들의 목을 창대에 매달아라!”
우독. 백요. 수고.
수만 명의 도적들을 이끌었던 두령들의 목이 창대에 꽂힌 채 성문에 내걸렸다.
휘하의 도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머리가 잘리게 된 도적들의 시체는 가차 없이 야산에 버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핏물을 뚝뚝 흘리는 머리들은 잘 포장되어 낙양 조정에 보내지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참으로 호쾌한 승전이로군.”
“죽는 그 순간까지 욕심을 놓지 못하던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네.”
죽음이 경각에 달한순간에도 진귀한 재화들로 가득 실린 수레를 끌고 도망치려 했던 흑산적들의 바닥 모를 욕심을 본 안량과 문추는 그들을 크게 비웃으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또한,
조조군 장수들도 승전을 기뻐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계속 이어져 온 연주 구원전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발 뻗고 잘 수 있겠네.”
“누님은 원래 아무 곳에서나 잘 주무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후돈과 하후연이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이성휘는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냈다.
하지만 옷소매가 핏물에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도리어 얼굴을 더 피범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에 이성휘가 난색을 표하던 중,
수십 명의 부하 무관들과 함께 다가온 금발의 여인이 그에게 노란색 개나리가 수놓아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닦으세요, 중원제일 검.”
올곧게 뻗은 칼날처럼,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을 한 남성에게 원소는 깊은 경의와 호감을 표시했다.
손수건을 건네면서 이성휘에게 다가온 원소의 호의에 찬 모습을 본 조홍은, 이성휘에게 수건을 건네주기 위해 서두르던 발걸음을 멈춘 채… 언니에 못지 않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금발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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