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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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兗州) 범현(范縣)에 주둔하고 있던 흑산적 군세를 모두 격멸한 원소군은 여세를 몰아 흑산적 세력이 점거하고 있던 동평국(東平國)을 공격했다.
기주의 원소군이 연주까지 추격을 해왔음에 흑산적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기 바빴다.
“네놈들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
“황하를 넘어 도망치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더냐!”
흑산적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안량과 문추가 군세를 이끌고 흑산적 진영을 급습했다.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도적 떼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면서 진영에 불을 지르는 등, 일말의 자비 없이 흑산적들을 짓밟아버렸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기주에서 연주까지 따라왔단 말이더냐! 커헉!”
먼 길을 달려 연주로 도망친 자신들을 쫓아온 원소군을 향해 흑산적 두령이 절규를 내질렀다.
하지만 절규도 잠시,
언월도를 휘두른 안량의 일격에 목이 잘려 죽었다.
휘하의 도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거센 질풍에 펄럭이는 원소군의 깃발을 본 도적들은 병장기와 갑옷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지만, 문추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집요한 추격을 받고 전멸하게 되었다.
“이 버러지 놈들!”
“우리 고향을 불태우고 약탈했던 주구들이다!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마라!”
빛나는 갑옷과 날카롭게 벼린 병장기.
원소군은 누더기 같은 의복을 입은 도적 떼들과 격이 다른 정예였다.
도적들의 무딘 병장기를 부수고,
낡아빠진 갑옷을 관통하면서 숨통을 절명시켰다.
이윽고 동평국에서 승리를 거둔 원소군은 다시 진군하여 연주성에 있는 동군에 도달하게 되었다.
“정북장군 어르신의 진군이시다!”
“어서 나발을 크게 불어라! 연주 백성들에게 한나라의 정북장군께서 오셨음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사나운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달리던 기병들이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오만한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악명 높은 흑산적으로부터 연전연승을 거둔 원소군 장졸들은 주군께서 직접 왕림하였음을 알렸다.
흑산적 무리에게 압제와 억압을 받는 연주 백성들에게 난세를 평정할 영웅이 도래하였음을 알리듯, 원소의 부하들은 주군의 명성을 널리 알리면서 연주 백성들에게 기주에서 온 세력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저, 정북장군 원소…!”
“정북장군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명성 높은 여남원씨 가문의 일원인 정북장군 원소가 직접 기주에서 군세를 이끌고 흑산적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연주 백성들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황건적에 이어 쳐들어온 흑산적의 끔찍한 패악질에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있어 원소와 그녀를 따르는 군세의 등장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중간, 3천의 군사를 맡길 테니 동평국을 수비하세요. 오랫동안 도적 떼들에게 수탈을 당한 동평국 백성들이 많이 두려워하고 있을 테니까요.”
“알겠네. 맡겨 주게.”
원소의 명령에 순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평국은 연주 북쪽에 위치한 군현.
연주의 다른 군현들 중에서도 황하 건너에 위치한 기주 지역과 상당히 가까운 곳이다.
그래서 원소는 순우경에게 3천의 병력을 맡기면서 동평국의 민심을 수습할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동평국의 사대부와 호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동평국에 세력을 넓혀 요원지화(爎原之火)처럼 거침없이 성장해가는 조조 군의 기세에 잠시 제동을 걸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맹덕은 빼어난 수완을 자랑하는 실력자. 뿔뿔이 흩어졌던 연주의 군현들을 모두 통일하게 된다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겠죠. 위를 향해 서두르는 그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필요가 있어요.’
조조가 원소를 남몰래 시기하고 질투하듯, 원소 또한 조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진면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소는,
용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도록 미리 고삐를 채우려는 것이었다.
오랜 벗이자 야망을 함께하는 동지였지만, 천하의 권력을 둘로 나눌 수 없듯이 언젠가는 척을 지는 원수가 될 것이었기에 원소는 벌써 조조를 견제할 수 있는 안배를 준비했다.
“어르신, 진군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원소 휘하의 중랑장이었던 곽조가 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그에 원소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를 타고 가겠어요.”
“예…? 예, 알겠습니다!”
항상 늠름하게 말을 탄 채로 좌중을 통솔하는 원소였기에, 지금부터 마차를 타고 동군 지역으로 가겠다는 원소의 지시는 다소 뜬금없게 들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지시에 따라,
발해군에서부터 동행해온 마차가 도착했다.
세 마리의 말들이 모는 삼두마차에 오르는 금발의 여인과 그녀를 보필하는 시녀들의 모습을 본 휘하 장수들은 의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주군께서 내린 진군 명령을 받들어 휘하 병졸들을 지휘했다.
‘그때 아무 말없이 떠나버렸으니까… 일방적인 이별을 고한 여자를 당연히 싫어하겠죠.’
원소는 필시 이성휘가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멋대로 사라져 버린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으면서도….
혹시라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혹시 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토로하진 않을까,
기주 지역을 단숨에 휩쓸어 버린 여걸의 위용 넘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짝사랑하는 남성과 다시 만나게 될 상황을 뇌리에 그리면서 부끄러워하는 소녀 같은 모습을 보였다.
“본초 님, 곧바로 단장을 준비하겠습니다.”
마차에 오른 직후,
문이 닫히자마자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진주가루를 섞은 분씨가루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눈썹에 칠하는 미묵(眉墨)까지 준비했다.
두 시녀들이 백옥 같은 피부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유를 바르는 것은 물론, 홍화꽃 분말로 만든 붉은색의 연지를 도톰한 입술에 발랐다.
‘시커먼 속내를 가진 독녀 같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남성에게,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싶은 것이 바로 여인의 마음이다.
비록 전쟁을 앞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항상 고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원소는 오랜 격전들로 다소 수척해진 자기 추한 용모를 숨기기 위해 마차와 시녀들을 동원하여 단장에 힘을 쏟았다.
물론 그녀는 단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운 미녀였지만, 혹시라도 자기 수척해진 얼굴이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를 망치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초 님, 말씀하신 대로 예복들을 준비했습니다.”
“고마워요.”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예복들을 본 원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혼례를 앞둔 새색시처럼,
복숭아처럼 얼굴을 갸름하게 붉힌 원소는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를 떠올리면서 가슴에 부푼 기대감을 슬쩍 드러냈다.
* * *
조조 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연주성을 포위하는 한편, 유격대를 편성하여 흑산적에게 점령당한 군현을 탈환하는 공세를 개시했다.
연주성이 위치한 동군은 물론,
동군의 남쪽에 위치한 산양군(山陽郡)과 산음군(山陰郡)을 동시에 공격하여 연주에 남아 있던 황건적의 잔당들까지 모조리 소탕하였다.
“일부 잔당들이 망탕산에 숨어든 것 같습니다. 망탕산에서 저항하면서 양국(梁國)에 주둔하는 황건적 본대가 오기를 기다릴 생각인 겁니다.”
이성휘가 두 손을 뻗어 지도를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양국은 연주와 서주 경계에 위치한 군국으로,
도겸의 공격에 쫓겨난 황건적 무리가 현재 양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연주성을 치는 도중에 놈들이 후방을 교란하기라도 하면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는 일이네. 원양을 보내어 방비토록 하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조가 재차 입을 열었다.
“일러둔 대로 곧 본초가 도착할걸세. 함께 본초를 맞이하도록 하지. 필시 본초는 위용무쌍한 군대를 거느린 채로 등장할 터, 우리가 원소의 군세에 뒤져서야 되겠는가.”
세여파죽(勢如破竹)처럼 연주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수많은 국적(國賊)들을 무찔렀던 군세를 원소에게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연주를 도모하려는 군세의 위용을,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장한 군세의 모습을 원소에게 과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조조는 이성휘와 진궁을 포함한, 친족 장수들과 함께 나아가 원소를 맞이하려 했다.
“언니, 준비가 모두 끝났어요.”
“알겠다.”
군막 안으로 황금 투구와 갑옷을 걸친 흑발의 여인이 들어왔다.
조홍이 완료 보고하자,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성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군 정립!”
조인의 날카로운 외침에 1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병장기를 치켜든 채로 우뚝 섰다.
쿵.
발끝을 부딪치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고도의 훈련과 많은 실전경험을 가진 정예병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좌우에 집결한 병사들은 늠름한 위용을 가지고 있었다.
“본초의 선봉대가 오고 있어.”
“보이는군.”
하후돈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구름처럼 지상 위로 휘날리는 흙먼지.
틀림없다.
기주 발해군에서 온 병력이 분명했다.
“정동장군, 소장은 정북장군의 선봉대를 맡은 안량이라고 하옵니다!”
8척에 달하는 거한이었던 화웅만큼이나 거대한 몸집을 가진 장수가 말에서 내려 예를 취했다.
다른 무관들도 마찬가지로 조조에게 예를 취하면서 동등한 동맹 관계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본초는 오고 있는 중인가?”
“그렇습니다!”
제장들과 함께 앞으로 나선 조조는 원소군의 선봉장인 안량과 휘하 무관들을 맞이하는 한편, 직접 군문으로 나와 본대를 이끌고 동군 지역에 입성할 원소를 기다렸다.
이윽고 빛나는 갑주를 걸친 정예기병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정예기병들로부터 엄호를 받고 있던 삼두마차가 도착하게 되었다.
“마차?”
조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소는 예법과 몸가짐을 중시하는 성정의 여성이지만 비효율적인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여 마차를 타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마차를 타고 왔다는 사실에 조조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이군요, 맹덕.”
마차 문이 열리면서 고아한 아름다움을 두르고 있는 금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풍스러운 예복을 입은 그녀는,
늘씬한 몸매와 함께 뛰어난 품위를 겸비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냈다.
스스로 의도하여 내는 아름다움이 아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결한 아름다움이 발산되는 진짜 아름다움이었다.
“꽤… 몸가짐에 신경을 썼군, 본초.”
“잠시 이별했던 벗과 만나는 일이니까요. 이 정도의 정돈은 당연하죠.”
갓 짜낸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를 더욱 강조하는 분칠과 요염한 입술에 혈색과 색감을 더해주는 홍화꽃 연지.
남성을 매료하는 달콤한 향료와
특히 남성을 자극하는 향기를 엷게 흩뿌리는 면약의 냄새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당장 얼굴을 파묻고 싶다는 욕망을 이끌어냈다.
“거친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치장이로군.”
“그런가요? 저는 오히려 여유로움을 강조하여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원소와 참모들은 전쟁에 종군하면서도 결코 투구를 쓰지 않고 모자를 썼으며, 또한 갑옷을 입지 않고 정갈한 예복을 입었다.
항상 여유로운 우아함을 뽐내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냉정함을 잃지 않는 완벽함을 아군 병사에게 보여 주었다.
“반가워요, 어림총사. 그간 무고하셨나요?”
조조와 간단히 인사말을 나눈 원소는 고개를 돌려 이성휘에게 시선을 향했다.
미묵을 칠한 눈썹을 치켜떴다.
그리고 청명한 기운을 가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의 모습을 담아냈다.
두 손을 잡고 그간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꺼내고 싶었지만 수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였기에 애써 마음을 꾹 억누르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했다.
“…아, 예. 무탈하게 지냈습니다.”
제아무리 완고한 바위라도 결국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구멍이 뚫리기 마련이다.
우아한 품격을 겸비한 아름다움에,
무뚝뚝한 모습을 보이던 무관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게 되었다.
이성휘의 그러한 모습에 원소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후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살짝 꺼낸 혀로 선홍빛 입술을 핥으면서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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