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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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보다 한 발 앞서 출병했던 원소군은 발해군(勃海郡)에 입성하여 세력을 형성했다.
유주(幽州), 기주(冀州), 병주(并州) 방면을 총괄하는 외정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정북장군의 권한을 발동한 원소는 지방관들에게 영향력을 과시하는 한편, 기주 사대부와 호족들을 빠르게 포섭하면서 지방 군벌에 등극하게 되었다.
“본초! 하간국(河間國)과 청하국(淸河國)의 상(相)은 물론, 청주(青州) 평원군(平原郡)의 태수까지 우리에게 가세하겠다는 연통을 보내 왔네!”
순우경이 쾌거를 달성한 기쁨을 토해내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본 거지인 발해군을 비롯하여,
주변 군현들이 연이어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낙양을 떠나 기주로 건너오게 된 정북장군 원소의 영향력을 지방관들이 인정했다는 뜻이며, 사대부와 호족들이 원소를 주군으로 받들겠다는 신종의 뜻을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
“고집불통처럼 고지식한 하북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일에 골치를 겪겠지만…, 어지러운 하북 민심을 수습하고 세력을 안정화하기 위해선 그들의 도움이 절실할 것일세.”
원소의 참모였던 봉기가 청하최씨(淸河崔氏) 가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문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하북의 민심과 실정을 도맡아왔던 사대부 가문들은 여전히 하북 백성들의 많은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사대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면… 향후 거사를 계획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리라.
“흩어진 민심과 민정을 수습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힘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모든 제사들은 그것을 명심하기를 바라요.”
상석에 앉은 원소의 지시에 그녀를 보필하는 참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군의 중신들은 대부분 외지 출신.
하북 지역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하북 사대부와 호족들을 떠안는 한편, 하북 출신의 명사들을 휘하에 기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원소는 하북 출신의, 특히 기주 출신의 인재들을 영입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주군, 모든 제장들을 집결시켰습니다!”
“당장 황하를 도하하여 연주(兗州) 범현(范縣)에 있는 흑산적 무리들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범처럼 용맹한 기골과 사나운 기세를 자랑하는 두 장수들이 원소에게 예를 취하면서 보고했다.
발해군에서 용력이 대단한 장사로 무명을 떨친 안량과 문추라는 인물들로, 원소가 군세를 이끌고 발해군에 입성하자 그녀의 휘하에 들게 되었다.
안량과 문추, 그들은 원소군의 무장이 되자마자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위군(魏郡)을 점령하려 했던 흑산적 대군을 크게 격파하여 연주로 축출하는 공훈을 떨친 바가 있었다.
“괜히 나설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 황하 너머로 축출된 흑산적이 다시 연주에서 패악질을 부리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맹덕의 일이 아닌가? 당장 수습해야 될 일들이 산더미인데 구태여 연주의 일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고 보네만….”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연주로 축출된 흑산적을 토벌하겠노라고 원소가 입장을 수차례 밝혔음에도 허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기주 지역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세력을 잃고 중원으로 쫓겨난 도적 떼들을 굳이 쫓을 필요가 있을까.
축출된 흑산적이 똬리를 틀고 있는 연주의 동군 지역은 상당히 먼 거리였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천하에 대의와 의협을 세우기 위함일세. 백성들을 수탈하고 황실과 조정을 기만한 도적 떼들이 연주 지역으로 도망쳐 그곳 백성들을 압제하는데, 어찌 상인들이 할 법한 잔폐한 셈법으로 주군의 대의를 꺾으려 든단 말인가!”
토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허유의 말을 진림은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지는 반박으로 받아쳤다.
그에 허유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자신을 한낱 상인의 셈법이나 하는 소인배로 만들어 버린 진림에게 격노를 토해냈다.
“공장! 가, 감히 나를 우롱하다니!!”
“질서와 조리를 음해하는 도적 떼들을 응벌하는 것은 곧 천하의 섭리를 세우기 위함일세! 어찌 감히 천하의 섭리를 세우는 일에 사익을 논한단 말인가!”
진림이 재차 일갈하자 허유는 여전히 분개를 내비치면서도 한 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일인으로,
공융, 완우 등과 함께 명성 높은 학자로 불리면서 수많은 학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허유는 훗날 반드시 이 치욕을 되갚아주겠노라고 이를 빠득 갈면서 흑산적 토벌에 이의를 제기한 자기 주장을 철회했다.
“병마를 이끌고 연주로 출병하겠습니다. 원도, 발해군의 모든 권한들을 위임하겠어요.”
“알겠네.”
원소는 봉기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안량과 문추를 필두로 한 제장들과 함께 토벌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출진하라!”
“이번에야말로 도적 떼들을 모조리 격멸할 것이다!”
1만 5천의 원소군 병력이 남하하여 내황현(內黃縣)을 통과한 뒤, 황하를 건너자마자 연주 범현에 주둔하는 흑산적 무리들을 공격했다.
기주에서 자신들을 그토록 괴롭혔던 원소군이 연주까지 추격해왔음에 도적들은 경악을 토해냈다.
“안량, 선봉군을 이끌고 적의 예봉을 부수세요. 그리고 문추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전장을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세요.”
“존명!”
원소의 명령에 발해군의 쌍두마차가 용맹한 질주를 시작하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적진을 격멸하며,
진형을 무너뜨리고 둔영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서 그 위에 군기를 세웠다.
발해군 지역에서 거병한 이후, 연전무패를 이어 나가고 있는 용맹무쌍한 군대를 바라보고 있던 금발의 여인은 거친 전쟁터에서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듯이 투구를 벗은 채로 전황을 관망했다.
‘낙양에서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죠…. 떠나기 전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산더미였는데. 결국 각자의 바쁜 입장에 내몰렸던 까닭에 무심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별해 버렸어요.’
무탈하게 낙양에서 출병했던 자신들과는 달리, 뒤이어 출병했던 조조 군은 동탁 군의 매복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계속마음에 걸렸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을 위험천만한 사지에 내던져 버린 채로 잔혹하게 이별한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그 일을 두고 미움을 받진 않을까, 강철처럼 견고한 그녀의 마음에 일말의 불신과 두려움에 생겨났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을 만나게 되면, 전쟁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진심을 담아,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하겠어요.’
스스로에게 굳게 맹세한 금발의 여인인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부하들과 함께 이동했다.
남쪽으로.
연주의 동군 지역을 향해.
1만 5천의 원소군 병력이 남하를 개시했다.
* * *
단숨에 동군의 세 거점들을 격파한 조조 군은 연주성에서 흑산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서로 직접적인 교전을 피한 채,
50리의 거리를 둔 상태로 대치를 이어 나갔다.
조조 군은 원소군이 북쪽에서 가세하기를 기다리면서 재정비를 취했고, 연주성을 점거한 흑산적은 주변 거점들을 모두 침탈한 조조 군의 병력 규모를 확실하게 알지 못 하는 상태였기에 위축된 반응을 보였다.
“빨리 싸우고 싶은데. 이렇게 서로 눈치만 보면서 기다리는 상황은 딱 질색이라고. 사람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대검을 든 붉은 머리카락의 여성이 콧방귀를 뿜어내면서 연주성을 노려보았다.
연주성을 점거한 도적 떼들.
겁에 질린 모습이 실로 가관이다.
현재 조조 군은 흑산적이 자신들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족히 수만 명에 달하는 대군으로 머릿수를 위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안 됩니다.”
기병들을 이끌고 연주성 주변을 누비면서 무력시위를 일으켰던 이성휘가 본진에 돌아왔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낸 뒤,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후돈의 옆에 다가왔다.
연주성 주변에 대군이 이동한 것처럼 흙먼지를 가득 일으켜서 흑산적을 교란했다. 진궁이 고안 해낸 기만술 중 하나로, 사기가 꺾인 채 궁지에 내몰린 적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게 될 속임수였다.
“본초가 온다면서? 기주로 떠난 여남원씨 아가씨가 군세를 이끌고 가세하게 될 줄이야. 재밌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군보다 한 발 앞서서 낙양에서 출병했던 금발의 여인과 다시 재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이성휘 또한 놀라고 있었다.
원소군과 동맹하여 벌이는 흑산적 토벌.
흑산적이라는 공공의 적을 사이에 둔 연주의 군벌과 기주의 군벌이 벌이는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흑산적이 동군을 차지하게 되면서 진류군의 조조와 발해군의 원소, 두 여걸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토의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서로 합심하여 토벌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주변에 대규모의 도적 집단이 웅거하고 있으면 치안 확보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물론, 물자를 수송하고 교역을 함에 있어서도 큰 차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당연히 조조와 원소에게 있어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진류군과 발해군의 두 여걸들은 동군 지역에 입성한 흑산적 무리가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기 전에 뽑아버리려 했다.
“다시 돌아오셨네요.”
기병들을 이끌고 무력시위에 나섰던 이성휘가 둔영에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조홍이 모습을 드러냈다.
홍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뺨과 쀼루퉁한 표정으로 물든 얼굴.
맞이하기 위한 마중을 나온 것처럼 이성휘가 둔영에 도착하자마자 발걸음을 행차한 흑발의 여인은 차갑게 젖은 물수건을 두 손으로 내밀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닦아요. 흙먼지에 물든 얼굴이 볼썽사납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선심 써 주는 거예요.”
조홍이 내민 물수건을 받은 이성휘는 감사를 전하면서 흙먼지가 묻은 얼굴을 닦았다.
힐끗 곁눈질하면서 이성휘가 얼굴을 닦는 모습을 보던 조홍은 짓궂은 웃음기로 넘쳐나는 하후돈의 얼굴을 보고는 아뿔싸,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완전 알콩달콩하네. 부부인 줄 알았지 뭐야. 하마터면 너무 달달해서 이가 썩어버릴 뻔했다고.”
“시, 시끄러워요! 저는 그냥… 전투에 함께 종군했던 전우로서 작은 호의를 베푼 거라고요!”
“그래그래.”
애써 급조한 변명을 늘어놓았음에도 짓궂은 표정을 거두지 않는 하후돈의 모습에 조홍의 얼굴은 고열에 뜨겁게 달궈진 철근처럼 새빨개졌다.
그에 이성휘는,
친자매처럼 사이좋은 그녀들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근데 괜찮겠어? 저 녀석은 맹덕을 좋아하는 눈치던데.”
하후돈이 속삭였다.
그에 왁왁 소리를 내지르던 조홍의 격앙된 얼굴에 짐짓 그늘이 생겨났다.
“…….”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밀착한 하후돈의 속삭임에 조홍은 팔을 뿌리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떠안고 있던 불안을 제대로 찔렀는지,
쾌활한 목소리를 내던 입술이 꾹 닫혔다.
“금방 돌아와서 배고프죠? 간단히 먹을 것들을 준비했으니까 제 진중에 와서 드세요.”
“예, 감사합니다.”
“큼… 큼큼.”
솔직하게 감사를 전하는 이성휘의 행동에 헛기침을 한 조홍은 하후돈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알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어릴 때부터 그래 왔지만…. 진짜 욕심 많은 아가씨라니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아귀에 넣는다.
탐욕.
그리고 소유욕.
금은보화를 탐닉하고 재화를 차지함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패국조씨 분가의 아가씨는 사랑을 차지함에 있어서도 결코 망설임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금은보화와 재물을 향한 욕망보다 더 큰 소유욕을 품은 채 사랑을 쟁취하려 했다.
물론 어마어마한 탐욕과 소유욕에 비해…,
솔직하지 못한 말괄량이 같은 모습을 매번 보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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