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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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류태수 장막은 진류군에 입성한 유협을 위해 기꺼이 자기 치소를 내주었다.
한나라의 고귀한 혈통께서 변변찮은 장소에 기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임시방편으로 진류현(陳留縣)에 위치한 치소에 유협과 그녀를 보필하는 궁인들을 기거하게 했다.
“전하께서 한낱 태수의 치소에 머무신다는 말인가! 당장 궁궐을 지어드려야 하네!”
“당장 백성들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진행해야 마땅한 일입니다! 이 황망스러운 소식이 다른 군현에 알려지면 천하가 우리 연주인들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 소식을 들은 연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은 어찌 선황의 혈육께서 불편한 거처에 머물 수 있겠냐며, 당장 백성들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진행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유협은 한사코 거절했다.
“무도한 황건적들로 인해 연주 백성들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한 형국인데 어찌 나 혼자만 편하겠다고 일신의 편의를 고집하겠는가.”
결연한 유협의 의연함에 사대부와 호족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낙양에서 온 황녀는 매우 성숙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사대부와 호족들은 진류왕에게 많은 재물들을 진상하였다. 하지만 유협은 황실과 조정의 오랜 실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살펴야 마땅하다며 재물들을 구휼미 마련에 사용했다.
“연주 백성들이 전하의 선정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소가 너무 좁지 않겠습니까.”
이성휘는 작은 황녀의 착한 마음씨에 칭찬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와 걱정을 보냈다.
진류현에 세워진 진류태수의 치소는 낙양의 황궁에 비하면 매우 보잘 것없는,
작은 마당이 겨우 마련된 작은 가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결한 황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협소한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이성휘는 받은 재물들을 모두 구휼미 마련에 사용한 유협의 행동에 복잡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비와 이슬을 피할지붕이 있고, 몸을 눕힐 수 있는 공간이 있기만 하다면 거처로 족하다고 옛 성인들이 말했다. 궁인들과 함께 머물 수 있는 가택에 머물게 되었으니 오히려 호사가 아닌가.”
유협은 뜻밖에 고집이 센 성격이었다.
어른스럽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작은 입을 연신 우물대면서 자기 주장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유협의 모습에 이성휘는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괜찮사옵니다, 명공.”
여덟 살 황녀에게 정공으로 논파당한 이성휘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때, 순결한 인상의 벚꽃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류왕의 전속 궁녀인 초선은,
가난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위무하는 일이 먼저라며 유협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함께 고난과 역경을 돌파하면서 서로를 의지해왔기 때문인지, 유협과 초선은 친자매처럼 돈독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어려운 일이 기탄없이 말해주십시오.”
그녀들이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선황의 혈육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
낙양의 대소사를 총괄하는 하남윤의 수양딸.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진 그녀들에게 있어 도적 떼들이 날뛰는 연주는 극히 위험한 지역이었으며, 또한결코 머물러선 안 될 죽음의 땅과도 같았다.
물론 낙양의 참화를 피하고자 어쩔 수 없이 연주로 내려오게 된 것이었지만…, 다소 수척해진 그녀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명공!”
이성휘가 유협에게 예를 취하고 치소 밖을 나섰을 때, 초선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이성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에 이성휘가 초선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 찬합을 받아주시옵소서. 소녀가 아침부터 정성껏 만든 요깃거리이옵니다.”
소녀가 두 손 모아 내민 찬합.
꽤 많은 양이 들어 있는지,
깔끔한 분홍색 보자기에 포장된 찬합은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얼떨결에 낙양제일미로부터 찬합을 받게 된 이성휘는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소저.”
“명공께서는 소녀를 몇 번이고 구해주신 은인 분이 아니시옵니까. 명공께서 원하신다면 소녀는 얼마든지 진수상찬을 내어 대접할 것이옵니다.”
초선은 항상 이성휘에게 공손한 예의를 담아 호의를 전달했다.
살구색을 물든 뺨을 드러내며,
마치 짝사랑하는 사내에게 연서를 전달한 사대부의 여식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아니 어젯밤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깃거리가 입에 맞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그가 맛있게 먹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다소 응큼한 생각했다.
‘자, 잠깐 분에 넘치는 생각을…! 절대로 명공에게 사적인 마음을 품고 요리를 준비한 게 아닌데!’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뜨거운 수증기를 뿜어내면서 요동치는 찻주전자처럼 한순간에 마음이 흘러넘쳤다.
혹시라도 심장 소리가 들키지 않을까,
쿵쿵 박동치는 심장 소리가 부디 은인의 귀에 들리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중에 보답하겠습니다.”
“보, 보답이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소녀를 구해주신 보답일 뿐이옵니다….”
이성휘의 말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인 초선이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그 뒤로 잠깐 담소를 나눈 뒤,
찬합을 든 이성휘가 진류태수의 치소를 나서게 되었다.
중원제일 검이라는 무명을 가진 사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초선은 그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게 되자, 뒤꿈치를 힘껏 들면서 그의 뒷모습을 좀 더 지켜보았다.
“아!”
애달픔에 찬 눈길로 그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을 바라보던 초선은 문득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는지,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의 소리를 내질렀다.
“아앗! 며, 명공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이 바보천치멍청이!
분홍 머리의 여성이 자기 우둔함을 깨닫고는,
연모의 마음에 온 정신을 쏟느라 중차대한 일을 그르치고 만 자기 자신을 구박했다.
* * *
황건적을 크게 격파한 조조 군은 진류군의 지배권을 거머쥐게 되었지만 여전히 연주 지역에는 수많은 위험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산양군(山陽郡) 지역에서 다시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는 서주 황건적과, 동군(東郡)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청주 황건적이 바로 조조 군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었다.
“중원제일 검, 이거 예상치도 못한 일이 터져 버렸는데?”
죽간을 든 진궁이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는지,
푸석푸석한 금발을 헝클어트린 그녀는 착잡한 감정을 담은 한숨을 내쉬면서 맞은편 의자를 강하게 걷어찼다.
“하북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흑산적 대군이 내려오기 시작했어. 동군에 주둔하던 황건적을 청주 지역으로 몰아낸 뒤에 자리를 잡았다나 봐. 놈들에게 복양(濮陽)과 백마(白馬)가 떨어졌어.”
악명 높은 흑산적의 남하에 놀란 황건적이 다시 청주로 도망치고, 동군 지역은 흑산적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백요, 우독, 수고.
그 3명의 두령들이 바로 흑산적 대군을 이끄는 악명 높은 주범이었다.
그들은 기주를 약탈하고 위군(魏郡)을 점령하는 등, 크게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정북장군 원소가 군세를 이끌고 기주를 석권하기 시작하게 되면서 터전을 잃고 연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에잉, 원가 년이 치운 똥구더기들이 연주까지 굴러떨어졌네.”
진궁이 언급한 똥구더기들은 당연히 흑산적을 말하는 것이리라.
황건적 토벌에 골치를 겪는 마당에,
그보다 더한 놈들이 잔칫집에 모여든 거지처럼 내려오게 된 꼴이다.
원소군에 의해 기주 지역에서 축출당한 흑산적들이 연주로 내려왔다는 소식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본초가 기주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는 뜻일 테지.”
이성휘가 진궁의 집무실로 마련된 서고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흑발의 여인이 문턱을 넘으면서 서고에 들어섰다.
조조였다.
바깥에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는 기주에 입성한 원소가 그만큼 크게 활약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하면서 실소를 머금었다.
“낙관하실 때가 아닙니다, 명부. 황건적보다 더 잔인한 놈들이 동군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동군에 입성한 흑산적은 원소군의 맹공을 받고서도 살아남은 독종 중의 독종이다.
관군을 수차례 휩쓸었던 황건적이 다시 청주로 도망칠 정도로 흑산적은 잔인한 성정과 포악함을 가진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오히려 지금이 동군 지역을 도모할 적기일지도 모르지. 흑산적은 사납고 용맹하나, 본초에게 대패를 당하고 쫓겨난 개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아군은 황건적 대군을 격파하여 기세가 크게 오른 상황이었기에 충분히 승산을 논할 만했다.
그리고 또한,
“본초가 내게 서신을 보내 왔다. 휘하 장졸들을 이끌고 백마에 주둔하는 흑산적 무리를 치겠다고 한다. 나 또한 그에 합세하여 동군에 주둔하는 흑산적 무리를 치겠다.”
기주의 원소와 연주의 조조가 동시에 토벌군을 일으킨다면 흑산적은 북쪽과 남쪽으로 협공을 받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원소는 후환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조는 동군 지역을 차지할 목적으로 토벌군을 일으키려 했다.
“명부께서 황건적을 크게 격파한 덕분에 빈집이 노려질 위험은 없습니다만…. 황건적으로부터 진류군을 수복한 것에 이어 이번에는 동군을 수복하기 위한 전투를 시작하신다라…, 요원지화로군요.”
빠르게 연주 지역을 석권하려는 조조의 기민한 행동에 진궁이 웃음을 터트렸다.
실로 담대하며,
뛰어난 판단력이 아닐 수 없다.
장차 그녀가 패왕의 업을 짊어지게 될 명세지제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진궁에게 있어, 원소와 연합하여 동군 지역을 수복하겠다는 조조의 신속한 판단에 큰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동군의 흑산적 무리를 토벌하겠다. 귀관과 군사는 나를 보좌하도록.”
조조의 명령에 이성휘와 진궁이 예를 취하면서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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