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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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兗州) 동군(東郡)에 거점을 두고 있는 청주의 황건적들은 잔인하고 사납기로 유명했다.
조정에서 파견된 관료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것은 물론, 한나라의 대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부유한 곳으로 유명한 제남(濟南)을 허허벌판으로 만드는 악행을 망설임 없이 저질렀다.
하지만 악명을 떨친 그들조차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였기에 귀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카학!”
“으으으….”
치열했던 싸움이 쓸고 지나간 폐허.
척박하고 황량한 들판 위에는 누런 두건을 머리에 두른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조조 군의 군세.
날카로운 창검을 든 그들은 시뻘건 피를 쏟아 낸 채로 흙바닥에 누워 있던 패잔병의 숨통을 끊어냈다.
“총사의 명령이시다. 황건적들의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라. 헤집은 흔적을 만들어라.”
“예!”
병졸들이 날카로운 단검을 꺼낸 뒤,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주검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배를 갈라내어 크게 상처를 내어, 그다음에 손을 거침없이 집어넣으면서 내장을 끄집어냈다.
“왜 이런 해괴한 일하는 겁니까?”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하고,
몇 번씩이나 토사물을 쏟아 냈던 병사가 물었다.
그에 고참 병사가 대답했다.
“귀신을 만들어야 하니까. 아주 무시무시하고 지독한 성정을 가진 귀신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저 황건적 놈들에게 보여 줘야지.”
현실적으로 5천에 불과한 군세가 3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정공(正攻)은 어림도 없는 일이며,
장기전으로 인한 소모전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게다가 적들은 청주와 기주 일대의 관군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바가 있었고, 또한 그들은 굶주린 허기를 약탈로 밖에 채울 줄 모르는 아귀와 같았다.
“분명 내일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게다.”
고참 병사의 말을 증명하듯,
전날에 치열한 접전을 치렀음에도 오늘 또한 황건적과의 사투가 벌어졌다.
“공격하라!!”
황금 투구를 쓴 여걸이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내달렸다. 그리고 지난 전투들처럼 항상 선두에서 병마를 지휘했다.
병력이 크게 열세인 상황이기에,
가장 위험한 선봉에서 병마들을 지휘하여 계속 사기를 높여야 했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접전을 치러야 하는 선봉은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하물며 조홍은 황금 투구와 황금 갑옷을 걸친, 매우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크하아!”
“아아아악!!”
황금 투구를 쓴 흑발의 여인에게 달려들었던 누런 두건의 병사들이 일 거에 쓸려 나갔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괴물이,
배를 갈라내어 쓸개를 안주삼아 먹는 귀신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장수들을 쓰러트리고 장수의 대장기를 부러뜨렸던 괴물, 뛰어난 용력과 함께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건적 병사들의 격앙된 얼굴이 삽시간에 공포로 일그러뜨렸다.
“날뛰는 것도 거기까지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황건적 장수가 육중한 유성추를 붕붕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수많은 관군들의 머리를 유성추로 짓뭉개버렸던 전적이 있었기에, 황건적 장수는 괴물로 불리는 놈의 대갈통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한 믿음을 가슴에 품은 채,
유성추를 크게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던 황건적 장수는 온몸에 피를 뿜어내면서 쓰러졌다.
“별것도 아닌 놈이.”
일 거에 적장을 쓰러트린 이성휘가 피칠갑한 칼날을 겨누면서 황건적 병사들을 위협했다.
8척에 달하는 거구의 체격을 자랑하던 서량 제일의 용장마저 일 거에 참했던 전적이 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관군들을 상대로 위세를 떨쳤을 뿐인 도적 떼 두령 따위가 감히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자렴 님, 적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선진을 맡아온 제가 후방으로 빠져 버리면 병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사방에서 위험이 빗발치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지만… 까짓것 한번 해봐야죠.”
흑발의 여인이 용맹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재촉했다.
날카로운 화살들이 빗발치건만,
그런데도 충성과 대의로 무장한 여걸의 진격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본대 병력이 3만의 황건적을 무사히 격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진류군을 방어해내야 한다. 그 사명감이 조홍의 가슴을 맹렬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많이 무모한 일이 될 텐데… 괜찮겠어요?”
조홍이 물었다.
그에 이성휘는 날카로운 창을 든 채로 조홍의 목숨을 노리던 황건적 장수를 일 거에 베어냄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자렴 님께서 호위를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군을 이끄는 총대장은 자렴 님이십니다. 설령 자렴 님께서 사지(死地)로 향하신다고 할지라도, 저는 반드시 자렴 님을 따를 겁니다.”
맹덕 님께서 그것을 부탁하셨으니, 이성휘는 그 말이 괜히 사족이 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았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홍이 그것을 싫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으으.”
그 거침없는 발언에 조홍이 앓는 소리를 냈다.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진군을 알리는 고각소리보다 격렬한 박동이 심장에서 쿵쿵 울려대기 시작했다.
몹시 부끄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덕분에 온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30만 대군을 상대하고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건만, 이성휘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가슴속에 용맹이 솟구쳤다.
“전군, 물러서지 마라! 황실과 조정의 뜻을 거스르는 역도의 무리들을 진흙탕에 모조리 처박아버리자!”
황금 투구를 쓴 흑발의 여인이 크게 소리치면서 장졸들에게 명령했다.
그에 장졸들이 일제히 돌격하였다.
압도적인 불리함을 떠안고 있음에도,
결코 물러섬이 없는 조조 군의 기세에 30만 대군이 요동쳤다. 패배의 굴욕을 경험했던 지난 전투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역시 진류군에 입성하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 * *
제음군(濟陰郡)에 위치한 대부분의 현들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정도현. 원구현. 구양현. 성양현.
무려 500리에 달하는 전선에 시체들이 내던져지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알렸다.
지금까지 무려 다섯 차례를 교전하여 다섯 번 모두를 승리한 조조 군은 30만 대군에 달하는 황건적 군세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번번이 승리를 거뒀음에도 병력이 크게 열세였기 때문에 황건적의 손아귀에 놓인 동군을 수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군이야말로 연주의 중심이예요.”
여전히 동군이 황건적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에 조홍은 불쾌하다는 심정을 내비쳤다.
수차례 싸웠음에도,
연주에 똬리를 튼 거머리들을 몰아낼 순 없었다.
“언니의 대업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저 동군을 제압해야 하는데….”
만약 휘하에 5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면 건곤일척의 승부를 노려볼 만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휘하 병력은 겨우 5천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랜 전투로 인해 병마들이 크게 지친 상황이었다. 현재로서는 진격을 막는 것만으로 급급한 실정이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역할은 맹덕 님께서 전투를 끝내실 때까지 30만 대군을 여기에 묶어두는 것이잖습니까.”
“그냥… 조금 답답해서 그래요.”
접전이 벌어질 때마다 수많은 병마들이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야 했다.
대체 언제쯤 끝이 나게 될까.
전투가 지속될 때마다 조홍은 회한과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용맹한 고결함을 갖춘 사내가 옆을 지켜 주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든든한 일이었지만… 가시덤불을 걷는 것처럼 전투가 지속될 때마다 온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전투를 총지휘하는 대장의 신분이었으므로.
“제가 감히 자렴 님의 복잡한 심중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자렴 님께서 훌륭하게 전황을 이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디,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새하얀 뺨이 움찔하고 떨렸다.
이성휘의 말에 조홍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침음을 삼키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 사내는 정말 비겁하다.
평소에는 둔감한 모습을 보이는 주제에…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항상 매서운 눈썰미로 속내를 간파하고는, 이렇게 상냥한 위로해준다.
그 자상한 배려에 반하지 않을 여자가 천하에 있을까.
‘모두 이 둔탱이 같은 남자 때문이야.’
얼굴이 매번 붉어지는 것도,
심장이 거침없이 뛰는 것도,
항상 이 사내가 내 곁에만 있어 주기를 바라는 욕망을 느끼는 것까지도 모두.
전부 이 남자 때문이다.
“…자렴 님?”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흑발의 여인이 아무런 말없이,
홍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가만히 응시하자 이성휘는 잠시 당혹감을 느꼈다.
그에 조홍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대답했다.
‘진정해! 진정해, 조자렴!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지만 쉬운 여자처럼 보일 정도로 호의를 드러내고 있잖아! 그런데 시, 심장은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야!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뜨겁고!’
흑발의 여인은 어느샌가 자기 시선이 사내의 입술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누구에게 들킬 염려도,
누구에게 방해받을 걱정도 없는 공간에 단둘이 있다고는 하나….
꿀꺽. 흑발의 여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저기….”
“말씀하십시오.”
“혹시 어림총사는….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조홍은 자신이 분위기에 휩쓸려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할 뻔했음에 간담을 쓸어내렸다.
혹시 어림총사는,
남녀 간의 상열(相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죽음과 비명이 오고 가는 전쟁터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피차 불편한 상황을 만들 뿐인 최악의 실수를 할 뻔했다.
“이제 그만 나가죠.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병장기와 물자들을 살펴야 하니까.”
크게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면서, 성급히 몸을 일으키면서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혹시 들키진 않았을까?
흑발의 여인은 최대한 빨리 이성휘의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상황에서 도망치려 했던 것이 원인이었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자갈에 걸려 발을 그만 헛디디고 말았다.
“읏!”
위태롭게 흔들리는 발걸음,
자칫 앞으로 넘어질 뻔한 조홍을 이성휘가 두 팔을 벌리면서 안아 들었다.
늘씬한 몸매의 여인이 발을 헛디딘 탓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남성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두터운 가슴에 폭 안기게 된 조홍은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격한 박동과 함께, 남몰래 연모하게 된 사내와 매우 가까운 지척에서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 * *
진류군을 출병한 조조군 본대와 3만에 이르는 황건적 군세가 최종적으로 맞붙게 된 격전지는 기오현(己吾縣)이었다.
연주의 세력권을 차지하기 위한,
조조군과 황건적의 싸움이 드디어 발발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병마들이 서로 뒤엉킨 채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예주(豫州) 패국(沛國)에서 올라온 새로운 병력이 지원군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주군께서 지금 사력을 다해 싸우고 계신다. 패국의 강병들이여, 주군을 도와 천하를 어지럽히는 도적의 무리들을 모두 일소하라!”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를 한,
푸른색의 아름다운 갑주를 입은 흑발의 여인이 날카로운 월극(月戟)을 번쩍 들어 올렸다.
늠름한 외침과 결연함에 찬 눈빛.
먼 길을 질주하여 거대한 전쟁터가 된 연주 지역에 도달했을 정도로 주군을 향한 충성심이 가히 절대적이었다.
“공격하라!”
“적진을 돌파한 아군을 지원하라!”
기오현에 마침내 도달한 3천의 병력이 연주 전선에 가세하였다.
거칠게 불어닥치는 댑바람처럼,
날카로운 창검을 든 장졸들이 황건적의 후미를 들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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