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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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연모하는 감정은 당혹스럽게, 전혀 예상치 못한 경우에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제까지 경계 대상을 여겼던 대상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뛸 정도로 사랑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황제(高皇帝)를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평양정후(平陽靜侯)의 후예인 내가 어떻게 출신 성분을 모르는 남자를…! 게다가 분명 어림총사는 언니를 좋아하는데!!’
쿵. 쿵. 쿵. 쿵.
흑발의 여인이 곤혹감과 혼란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제 머리를 마차에 박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실로 기괴하여,
조홍의 괴행을 본 무관들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 뒷걸음질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물론 멋있긴 했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목숨을 한 번 구해줬다고 그대로 반해 버리다니!’
내가 이렇게,
이렇게나 쉬운 여자였던가?
패국조씨 가문의 방계 출신인 내가!
우수한 재능과 아름다운 용모를 모두 겸비한 팔방미인인 내가 이렇게 쉽게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고?!
“패국(沛國)에서! 예주(豫州)에서! 나를 깊이 연모한다고 뒤를 졸졸 쫓아다닌 사대부 도련님들이 얼마나 많은데! 분명 밤하늘에 뜬 별자리들보다 많을 걸! 그런 내가 사내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 쪽에서 반해 버렸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흑발의 여인이 제 풀에 못 이겨 씩씩 소리를 내면서 분을 토해냈다.
사내가 자신에게 반한 것이 아닌,
자신이 오히려 반해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먼저 반해 버리는 쪽이 향후 관계에서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조홍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으으으!!”
곡식을 담은 보릿자루를 물어뜯으며,
다른 동물을 총애하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나버린 강아지처럼 분통을 토해냈다.
“우리 어르신, 진짜 대단하지 않냐?”
“말과 사람을 통째로 일도양단을 해 버렸다며! 우리 같은 범인들은 꿈도 못 꿀 일이지!”
마인참(馬人斬). 이성휘의 활약을 크게 찬양하는 무관들의 목소리에 조홍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자신을 향한 칭찬이 아닌데,
2인자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경쟁자를 치켜세우는 말일 텐데….
어째서인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휘를 향한 찬사에 기분에 좋아졌다. 가문의 곳간들을 모두 풀어 구휼미를 베풀고 싶을 정도였다.
‘당연한 일을 해냈지!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비규환 같은 사지에 뛰어들어서 나를 구해줬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조홍의 머릿속에는 이성휘가 백마 탄 영웅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뚝뚝 하고 얄미운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면, 무뚝뚝하지만 상냥하고…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검은색이 하얀색으로 변한 것처럼,
높디높은 하늘이 삽시간에 땅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갑작스럽고도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언니가 아니라… 날 좋아하나?’
연모의 감정으로 홍조를 띠고 있던 조홍의 얼굴이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사람이 언니가 아닌 나를,
나를 몰래 연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자마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뭐, 무릎 꿇고 애처롭게 매달린다면야…, 패국조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삼아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중원제일 검이라 불리는 인재를 혼인관계로 묶어두기 위한 일환이라면, 결국 가문과 주군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할 수밖에 없네!”
만약 패국조씨 가문의 여식들 중에 누군가가 어쩔 수 없이 희생을 해야 한다면,
내가 마땅히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사랑에 빠져 버린 흑발의 여인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면서, 중원제일 검을 패국조씨 가문의 충성스러운 가신(家臣)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만약 언니가 내심을 알게 되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둑고양이 같은 동생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황하에 던져 버렸을 것이다.
“저어, 호위장군 어르신….”
착각의 바닷속에서 마음껏 수영하던 조홍을 붙잡은 것은 당혹감에 물든 무관의 목소리였다.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반드시 조홍을 불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주군께서 찾으십니다.”
주군이 충직한 부하를,
조조가 사촌 여동생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중모현(中牟縣)에 반드시 포섭해야 할 인재가 있다.
연주(兗州)의 동군(東郡) 출신이며,
또한 연주의 사대부와 호족들로부터 촉망받은 인재로 평가받은 인물.
이성휘가 추천한 인물이 중모현의 현령을 역임하고 있음을 알게 된 조조는 당장 그 인재를 만나 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능한 인재들을 밝히는 그녀답게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크흠! 큼큼….”
이성휘와 함께 조조를 보필하게 된 조홍은 곁눈질을 슬쩍슬쩍 보내면서 옆모습을 반복적으로 훑었다.
‘찬찬히 뜯어보니까… 자, 잘생겼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사대부 도련님들하고는 완전 딴판이야. 사람이 이렇게 잘생겨도 되나?’
원래부터 잘생긴 얼굴에,
남몰래 품은 연모의 감정으로 인한 콩깍지 효과까지.
조홍의 두 눈에 보이는 이성휘의 옆모습은 씩씩하고 늠름하면서, 준수함을 넘어 출중함을 갖춘 용모를 자랑하는 미남으로까지 비치고 있었다.
“할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조의 뒤를 따르면서,
함께 나란히 말을 몰면서 나아가고 있던 이성휘가 물었다.
매번 자신에게 까칠한 반응을 보였던 흑발의 여인이 오늘따라 입이 과묵하게 변한 채, 자신을 계속 힐끗 곁눈질로 쳐다 보면서 입술을 우물우물 깨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 아뇨! 없어요! 없거든요!”
이성휘의 물음에 조홍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평소처럼 까칠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오히려 호의가 넘치는… 활화산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는 자기 속마음을 애써 위장하려는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헌데 맹덕 님, 호위가 저희 둘뿐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삐를 잡은 두 팔을 꼼지락대면서 부끄러움에 젖은 반응을 보이던 조홍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성휘가 선두에서 말을 몰던 조조에게 물었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귀관이 누누이 언급했던 귀한 인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일세. 호위의 치중을 무겁게 한 채로 만남을 요청한다면 무례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는 귀관과 자렴을 믿네.”
방긋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 조조는 이성휘와 조홍에게 강한 신뢰를 표현했다.
그리고 또한,
돌발적인 위험이 들이닥치더라도 중원제일 검을 믿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
신뢰에 찬 눈길을 보내는 언니와 감읍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성휘의 모습을 본 조홍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상념을 떨쳐 냈다.
격정(激情)을 힘겹게 억누르면서,
호위장군 조홍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언니, 미리 전령을 중모현에 보내서 온다는 것을 알리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언니가 오는 줄 모르고 그새 출타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일개 현령 따위에게 딱히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조홍은 중모현 현령과 관료들이 버선발로 나와서 언니를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현에 몸소 왕림한 만큼,
중모현 시골뜨기들은 응당 감읍한 표정을 지으면서 환대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중모현은 사예주에 속한 현이다. 사예주는 정동장군의 관할 밖이지. 중모현의 현령을 내가 강제로 소환할 권한은 없다. 중모현에 들렀는데도 만나지 못한다면… 아쉽지만 다음에 또 올 수밖에.”
만약 중모현의 현령이 안타깝게 출타 중이라면 다음에 다시 행차하여 벽소(辟召)를 청하겠다.
일개 현령 따위에게 목을 매는 언니의 행동에 조홍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모현의 현령을 몸소 추천했던 이성휘를 얄밉다는 듯 노려보았다.
“현령 어르신을 찾으신다고요?”
이윽고 중모현에 도착하게 되자 보초를 서고 있던 위병들이 다가왔다.
그에 이성휘는 용무를 전했고,
조홍은 당당함이 넘치는 목소리로 신분을 알렸다.
“저, 정동장군…?”
“아! 낙양에서 출병하셨다는 장군이시군요!”
수천 명에 달하는 군세를 이끄는 총사가 겨우 두 명을 대동한 채 중모현으로 행차하였음에 위병들은 수상쩍게 여기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납득을 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현령 어르신을 불러오겠다며 위병들 중 한 명이 어딘가로 향했다.
“내가 중모현령 진궁입니다.”
염료로 물들인 화려한 금발이 눈에 띄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어인지 반말인지 모를 소개를 하며,
조조와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알록달록 하게 물들인 제 손톱을 툭툭 튕기는 버릇을 보였다.
귓불을 뚫은 은색 귀걸이만큼이나 강한 색채를 가진 성격과 용모를 겸비한 여인은 중모현에 애써 행차하여 자신을 만나려 한 조조에게 강한 흥미를 느꼈는지 촉촉한 입술을 달싹였다.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연주 일대를 침탈하려는 황건적을 격퇴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정동장군 조조라고 한다.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헌데 정동장군께서 어찌하여 이 작은 현에 몸소 행차하셨는지요? 보시다시피 변변찮은 일개 고을에 불과합니다만.”
진궁은 어깨를 으쓱 흔들면서,
어마어마한 유명세와 명성을 자랑하는 정동장군 어르신께서 중모현을 행차한 목적이 부족한 물자를 징발하려는 것이라고 추측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에 조조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물자들은 연주에서 충당할 계획이다. 내가 중모현에 원하는 것은 나를 보좌할 인재다. 중모현령, 그대가 군을 통솔하고 작전과 책략을 수립하는 정벌군의 군사(軍師)가 되어줬으면 한다.”
“정벌군의 군사… 말입니까?”
다짜고짜 나타나 정벌군의 군사가 되어달라는 조조의 제안에 진궁은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나라의 중심이라 불리는 연주 지역을 침탈하고자 청주(青州)와 서주(徐州), 예주(豫州) 일대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황건적의 잔당들이 일제히 거병을 시작했다. 만의 백 곱절에 육박하는 머릿수를 대적하기 위해선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조조의 뒤이은 말에 진궁은 근심에 빠진 채 얼굴을 일그러졌다.
황건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무려 백만 명. 1만의 숫자에 무려 백을 곱한 황건적들이 연주를 침탈할 목적으로 움직였다.
한나라의 수많은 군현들을 집어삼켰던 황건적이 이제 다음 차례로 연주를 삼은 것이었다.
“그럼 제가 군사가 된다면… 뭘 하면 되겠습니까?”
진궁이 물었다.
내심을 떠보려는 듯한,
자신을 정벌군의 군사로 벽소하려는 조조의 배포와 그릇을 캐묻는 물음이었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백만에 이르는 황건적과, 북쪽에서 호시탐탐 연주 지역을 노리는 백파적과 흉노를 모두 격멸할 수 있는 계책이 필요하다. 정벌군의 군사가 된다면 연주를 침범한 무리들을 모두 제북(濟北) 땅에 몰아넣은 뒤, 일 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줬으면 한다.”
조조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진궁을 향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을 주문했다.
일말의 거짓도, 겉치레도 느껴지지 않는 조조의 강압적인 주문에 진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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