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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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을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조조 군은 신속하게 형양(滎陽)에 도착했다.
동탁 군은 추격부대를 보내지 않았다.
무맹도위 정원을 낙양에서 축출하고 부곡장 오광과 점군사마 진진을 제거한 뒤, 대장군부와 낙양 군단을 포섭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형양에 도착한 조조 군은 한숨을 돌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부대를 재편성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형양을 거쳐 연주(兗州)에 입성할 준비를 취했다.
“예상외로 병졸들의 피해가 적었습니다만…, 후군이 수송하던 물자들의 대부분을 소실했습니다. 연주에 도착할 쯤에 군량이 바닥날 것 같습니다.”
이성휘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와 병량은 언제라도 다시 구할 수 있네. 지독했던 아비규환 속에서 장졸들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을 위안으로 삼도록 하세. 귀관 덕분에 자렴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 않은가?”
우려에 찬 반응을 보이는 이성휘의 모습에 흑발의 여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첫 단계를 시작하기 전부터 난관에 놓이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하겠는가?
잃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그 잃어 버린 것들을 복구하고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예, 알겠습니다.”
조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성휘는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장졸들을 단속하는 조홍과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번쩍번쩍한 황금 투구와 황금 갑옷,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질끈 묶어 갸름한 얼굴이 부각되어 보였다.
갑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커다란 거유와 치마 아래로 드러낸 탱탱한 허벅지. 무희처럼 두 팔에 두르고 있는 얇은 천은 그녀의 가느다란 몸매를 돋보이게 했다.
“흐아앗…?!”
이성휘와 얼떨결에 시선을 마주하게 된 조홍은 새하얀 얼굴을 삶은 문어처럼 붉힌 채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무심코 폭탄을 건드린 것처럼,
발작하듯이 화들짝 놀란 반응과 함께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더니 이성휘에게 등을 보인 채로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녀를 부르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연신 들렸지만, 그녀가 서두르는 발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분명 쉬고 있으라고 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점점 멀어져가는 조홍의 뒷모습을 본 조조가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분명 전투에서 큰 충격을 받았을 터.
그를 염려한 조조는 사촌 동생에게 쉴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언니를 향한 충성심이 투철한 조홍은 무리해서라도 도움이 되기를 원했다. 후군이 모든 물자들을 잃은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이 대단하십니다.”
“자렴은 내 자랑스러운 여동생일세.”
이성휘의 칭찬에 조조가 후후 웃으면서 조홍을 치켜세웠다.
동생의 변화를 짐작하지 못한 채,
조조는 조홍을 더욱 중임하겠노라는 다짐했다.
“이번에도 큰 공훈을 세웠다면서!”
씩씩함에 찬 발걸음과 함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녀가 다가와 이성휘의 목에 팔을 둘렀다.
머리를 짓누르는 풍만한 가슴.
남성들을 미치게 만드는 뇌쇄적인 부드러움이 뺨을 감싸 안았다.
선봉을 이끌었던 하후돈이었다. 먼저 형양에 도착하여 아군 진지를 구축한 그녀는 조조와 이성휘가 돌아오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며, 형양 주변을 수색하고 돌아온 척후병들이 전한 경과를 설명했다.
“서량 제일의 용장인 화웅을 용마(龍馬)와 함께 베어 버렸다면서?! 백성들이 그걸 마인참(馬人斬)이라고 부르더라. 키가 무려 8척이 넘는 거인을 상대로 일격에 쓰러트린 중원제일 검의 무명이 벌써 낙양 전역에 퍼졌다더라고!!”
화웅을 일격에 참한 중원제일 검.
서량 제일의 용장이 어린아이처럼 일방적으로 당해 버렸다는 소식으로 낙양이 크게 떠들썩했다.
호사가들은 침이 마를 정도로 떠들어댔고,
그를 들은 백성들은 말과 사람을 일 거에 참해 버린 중원제일 검의 무명과 명성을 칭송하면서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너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수십 명의 검객들을 상대로 진류왕을 지키질 않나, 송현에서는 본초까지 지켜냈다면서! 게다가 이번에는 자렴까지 구해 냈잖아! 이 호색한 녀석, 우리 중원제일 검은 여인을 지킬 때만 전력을 다하시는 거야?”
하후돈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농담을 늘어놓았다.
그에 이성휘는,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대답했다.
물론 우연치고는 너무 잘 맞아떨어졌지만.
“이제 그만 떨어져라, 원양.”
“우리 주군께서 또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셨네.”
옆에서 지켜보던 조조의 날 선 경고에 이성휘를 품에 안고 있던 하후돈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를 놓아주었다.
위풍당당한 여걸이라도,
질투에 빠진 여인은 무서웠던 모양이다.
풍만함과 탱탱한 탄력을 자랑하는가슴이, 조조에게선 결코 느끼지 못할 젖가슴이 멀어지게 되었음에 이성휘는 무심코 한탄했다.
“맹탁에게 연통을 보냈으니 우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끝냈을 터. 원양, 선봉을 이끌고 진류군(陳留郡)에 가 깃발을 꽂아라.”
“알았어, 알았다고.”
이성휘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드러내는 그녀는 멀리 몰아내려는 듯, 조조는 하후돈에게 선봉을 이끌고 진류군에 주둔한 것을 명령했다.
그 명령에 하후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양, 도저히 방심할 수 없는 여자로군. 부관이 다시 한번 크게 무명을 떨치자마자 꼬리를 치면서 다가오다니…. 언제 정분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부관과 함께 전선에 보내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겠군.’
하후돈을 멀리 밀어내고,
조홍을 가까이 배치할 생각이었다.
이성휘에게 한 점 망설임 없이 호감을 표시하는 하후돈보다는, 이성휘를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조홍을 옆에 두는 편이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조조군과 함께 형양에 도착한 유협 일행은 아비규환 속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한 궁인들을 애도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끝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했건만,
날카로운 창검에 목숨을 잃은 궁인들을 그대로 둔 채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음이 애석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궁인들은 죽은 동료들을 대신하여, 진류왕 유협을 더욱 충실히 보필하겠노라고 서로 모여 굳게 다짐하였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푹 숙인 작은 황녀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는지, 초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면서 물었다.
유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잠시만, 마음을 추스르면… 마음이 나아질 것 같다….”
초선과 궁인들에게 걱정과 우려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지 유협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담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장 힘든 위치에 서 있을 텐데도. 그런데도 유협은 궁인들을 배려하여 슬픈 기색을 애써 감췄다. 동심에 빠질 세월도 없이, 너무도 빨리 조숙해져 버린 황녀는 슬픔과 괴로움을 참아내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전하.”
유협과 초선이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궁녀 한 명이 다가왔다.
대장군부가 보낸 살수들이 악성전을 습격했을 당시에 유협을 품에 안은 채 보호했던 그 궁녀였다.
“중원제일 검께서 이번에도 큰 공훈을 세웠다고 합니다. 정동장군 휘하의 무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옵니다.”
자괴감에 빠진 황녀를 달래주려는 듯,
오랫동안 유협을 보필해온 궁녀는 두 팔로 작은 황녀를 안은 채로 무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무려 8척이 넘는 거인을 단숨에! 말과 함께 베어 쓰러트렸다고 하옵니다!”
궁녀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환관들이 다가왔다.
환관 한 명이 흙바닥에 엎드린 뒤,
그 위에 다른 환관이 올라타면서 화웅과 용마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성휘 역할을 맡은 것은 초선. 궁녀의 손에 이끌리게 된 초선은 얼떨결에 중원제일 검이 되어 화웅을 흉내 내고 있던 환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일도양단을 할 것처럼 언월도를 두 손으로 든 거인과, 당장에라도 짓밟을 듯이 맹렬하게 달려드는 용마! 그러나 중원제일 검에 이게 굴하지 않은 채로, 도리어 검을 휘둘러 마인참(馬人斬)을! 말과 사람을 동시에 벴다고 하옵니다!”
슬픔에 빠진 유협을 달래주기 위해,
궁녀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크게 소리치면서 초선에게 눈짓을 보냈다.
허둥지둥하며 머뭇대는 모습을 보이던 초선이 “에잇!”하는 엉성한 기합과 함께 두 팔로 힘껏 검을 휘두르는 시늉했다.
그러자 환관들이 동시에 쓰러졌다.
위에 올라탄 환관은 물론, 아래를 받치고 있던 환관까지 동시에 무너지면서 화웅의 최후를 표현했다.
“이, 이겼사옵니다…!”
여전히 엉성한 모습을 보이던 초선이 유협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마주하게 되자, 양손을 높이 뻗으면서 승리를 알렸다.
장터에도 보여 줄 수 없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궁인들의 촌극이다.
“푸훗! 푸흐흣… 푸하하!”
하지만 그를 본 유협은 쿡쿡 웃음을 터트리면서 기뻐했다. 양손으로 입을 폭 가린 채, 자신을 위해 웃음거리가 되어 주는 궁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 *
위병이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왔다.
“현령 어르신! 지금 조조군이 바로 10리 앞까지 왔습니다!”
위풍당당하게 연주 출병에 나선 조조군이 동탁 군의 급습을 받고 개털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물자들을 대부분 잃고,
쫓겨나듯이 낙양을 나서게 되었다.
현(縣)의 치안을 단속하는 위병들은 필시 조조군이 고을을 공격하여 약탈을 벌일 게 분명하다며, 현령에게 급히 백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힘없는 노약자들부터 대피시킵시다!”
“산에 숨어 버리면 저들도 어쩌진 못할 겁니다.”
조조 군의 목적은 연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군벌 세력이 되려는 것이었다.
뛰어난 혜안과 박식함을 자랑하는 현령 어르신께서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현령에게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았던 위병들은 철석같이 그리 믿고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들처럼 동요하지 말고.”
여성이 말했다.
그 말에 다급함을 외치던 위병들이 일제히 입을 꾹 다물었다.
“정동장군 조조는 명분과 명성, 이 두 가지를 철저히 중시하는 인물이야. 급한 불을 끄겠답시고 낙양에서 부지런히 쌓은 명분과 명성을 포기하는 머저리 같은 짓을 범할 리 없어. 오히려 위선을 부렸으면 부렸지, 절대로 무뢰배 같은 행동을 범하진 않을 거야.”
귓불을 뚫은 은색 귀걸이,
염료로 알록달록 하게 물들인 손톱.
잠그지 않은 단추 아래로 보이는 가슴골과 탄탄한 허벅지가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가 뇌쇄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다.
앙칼진 고양이처럼 치켜뜬 사나운 눈매와 보석처럼 빛나는 자색 눈동자. 금발로 염색한 머리카락까지.
중모현(中牟縣)을 다스리는 현령(縣令)은 매우 화려하고 독특하면서, 관인(官人)이라고 하기엔 많이 불량해 보이는 외견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조조군을 성대하게 맞이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현령 어르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잔치라도 마련해주면 감읍하게 여기면서 그거라도 대충 먹고 가지 않겠습니까! 물론 현령 어르신께서는 웃는 얼굴에도 마땅히 침을 뱉으시는 분이십니다만….”
호기롭게 꺼낸 위병의 의견에,
여성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미친 소리하고 있네. 아니, 내 욕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서량에서 온 동탁이라는 놈이 승냥이처럼 황실과 조정을 거머쥔 상황에, 동탁에게 쫓겨난 조조군을 우리가 환대해주자고? 그럼 우리 중모현은 조조군이 떠난 다음에 동탁 군에게 초토화당하면 되겠네!”
촌철살인처럼 일침을 가한 여성의 반박에 위병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동탁과 조조는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상태,
만약 중모현이 조조군을 크게 환대하였다는 소문이 낙양에까지 알려지게 된다면, 필시 동탁은 십만 대군을 몰고 와 중모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난 방책을 알려 줬으니까 이제 그만치소로 돌아갈 거야.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덜떨어졌지만 눈치만큼은 빠른 너희들이라면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
여인은 구석에 놓아둔,
‘한 방에 장각놈 곁으로.’ 라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적힌 못 박힌 방망이를 들었다.
못과 쇠붙이 등, 날카로운 금속 물건들을 나무방망이에 박아 넣은 흉기였다. 일명 못빠따. 중범죄를 저지른 중죄인들에게 하늘을 대신하여 천벌을 내릴 때 사용하는 중모현의 현령, 진궁의 단짝친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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