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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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협은 마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돌리면서 어림군(御臨軍)과 함께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이성휘에게 물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한 번…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는 없겠는가?”
불길한 마음이 든 것일까.
작은 황녀는 이번에 낙양을 떠나버리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한 듯했다.
눈꺼풀을 슬며시 내린 채,
고개를 푹 숙이면서 서글픈 마음을 내비쳤다.
“죄송합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전하께서 낙양을 벗어나시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알겠다. 그대의 말이 맞다.”
유협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송구하다는 반응을 보인 이성휘는 시선을 들어 마차에 타고 있던 연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남윤(河南尹) 왕윤의 수양딸,
초선이 숙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작은 황녀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몸을 안아 들었다.
슬픔에 빠진 황녀를 두 팔로 꼭 안으면서 작은 가슴에 품은 죄책감을 달래주었다.
“전하를 부탁합니다.”
“알겠사옵니다, 명공. 소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이성휘의 당부에 초선이 활짝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비록 양부와 헤어지게 되었으나,
초선은 고귀한 신분을 모실수 있어 영광이라며 유협의 수발을 드는 궁녀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는 또한 양부의 뜻이기도 하였기에 초선은 무간지옥이라고 불릴 정도로 살벌한 형국이 오고 가고 있는 연주(兗州)로 향하는 마차에 스스로 몸을 실었다.
“중원제일 검이신 명공께서 소녀를 몸소 지켜 주신다면, 소녀는 어디든 명공을 따를 것이옵니다.”
화사한 작약꽃처럼 맑은 미소를 지으면서 강한 믿음을 보이는 초선의 행동에 이성휘는 무심코 얼굴을 붉혀야 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었기에,
중원제일 검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들었음에도 반박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숙맥 같은 이성휘의 반응에 초선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모르는 중원제일 검의 숨겨진 일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가슴속의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마차를 출발하라!”
“연주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방을 철통 같이 경계해야 한다!”
어림군 무관들이 소리쳤다.
날렵한 솜씨로 군마에 오른 무관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진류왕 유협의 행차를 알렸다.
창검을 들고 군기를 높게 세웠다.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졸들처럼 무거운 위세를 떨치면서 군중의 사기를 집결시켰다.
“총사, 정동장군께서 이끄시는 병력이 낙양 성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알겠다.”
조조가 이끄는 부대가 하후돈이 지휘하는 선봉대의 바로 후열에 위치했다.
그리고 중군(中軍)에 이성휘.
진류왕 유협이 탄 마차를 중심으로 200여 명에 달하는 어림군이 방어진형을 형성한 채였다.
마지막 후군(後軍)은 조홍과 하후연이 지휘하고 있었으며, 전쟁에 필요한 물자들을 수송하는 수송병들이 대부분의 치중을 이루고 있었다.
‘먼저 원소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낙양을 벗어났다고 들었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사수(汜水)를 도하하여 하내군(河內郡)을 목전에 두고 있겠지.’
말을 재촉하면서 마차의 옆을 나란히 내달리던 이성휘는 먼저 하북으로 떠난 원소를 떠올렸다.
고아한 매력을 가진 금발의 여인.
현명한 지혜와 아름다운 용모로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총아를 받은 재녀답게 내적인 아름다움과 외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었다.
애틋한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작별 인사조차도 하지 못한 채로 헤어지게 된 것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제 낙양과도 작별인가…. 설마 조조에게 충성을 바치고, 낙양을 뒤로한 채 연주로 가게 될 줄이야.’
훗날, 중원의 패자에 등극하게 될 조조 군의 시작을 알리는 출병이다.
벅찬 가슴에서 고양감을 느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오히려 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주로 내려가 세력을 규합하여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목적은 원래 역사와 동일했으나, 자기 개입으로 인해 분명히 많은 것들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흠…!”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떠나는 것에 깊은 의의를 두면서 가슴이 북돋는 것을 느끼던 이성휘가 갑자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육감에서 전달된 의문의 위기감,
위풍당당하게 관문을 통과하여 낙양을 빠져나가던 도중에 갑작스레 위기를 알리는 타종(打鐘)을 때리는 것처럼 마음을 옥죄는 위기감이 들이닥쳤다.
“전군은 주변을 경계하라!!”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감.
따갑게 전해지는 살의들의 향연.
이성휘는 연주로 떠나는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시가지에 모여든 낙양 군중들 속에, 아군들을 향해 조용히 살의를 품고 있는 무리들의 존재를 넌지시 간파했다.
“활을 든 살수가 지붕 위에 있다!”
“진류왕 전하를 호위하라! 모두 방패를 들어 마차를 방어하라!”
무관들의 외침이 크게 울리고,
장졸들의 위용 넘치는 모습에 감탄하던 낙양 백성들의 외침이 돌연 비명으로 바뀌었을 때.
사방에서 화살들이 빗발쳤다.
또한 서량군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는 낙양 백성들을 베고 찌르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던 조조군을 급습했다.
* * *
동탁 군의 급습이 시작되기 전,
봉거도위(奉車都尉) 동민은 대장군부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군부의 요직에 배치된 거기장군(車騎將軍) 하묘의 부하들을 차례대로 척살하기 시작했다.
“크학!”
“이, 이놈들이 감히!!”
생각 이상으로 기습이 수월했다.
거기장군 하묘의 부하들은 백주대낮부터 군부에 모여 연회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곧 죽게 될 줄도 모르고,
하진의 뒤를 이은 후임자로 임명된 거기장군 하묘의 권세만 믿던 부하들은 난데없이 사방에서 쳐들어온 침입자에게 허를 찔리게 되었다.
“네, 네놈들이 감히!”
“우리는 거기장군 하묘를 따르는 일파들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들이… 커헉!!”
군부에 모여 연회를 벌이던 하묘의 부하들은 창검을 들고 난입한 병졸에게 일방적으로 살해당했다.
한나라 황실의 웃어른이자 섭정인 태후로부터 군권을 위임받은 거기장군 하묘를 습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는지 매우 무방비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봉거도위!”
“우리 대장군부에 일말의 언질조차 없이 거사를 시작하다니!”
상의도 없이 군사를 일으켜 거기장군 하묘를 습격한 동민의 단독행동에 대장군부의 무관들이 크게 경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예전부터 하묘는 척살 대상이었으나….
기세에 휩쓸리듯 가세하게 된 무관들은 갑작스러운 군사행동에 놀라면서도, 십상시와 내통하여 대장군을 죽게 만든 원수 중 한 명인 하묘를 치는 것에 호응했다.
“정변이 벌어졋다!
“대장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뽑아 든 칼을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검집에 집어넣을 순 없다.
떠밀리듯 기습에 가세하였으나,
대장군부의 무관들은 등을 보이면서 달아나는 하묘 일파를 하나둘씩 살해하기 시작했다.
검에 베인 상처에 핏물을 쏟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무관을 발로 밟은 뒤, 벌레처럼 바닥에 누운 채로 꿈틀대던 무관의 목덜미를 날카로운 칼날로 구멍을 내버렸다.
“거기장군 하묘를 찾아라!
“더러운 환관들과 내통하여 어르신을 시살한 놈이다! 그 목을 베어 어르신의 넋을 달래주자!”
시뻘건 핏물과 단말마의 비명.
복수심에서 비롯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십상시의 난에서 대장군을 잃은,
한순간에 주인을 잃고 들개가 되어 버린 대장군부의 장졸들이 본격적으로 거사에 가세했다.
“모, 몰랐네! 환관들에게 재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놈들이 감히 형님을 살해할 줄은 나도 몰랐단 말일세!! 십상시의 저열한 속셈을 내가 미리 알았다면 놈들의 행위를 눈감았겠는가?!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게!!”
끔찍한 살육이 계속해서 벌어지던 중,
궐담을 넘어 도망치려다가 결국 무관들에게 붙잡히게 된 하묘가 끌려오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 체면마저 잊었는지,
눈물과 콧물을 뚝뚝 쏟아 내면서 손이 발이 될 정도로 싹싹 빌면서 목숨을 구걸했다.
머리에 쓰고 있었던 소관(小冠)이 떨어지고 머리가 산발이 되었음에도 하묘는 제발 살려달라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이 쳐 죽일 놈!”
무관들 중 한 명이 철퇴를 내리치면서 목숨을 구걸하던 하묘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죽여라! 놈을 죽여라!!”
“대장군 어르신의 복수다! 네놈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이지 못 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이윽고 하묘가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에 피를 흠뻑 적신 채로 쓰러진 하묘의 모습을 본 무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온몸을 계속해서 찌르기 시작했다.
환관들이 북궁 성찬문에서 하진을 그렇게 난자했던 것처럼, 그를 되돌려주겠다는 것처럼 하묘 또한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하태후! 이제 가덕전의 여우를 죽이자!!”
“그년이야말로 우리 어르신을 환관들에게 비참히 죽게 만든 원흉이다! 사특한 독녀(獨女)를 죽여 구천을 떠돌고 계신 어르신의 넋을 달래자!”
온몸에 피 칠갑하게 된 무관들은 살육의 광기에 미쳐 버리기라도 한 듯,
이제는 하태후를 죽이자며 크게 소리쳤다.
황실의 웃어른이자 황제의 모친이며, 또한 유약한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행하는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위정자였음에도 대장군 하진의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대장군부는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봉거도위.”
“그래, 드디어 들개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부곡장 오광과 점군사마 진진의 명령조차도 들어 먹지 않을 정도로 대장군부의 장졸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광인처럼 복수를 부르짖으며,
날카로운 창검을 쥔 피 칠갑의 장졸들이 성난 벌떼처럼 궁궐로 발걸음을 옮겼다.
십상시의 난이 진압되었음으로 꺼지지 않았던 잔불이 마른 바람을 만나 삽시간에 태산을 태우는 불길로 성장하듯, 봉거도위 동민의 주도로 벌어졌진 거기장군 하묘의 척살을 기점으로 대장군부 장졸들은 대장군 하진의 복수를 천 명했다.
“제 오라비를 죽인 년이 무슨 태후란 말이냐!”
“황제 폐하가 계신 궁궐은 절대로 공격해선 안 된다! 우리가 도모하려는 것은 하태후, 오라비를 살해한 독녀뿐이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궁궐로 향했다.
궐문을 부수고 위병들을 살해한 뒤,
궁궐 전각들에 기름을 끼얹고 그 위에 횃불을 내던지면서 분노를 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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