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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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의 난이 진압된 이후,
환관들이 가덕전의 조서를 위조하여 오라비를 궁궐로 불러들인 뒤, 북궁 성찬문에서 교살하였음을 알게 된 하희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내 어리석음이 오라비를 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이복오라비를 비참히 죽게 만든 자기 어리석음을 크게 원망하고 한탄한 하희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가덕전에서 칩거에 빠지게 되었다.
“모후(母后)께서는 여전히 답이 없으신가.”
“화, 황송하옵니다….”
유변의 말에 가덕전의 궁녀들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군 채로 읍소하듯 대답했다.
대장군 하진이 시살된 뒤,
십상시가 일으켰던 정변의 전말을 알게 된 하희는 자기 어리석음을 크게 한탄하면서 삶의 의지마저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동탁과 정원이 정전에 입조하였을 때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속세와 완전히 연을 끊어 버리고 싶다는 말만을 가덕전의 궁녀들에게 남겼을 뿐이었다.
“…며칠 동안 계속 곡기를 일절 끊으신 까닭에 저희들 또한 심려가 크옵니다.”
“대체 어찌해야…!”
유변은 숙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어머니를 걱정해야 했다.
유약했던 황제는 좀 더 성숙해지게 되었다.
존경해온 숙부에 이어 어머니마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감을 겪게 되면서,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좀 더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각오와 강박증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폐하.”
금발의 작은 아이가 뚜벅뚜벅 걸으며 유변에게 다가왔다.
발해왕 유협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띄운 채,
어머니마저 변고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던 유변을 위로 했다.
“히, 힘내시옵소서…!”
작고 오밀조밀한 손을 주먹 쥐면서,
이복오라비에게 진심이 담긴 응원했다.
식음을 전폐한 채, 서서히 말라죽어 가고 있는 독부(毒婦)는 낳아준 어머니를 독살하고 키워준 할머니마저도 핍박하여 죽음에 내몬 원수였지만…,
유협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해준 오라비만큼은 미워할 수 없었는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고맙다, 협아. 내가… 아니, 짐이 또 불민하고 우둔하여 너에게까지 흉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구나. 이럴 때일수록 짐이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유변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면서,
자신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여동생에게 힘겹게나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어머니가 지금까지 철부지였던 나를 지켜 주었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니를 지킬 차례였으므로.
* * *
부곡광 오광, 점군사마 진진.
대장군 하진의 두 심복들이 하태후를 시해하고 반란을 주도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소식을 원소로부터 듣게 된 이성휘는 혼란을 금치 못했다.
동탁과 정원을 계속 주시했기 때문일까,
하진을 따랐던 두 심복들이 수면 아래에서 반란을 꾀하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광과 진진은 십상시의 난이 진압된 이후, 홀연히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 판단이 미숙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동탁과 정원만을 주시했을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이성휘는 원소가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던 정보를 조조에게 보고했다.
병주목 동탁과 부곡장 오광이 손을 잡았다.
그 말은 곧,
서량의 동탁 군 세력과 중앙의 대장군부 세력이 동맹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했다.
우두머리였던 하진이 십상시의 손에 시살되면서 대장군부는 크게 쇠퇴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실세였다. 대장군부가 동탁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귀관,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말게. 나 또한 귀관과 마찬가지였으니. 본초…, 그 여자는 항상 나를 앞서가는군.”
흑발의 여인이 손톱을 깨문 채,
동탁과 대장군부가 손을 잡고 거사를 준비하고 있음에 깊은 우려를 보냈다.
그 소식을 먼저 접한 원소는 조정의 여론을 동원하여 정북장군(征北將軍)에 임명된 뒤, 기주(冀州)로 출병하기 위한 계획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동탁과 오광이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낙양을 탈출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나 또한 계획을 하루빨리 앞당기려 하네. 내 오랜 친구가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의 태수일세. 나 또한 계획은 미리 수립해 두었네. 나머지는 계획을 차례대로 결행할 뿐. 계획들이 무사히 성공한다면 연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네.”
내일쯤이면 진류 태수가 보낸 상소문이 황실과 조정에 도착할 것이다.
출병의 명분은 연주 황건적의 토벌.
연주 군현을 다스리는 태수들이 황건적 잔당의 토벌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과거 조조는 영천 전투에서 황건적 무리를 크게 격파한 공로로 제남상(濟南相)에 임명되어 연주에 속한 군현을 다스렸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쪽 사정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
“휘하의 모든 제장들이 맹덕 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현재 연주를 위협하는 황건적 무리가 백만 명에 이른다고는 하나,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므로 능히 깨트릴 수 있을 겁니다.”
“나 또한 귀관과 휘하 장수들의 충성과 용맹을 믿어 의심치 않네.”
단숨에 황건적 무리들을 박살 내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이성휘의 말에 조조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장졸들이 있다.
군대를 이끌고 진출하여 대업을 완성하기 위한 기틀을 다질 야욕에 조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중원제일 검으로 무명을 떨친 최고의 무인을 비롯하여, 충성스러운 친족과 용맹한 장졸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가슴에 뜨거운 고양감이 넘쳐흘렀다.
“진류군에 첫 기틀을 마련한 뒤, 동군(東郡)으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거사를 시작할 것일세! 원소가 약삭빠르게 정북장군의 위상을 이용하여 하북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나 또한 정동장군이 되어 연주와 서주(徐州), 청주(青州)를 차례대로 복속 시켜 낙양을 도모하기 위한 상경군을 일으키려 하네.”
자신감에 고양된 탓일까,
조조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지금까지 작은 가슴속에 숨겨뒀던 야욕을 망설임 없이 드러냈다.
지금까지 여력이 없었을 뿐, 이미 조조에게는 천하를 도모하기 위한 방책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먼저 연주를 장악한 다음, 우리 조씨 가문과 하후씨 가문의 고향이자 수많은 재사(才士)들의 터전으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예주(豫州)의 인재들을 두루 포섭할 것일세.”
상군교위 건석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그 뒤에 곧바로 벌어졌던 십상시의 난 또한 성공적으로 진압한 덕분에 조조는 한나라 황실의 충신이자 유능한 군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명성은 곧 명분으로 성장하며,
뚜렷한 명분을 가진 군웅의 주변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게 되리라.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한나라의 충신임을 강조하면서 연기를 해온 것이 아닌가! 자기 배포와 그릇이라면 분명히 예주의 우수한 인재들을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역시 위나라를 건국한 영웅은 일개 범인(凡人)들이 감히 언감생심도 내지 못할 장대한 야망을 품고 가슴속에 품고 있다는 건가….’
일장 연설을 하듯 불길처럼 맹렬하고 뜨거운 야망을 드러내는 조조의 모습은 이성휘의 시선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했다.
야망에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흥분에 달아오른 뺨과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
몸을 흔들 때마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거대한 대망을 품고 있는 뜨거운 몸은 이성휘를 끊임없이 매료시켰다.
야심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성휘는 자신이 조조라는 이름의 여성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의 맹렬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속의 감정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크, 크흠! 너무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기 때문일까.
이성휘의 진심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조조는 잘 익은 살구처럼 뺨을 붉힌 채로 헛기침했다.
남몰래 연모하는 남성이 자기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부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는 이성휘의 시선은 조조의 가슴을 크게 뛰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그… 야심에 찬 모습을 보이시는 맹덕 님께서 너무 아름다워 그만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그그그런가…!!”
이성휘가 솔직하게 본심을 밝히자,
조조는 강풍에 휘말린 바람개비처럼 시야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해 무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짝사랑을 간직해온 조조에게 있어 이성휘의 솔직한 고백은 정신을 뒤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전해졌다.
기쁘지만 너무 당혹스럽다.
그래서 조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저는 자신감이 넘치시는 맹덕 님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그 옆을 지키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성휘의 뒤이은 말에,
조조는 강한 충격을 받은 모래주머니처럼 가슴속 심장이 크게 박동치는 것을 느꼈다.
‘큭! 이리도 든든하고 멋진 사내가 진심으로 고백을 해 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항상 느껴온 바이지만…, 귀관은 이 조맹덕이 과분함을 느껴버릴 정도로 완벽한 사내다.’
어째서 이 사내는….
처녀의 마음을 홀리게 하는 고백에 이리도 능숙하단 말인가.
여자는 실로 단순하고 어리석어,
연모하는 남성이 조금만 마음을 베풀어도 쉽게 마음을 빼앗겨버리고만다.
야심과 야욕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조조 또한 연모하는 남성에게 홀려 버린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무리한 부탁을 하더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로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귀, 귀관은 나를 어찌 생각하는가…? 주군이기 이전에 나 또한 한 명의 여인일세. 귀관의 말은 무척이나 기쁘고 또 기쁘지만, 그런 말을 계속해버리면…, 나는 결국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아닌, 남자와 여자 간의 관계로 오해해 버릴지도 모르네.”
용기를 내어,
진심으로 이성휘에게 말했다.
그에 이성휘가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순간,
조조와 이성휘,
두 남녀의 공간이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면서 삐까뻔쩍한 황금 갑옷을 입은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병마를 모두 소집시켰어요.”
우장군 조조의 종제였던 호위장군 조홍이 휘하 병력들의 훈련 상황을 전했다.
기적적인 순간에 등장한 그녀는,
묘하게 뺨에 붉어진 상태인 조조와 이성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못마땅함에 물든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어림총사는 궁궐로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너무 오랫동안 궁궐을 비워두면 황실과 조정이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르고요.”
“예, 알겠습니다.”
조홍의 충고에 이성휘는 예를 취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등을 보인 채 떠난 이성휘의 모습에,
조조는 무심코 안타까움에 찬 신음을 흘렸다.
“언니, 어림총사와 단둘이 좁은 공간에 있는 상황은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한 염문이 군중에서 돌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어림총사가 제 주제도 모르고 언니에게 흑심을 품는 것 같아서요.”
그 언니의 속마음을 전혀 모른 채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던 조홍은 쐐기를 박듯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래서 제가 어림총사에게 경고했죠, 출신성분도 불분명한 사람 주제에 감히 언니에게 흑심을 품지 말라고! 황실 종친이나 뼈대 있는 집안의 사대부 자제도 감히 될까 말까인데 어딜 감히! 이제 두 번 다시 언니한테 고백할 일은 없겠죠!”
저 잘했죠,
조홍은 어서 이 기특한 동생을 칭찬해 달라는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홍이 보게 된 것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핏발 선 채 살의을 드러내는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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