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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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한 매력을 품은 미녀가 친근감을 과시하듯 애정행각을 해 온다면,
천하에 어떤 남자가 내색할 수 있을까.
옷 위로도 훤히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슴.
금발의 미녀가 팔짱을 꼭 붙든 채로 거리를 좁혀올 때마다 형태 좋은 가슴이 커다란 위용을 과시하며 남성의 마음을 옭아맸다.
수려한 금발이 찰랑 흔들릴 때마다 흘러나오는 달콤한 체취는 어떠한가.
고상하고 순결한 여인의 향기.
향유처럼 코를 찌르는 냄새가 아닌, 남성을 단번에 매료시키는 숫처녀의 살냄새였다.
“얼굴이 많이 불어지셨네요. 혹시 부끄러우신가요? 귀여우셔라.”
원소가 쿡쿡 웃었다.
고양이처럼 앙큼하면서,
여우처럼 익살스러운 여인의 미소였다.
대담하게 애정행각을 해온 그녀는 숙맥처럼 얼굴을 붉힌 채로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이성휘의 행동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앳된 서방을 놀리는 연상의 새색시가 된 기분이었다. 여인에 익숙하지 않은 사내를 희롱하는 것이 이렇게나 즐거운 일일 줄이야. 심중에 품은 감정이 간질간질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 놀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후후, 미안 해요.”
마음에도 없는 사과한 그녀는,
이성휘를 별간(別間)으로 안내함과 동시에 시동에게 명령하여 차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미안 해요, 별저가 많이 소박하죠?”
“저는 괜찮습니다.”
원소가 기거하는 여남원씨 가문의 별저는 소박하면서도 정갈한, 청렴과 정직을 특히 강조하는 유자(儒者)에게 더없이 각광받을 장소였다.
“헌데 어림총사께서는 어인 일로 오신 건가요? 아뇨, 제가 맞춰 보도록 할게요.”
원소가 짐짓 짓궂은 아이처럼,
장난기 가득 머금은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는 항상 품행과 예절에 만반의 주의를 기하는 신중한 성품으로 유명했지만,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하는 반응을 보이는 이성휘의 모습이 더 보고 싶었기에 장난을 쳤다.
이 무뚝뚝한 남성의 다양한 이면들을, 이 남자의 더 많은 반응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맹덕과 관련된 일이겠죠?”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맹덕 밖에 모르니까, 원소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대답하지 말걸,
그런 후회 섞인 중얼거림을 속으로 뱉어냈다.
“네, 무슨 일인가요?”
원소는 애써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며,
‘야욕에 미친 괴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낙양에 다시 풍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성휘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에 원소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성휘의 말에 동조해주었다.
“허나 이번 풍운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미리 대응하여 속전속결로 진압했던 반란들과는 달리, 이번 풍운 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폭풍처럼,
부흥(復興)과 번영(繁榮)의 상징이었던 낙양이 뿌리째로 뽑힐 것이기 때문이다.
미련하게 폭풍에 맞서려고 발악했다간 주춧돌조차 남기지 못한 채 몰락을 맞이하게 되겠지. 막을 수 없는 폭풍이라면, 그것을 피하는 게 상책일 것이리라.
“피한다면, 어디로 피하실 건가요?”
“연주(兗州)입니다.”
흐음,
이성휘의 대답에 원소가 침음을 흘렸다.
먼저 기주(冀州)에 터전을 잡아 하북(河北) 지역을 도모하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연주를 중심으로 중원 지역을 개척하려는 조조의 행보에 원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맹덕다운 통찰력이다.
설마 나와 똑같은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연주…. 하지만 연주를 비롯하여 주변 군현들은 모두 황건적이 오랫동안 활개를 쳤던 곳일 텐데요.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황건적의 잔당들 또한 많을 테고요. 그런데도 연주를 선택했다는 것은….’
연주는 다른 주(州)들로 널리 뻗어 나갈 수 있는 중심이자, 사예주와도 가까운 지역이기도 하다.
조조가 연주를 거병의 땅으로 선정한 이유,
원소는 신중하면서도 대담한 성품을 겸비한 조조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무려 수백만이 넘는 황건적 잔당들이 연주를 중심으로 패악질을 부리고 있음에도, 자신이라면 능히 황건적 잔당들을 소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가능한결정일 테니 말이다.
“본초 님께서는 기주(冀州)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이성휘가 물었다.
그에 원소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허유와 봉기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 없는 자기 계획을 훤히 간파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감탄을 보냈다.
“네, 맞아요. 저는 기주로 갈 생각이예요.”
원소가 솔직하게 자기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는 기주를 기회의 땅으로 삼으려 한다.
대업을 펼치기 위한 요충지이자, 연주만큼은 아니더라도 낙양과 제법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훗날 상경군을 일으키게 된다면 단숨에 낙양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나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원소가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어린아이처럼 두 눈동자를 흥미로 반짝였다.
자기 속내를 간파한 이성휘에게 칭찬하는 것과 동시에, 눈앞의 이 남자를 반드시 손에 넣고 싶다는 욕망을 힘껏 표출했다.
수많은 참모와 무관들을 휘하에 둔 그녀였으나, 문무를 모두 겸비한 만능형 인재는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원소는 개인적인 감정과 함께 우수한 인재를 포섭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면서 이성휘를 향한 마음을 빚어냈다.
“글쎄요, 제가 본초 님의 마음을 엿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소의 물음에 이성휘는,
지금껏 그녀가 짓궂은 장난을 한 것처럼 농담 섞인 대답으로 받아쳤다.
설마 이성휘가 농담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은 원소는 이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낙양에서 벌어지게 될 혼란은 지금까지 벌어진 혼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풍이 되어 몰아닥칠 겁니다. 필시 4백 년 동안 이어진 한나라의 오랜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기에 충분한 혼란이 되겠지요.”
“…결국 그렇게 되었죠.”
원래 원소는 대장군 하진을 만인지상에 옹립한 뒤, 2인자의 자리를 철저히 지키면서 하진의 후계자 자리를 넘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진은 환관들의 손에 죽었고,
금강야차를 잃은 낙양은 군웅할 거를 막을 수 있는 힘마저 다하고 말았다.
그때문에 원소는 하진을 이용하여 권세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계획을 철회한 뒤, 지금까지 모든 세력과 군대를 이끌고 지방으로 내려가 거병의 대의를 세우겠다는 목적을 계획하게 되었다.
“유약한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행하던 태후는 오라비를 잃은 충격으로 인해 실의에 빠졌고, 대장군의 심복이었던 자들은 필시 태후가 십상시와 내통해 암살을 꾀하였다며 암습을 꾀하고 있죠.”
시동이 가져온 박차(薄茶)를 한 모금 마신 원소는 대장군을 따랐던 심복들이 하태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대장군부의 늙은 장군들은 옛적 환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렴주구에 빠졌고, 반면 낙양 군단의 장졸들은 반란 진압의 포상은커녕 수년째 급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예요.”
차를 모두 마신 원소가 찻잔을 조심스럽게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 뒤,
고개를 들어 이성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작금의 황실 종친들은 4백 년 동안 지켜왔던 유씨(劉氏)의 의무를 망각하였고, 사예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은 제 잇속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죠. 도탄과 기아에 빠진 백성들은 부패에 빠진 상위계층을 몹시 증오하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원소는 낙양에 더 큰 혼란을 불러들일 가장 중요한 원인에 대해 발언했다.
“낙양 황실과 조정을 침탈하려는 두 시랑(豺狼)들과,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중앙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향하여 거병하려는 두 군웅들이 있죠.”
원소는 자신과 조조를 군웅이라 칭하며,
자신들 또한 한나라 황실과 조정의 붕괴에 결국 동참하게 된 셈이라며 야심가임을 인정했다.
* * *
이성휘와 별간에서 잠시 담소를 나눴던 금발의 미녀는 직접 손님을 배웅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를 휘하에 두고픈 마음이 가득했지만,
용기를 내어 한 고백이 다시 거절당하게 될까 두려워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원소는 아쉬움을 애써 쓴웃음으로 대신했다.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너무 불쑥 찾아와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예요, 또 찾아와주길 바라요.”
이성휘의 말에 원소는 화사한 표정을 지으면서 햇볕만큼이나 따스하고 환한 미소로 답했다.
또 찾아와주길 바라요.
머지 않아 자신은 북쪽으로, 그는 맹덕과 함께 동쪽으로 헤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의 주군께서 기쁘게도 마중을 나온 모양이네요.”
이성휘를 바라보던 원소는,
흑발의 여인이 수하들과 함께 자기 별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애지중지 아끼는 부관을 나에게 빼앗기게 될까 조바심이 든 것일까. 항상 냉혈에 가까운 냉정함을 겸비하고 있던 친우가 맹목적인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본 원소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후후. 에잇!”
원소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면서 이성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와락하고 품에 안기면서,
견고하고 든든한 사내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홍옥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당황에 찬 남성의 얼굴을 직관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성휘의 얼굴은 갑작스러운 애정행각에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맹덕의 앞이라서 그런지, 더 크게 당황하는 것 같네요. 이러다가 중독되어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귀여운 사람이라니까요.’
당황에 찬 그의 얼굴과 함께,
꾹 다물고 있는 그의 입술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휙휙 저으면서 문득 뇌리에 떠오른 망측스러운 생각을 접어 버렸다.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에 물든 조조의 얼굴을 본 원소는,
품에 안긴 채로 발꿈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최대한 빨리 낙양을 떠나세요.”
원소가 귓속말로 경고를 보냈다.
“부곡장(部曲長) 오광이 병주목 동탁을 은밀히 접선했다는 첩보를 입수했어요. 필시 동탁과 손을 잡고 낙양을 뒤엎을 생각인 거죠.”
“…예?”
“별간에서 언급했다시피 오광과 진진을 비롯한 대장군의 심복들은 태후를 대장군 암살의 주동자로 의심하고 있어요. 그들은 주군을 시해한 태후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죠.”
주인을 충실하게 보필한 사냥개였으나,
작금의 그들은 분노와 증오에 불타는 들개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을 잃고 들개로 전락해 버린 사냥개는 그 어떤 짐승보다도 사납고 두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복수를 행하려는 복수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맹덕이 아닌, 당신을 위한 충고예요. 그때 송현에서 제 목숨을 구해 준 답례이기도 하죠.”
한시라도 빨리 낙양에서 떠나야 한다.
발목이 붙잡히기 전에,
거친 풍랑에 휩쓸리기 전에,
원소는 낙양에 둔 미련들을 모두 정리하고 풍랑을 피해야 한다는 충고를 이성휘에게 전했다.
“제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요, 중원제일 검.”
그렇게 이성휘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인 원소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면서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난폭한 노기를 품고 있던 흑발의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면서 이성휘의 팔을 끌어당겼다.
외간 여자와 외도를 한 남편을 힐난하는 아내를 보는 듯했다.
“대체 무슨 짓이지, 본초! 감히…!!”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가요, 맹덕? 그냥 작별 인사였을 뿐인데요.”
“큭!!”
이 뻔뻔한 년이,
이성휘가 보는 앞이었기에 조조는 차마 천박한 욕설을 꺼낼 수 없었지만 조조는 격노한 얼굴을 내비치면서 그 욕을 무언으로 대신했다.
“방금 제가 전한 그 말을 부디 명심해주세요, 중원제일 검.”
“귀관, 대체 본초가 귀관에게 무슨 말을 했지!”
“후후, 설마 시집도 안 간 처녀인 제가 그런 대담한 고백을 할 줄이야…. 부끄럽네요, 설마 제가 직접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원소는 조조의 질투와 시기를 부채질하듯,
의도적으로 말을 지어내면서 오해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 * *
비명에 돌아가신 주군의 복수를 해야 한다!
환관들의 손에 무참히 돌아가신,
억울함에 빠져 구천을 떠돌고 있는 주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황실의 섭정을 꾀하는 여우를 죽여야만 했다.
“헌데 어찌하여 무맹도위와는 손을 잡지 않는 것이오? 무맹도위의 힘을 빌린다면 거사를 보다 수월하게 성공 시킬 수 있을 터인데….”
“놈이 난폭하게 위세를 떨치는 모습을 보지 않으셨소? 오히려 그와 손을 잡게 된다면 대사를 그르치게 될 것 이외다.”
오광과 진진은 대장군 하진을 따랐던 심복들을 은밀히 소집하여 거사를 의논했다.
대장군부의 많은 인원들이 참여했다.
어진 성품을 가진 하진에게 많은 은혜들을 입어왔던 대장군부의 장수들은 그 복수를 결행함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라비를 죽인 여우를 척살하자!
이복오라비를 죽이는 데 가담하는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지른 계집은 죽어 마땅했다.
“허나 동탁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진진이 우려의 목소리를 담아 물었다.
그에 오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날뛰기만 할 뿐인 정원과는 달리, 동탁은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일세. 중앙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 대장군부에 적극 협조를 하지 않겠나?”
동탁,
그는 권력의 중요성을 아는 자였다.
장대한 야심을 품은 야심가였음에도 일부러 충신의 모습을 연기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광은 정원이 아닌 동탁을 택하게 된 것이며, 동탁 휘하에 있는 서량의 십만 대군을 불러들여 낙양을 점거하고 주군의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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