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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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여성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근심과 분노,
일말의 두려움과 회한에서 비롯된 증오.
원소는 통한을 머금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면서 치열한 격전지가 될지도 모르는 영역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온 게냐.”
꼽추처럼 허리가 아래로 굽은 중년남성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수많은 노복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전(前) 사도(司徒),
원외.
여남원씨 가문의 출중한 쌍두마차로 평가받는 원소와 원술의 숙부이며, 또한 일찍이 죽은 형 원봉을 대신하여 여남원씨 가문의 전권을 행하는 가주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부님. 모쪼록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은 치워라.”
공손하게 예를 갖추면서 안부를 묻는 원소의 말을 원외가 싸늘하게 식은 대답으로 받아쳤다.
계집의 탈을 쓴 야심의 괴물,
원외는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인의와 도덕을 겸비한 여걸로 평가받는 원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체가 노쇠해졌으나, 사람의 본질을 꿰뚫는 눈만큼은 더욱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로를 제치고 낙양의 영웅이 되었더구나. 그래도 같은 가문의 식구인데 공로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그랬느냐?”
“분명 여남원씨 가문은 환관들이 이끄는 탁류파(濁流派)를 지원하고 있었을 텐데요? 환관 천하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명문가의 적통에게 얼녀에 불과한 제가 어찌 감히 환관들을 참살해야 한다는 참언을 할 수 있었겠어요.”
여남원씨 가문은 탁류파의 일원,
환관들과 사실상 협력관계였던 집단이었다.
원소는 여남원씨 가문에서도 매우 특별했다.
탁류파를 지지하는 명문가의 얼녀였음에도 청류파 를 중임했던 하진을 보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소의 선택은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얼녀에 불과했던 그녀가 지금은 낙양의 권력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권력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랫동안 대장군부 소속이었다는 배경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내 눈앞에 서는 것조차도 두려워하여 벌벌 떨기만 했던 계집아이였거늘…. 어느새 진짜 괴물이 되어 돌아왔구나.”
지금까지 빠짐없이 원소의 활약상들을 들어온 원외는 진짜로 괴물이 되었다며, 권력을 노리는 야심가로 자란 원소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사세삼공의 명성을 떨친 여남원씨.
비록 난세가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여남원씨 가문은 굴지의 명문가로 기록되어야 했다.
설령 적통이 아닌 얼녀의 손에 여남원씨 가문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할지라도, 한나라 제일의 명문가로서 계속 명성을 떨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고 원외는 생각하고 있었다.
“가문의 힘이 필요합니다.”
원소가 말했다.
그에 원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다.”
망설임 없이 일언지하에 받아들였다.
야심에 찬 괴물이 돌아와 가문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필시 철저한 계획들이 미리 수립되어 있을 터.
아름다운 미녀의 탈을 쓴 괴물은,
대체 무엇을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기에 끔찍이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본가로 다시 돌아와 부탁하는 것일까.
이 괴물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일언지하에 부탁을 받아들일 정도로 무척이나 깊은 관심이 생겼다.
“이 종년이! 대체 무슨 구걸을 하려고 본가에 돌아온 거냐!!”
원소가 본가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술이 부하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치도곤을 칠 것처럼 행동했으나,
여남원씨 가문의 가주인 숙부가 눈을 근엄하게 번뜩이면서 좌중을 휘어잡고 있었으므로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공로.”
“…예, 숙부님.”
“별채에서 본초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겠다. 사병들에게 명령하여 별채 주변에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라.”
“아, 알겠습니다…!”
원외의 명령에 원술은 이를 빠득 갈면서 여전히 밉살스럽게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불여우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년 같으니라고.
내 부모를 출세의 발판으로 삼아 우롱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뻔뻔스럽게 가문의 힘마저 빌리려 한단 말인가.
실로 후안무치한 년이다. 천한 노비의 뱃속에서 태어난 년답게 뻔뻔스럽기 이를 때 없었다.
“조정의 여론을 선동해주세요.”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원소는 상석에 앉은 원외에게 예를 취하면서 본론을 꺼냈다.
그에 원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무슨 부탁을 할지 짐작하지 못했지만, 필시 가문의 힘을 빌려 계획을 실행하려 함을 알고 있었기에 원외는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북장군(征北將軍)의 패(牌)를 받고 싶습니다.”
태연한 모습을 보인 원외였으나,
이어진 원소의 말에 결국 태연한 모습을 보이던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정북장군에 임명될 수 있도록 힘을 써달라는 원소의 부탁에 원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옆에 두었던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북쪽을 차지할 셈이냐.”
“역시 숙부님이시군요.”
“필시 네 손으로 한나라의 사직을 끝장내겠다는 뜻이렷다.”
“아니요. 그것은 아닙니다.”
제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이지요.
원소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원외에게 무언의 대답을 보냈다.
“현재 대장군부의 전장군을 역임하는 몸이나, 중앙의 무관직은 앞으로 다가오게 될 난세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벼슬에 불과하죠. 제게는 전장군의 관직보다도 정북장군의 관직이 절실해요.”
대장군부 서열 6위의 관직인 전장군을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벼슬’이라고 언급한 원소는 정북장군의 패에 욕심을 드러냈다.
원외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야심 넘치는 괴물의 입에서 ‘정북장군’의 관직명이 나온 순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간파했다.
“가문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다면 능히 조정대신들을 구워 삶을 수 있겠지.”
비록 탁류파에 몸을 담은 여남원씨 가문이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청류파의 관료들과 어느 정도 친분을 맺어오고 있었다.
원소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쯤은 간단했다.
조정의 여론을 원하는 바에 맞게 바꾸는 것, 오랫동안 조정의 영수 노릇을 해온 여남원씨 가문에게 있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허면 너는 나에게, 우리 여남원씨 가문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원외가 노련한 눈썰미를 보이면서 원소에게 무엇을 대가로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에 원소가 답했다.
“여남원씨의 천하입니다! 천출에 지나지 않았던 남양하씨가 유씨(劉氏)를 대신하여 천하를 거머쥐었던 것처럼, 우리 여남원씨 또한 그리될 것이예요.”
거침없는 원소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원외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여남원씨의 천하!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이던가.
소싯적에 조정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한나라의 권세를 거머쥐었으나, 유씨를 대신하여 천하를 거머쥐었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원외는 여남원씨의 천하를 열겠노라고 포부를 밝힌 원소의 말에 깊은 고양감을 느꼈다.
“병주의 늑대와 서량의 이리가 낙양을 침범한 까닭에 재차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필시 늑대와 이리는 산군(山君)을 결정하고자 서로를 향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낼 터! 그들이 금강야차가 떠난 태산(泰山)의 주인을 결정하고 있을 때, 너는 다른 태산의 산군이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원외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여남원씨의 괴물은 대국(大局)을 완성하기 위한 수를 놓기 시작했다.
바둑돌은 이미 바둑판에 놓아졌다.
샐 수없이 많은 바둑돌들이 중앙을 점거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새하얀 백옥처럼 반짝이는 바둑알은 중앙과 짐짓 떨어진 북쪽의 판세를 노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숙부님께, 여남원씨 가문 측에 다른 것을 부탁하게 될 때가 올 거예요.”
원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번에 올린 부탁보다 더 큰 부탁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운을 떼었다.
그 말에 원외는,
“네가 그 부탁에 합당한 대가를 지급할 여력이 된다면 우리 가문은 언제든 너에게 협조할 것이다.”
“…예, 부디 그러기 바라겠습니다.”
말을 끝낸 원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결하고 우아한 몸짓을 보이며,
늘씬한 두 다리를 뻗으면서 장지문으로 향했다.
두 손으로 문을 열었을 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외가 원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천하를 도모하려 한다면 필시,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또한 많은 것들을 스스로 버려야 할 때가 오겠지.”
“숙부님의 그 말씀…, 명심하지요.”
용건을 끝낸 뒤,
원소가 숙부를 뒤로하고서 별채를 나섰다.
별채 바깥에는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낙양 여인들의 마음을 애절하게 녹일 정도로 출중한 용모를 갖춘 미남이었지만 잘생긴 얼굴에 깃든 감정은 열등감과 괄시에서 비롯된 격노였다.
“빌어먹을 종년아, 대체 숙부님에게 무슨 수작질을 부린 게냐. 분명 제 어미처럼 사내에게 천박하게 꼬리나 쳤겠지.”
원술이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면서 조롱하는 말을 던졌다.
모친을 모욕하는 말을 들은 원소는,
반사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충동이 깃든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면서 원술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만들었다.
당장에라도 원술을 죽일 것처럼 살의를 번뜩인 원소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총기를 머금은 눈동자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만하게 위세를 떠는 것도 머지 않을 거예요, 공로. 반드시 낙양으로 병마를 이끌고 되돌아와 너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테니.”
원소는 결코 관용이 넘치고 아량이 넓은 성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하를 속이기 위한 기만일 뿐,
원소라는 이름의 여인은 누구보다 교활하며 이기적이며, 또한 과거에 입은 수치와 모욕을 결코 잊지 않는 지독함마저 겸비하고 있었다.
그러한 본성을 아는 이라면 절대로 그녀와 척을 지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 * *
여남원씨 가문의 본가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원소에게 있어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결코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역겨운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원소는 스스로 본가를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본가에 들렀던 적이 없었다. 유년 시절의 비관스러운 과거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자, 평생에 걸쳐 옭아맬 족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치네요. 이렇게나 온몸이 녹초가 될 줄이야. 원외, 그 늙은이는 여전히 정정하네요. 하마터면 기 싸움에서 밀릴 뻔했어요.’
십상시들이 권력을 주무르던 환관 천하에서 조정의 영수로 군림해온 거두.
이미 정계에서 물러난 몸이었으나,
황실로부터 명예직인 태부(太傅)에 임명되어 대장군부에 동조하고 환관들과 내통하는 등의 정치공작을 벌여 온 원외는 여전히 원소에게 버거운 상대였다.
“송현으로 갈까요?”
“예, 예?!”
곁을 호위하던 무관에게 물었다.
하마터면 비명횡사할 뻔했던,
끔찍하게 살해당한 주검들을 모두 거둬들였음에도 아직도 피비린내가 진동한다는 스산한 장소를 거론하는 원소의 말에 무관이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후후, 농담이예요.”
무관에게 그리 대답한 뒤,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오늘은 모든 일정들을 취소한 채 느긋하게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크게 지쳤다.
암울하고 치욕스러운 과거가 깃든 장소에 잠시 머물렀던 것만으로도 온몸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을 유지하겠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했는데…. 아직도 사람의 마음을 버리지 못한 걸까요. 이따위 연약한 마음은, 제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원씨 일가의 무덤 앞에서 맹세했었잖아요….’
눈꺼풀을 반쯤 내리며,
슬픔과 원망에 찬 감정을 흘렸다.
홍옥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슬쩍 굴리면서 암울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념을 애써 떨쳐 냈다.
“본초 님.”
원소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인물이 자기 저택을 방문했음을 알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요, 어림총사? 제가 머무는 여남원씨 가문의 별저에 몸소 찾아오다니. 시집 안 간 처녀의 집에 몸소 찾아올 정도의 가치가 있는 용건이기를 바랄게요.”
당장에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힘겨운 모습을 보이던 원소가 발랄한 생기를 머금었다.
새하얀 뺨에 보조개를 그리며,
생기가 감도는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별저를 찾은 이성휘에게 짓궂은 농담을 보냈다.
무뚝뚝한 사내가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민한 눈썰미로 그것을 포착한 원소는 가식 한 점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팔을 뻗었다.
마치 연인이 된 것처럼 팔짱을 낀 뒤,
별저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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