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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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하진의 사후,
낙양은 풍운이 감도는 무법자들의 영역이 되고 말았다.
폭력이 난무하고 질서가 철저히 무너진 판국. 오로지 막강한 힘으로만 정의를 논할 수 있는 난세의 시발점이 펼쳐지게 된 것이었다.
난세가 곧 도래할 것을 직감한 조조와 원소는 재물을 풀어 대장군부의 무관들로부터 충성맹세를 받아 내는 한편, 숙적이 될 것이 분명한 동탁과 정원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거병의 날을 대비하여 최대한 많은 병마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미 낙양 조정은 틀렸습니다. 차라리 지방에서 거병하여 새로운 세력을 만들고, 후일을 기약하는 편이 이로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이상 낙양에서는 얻을 게 없습니다.”
이성휘의 참언에 조조는 일 전에 이성휘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조용히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 군단의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네. 필시 낙양 장졸들의 불만은 황실과 조정을 향한 불복(不服)으로, 분노는 곧 충성과 충절의 분탄(憤嘆)으로 이어질 터…. 무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불만과 분노를 쌓아온 낙양 군단은 누군가의 부추김으로 인해 격발하게 될 것일세.”
작금의 가장 큰 문제는 불만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이 팽배한 낙양 군단의 존재였다.
황건적의 난을 비롯해 수많은 반란들의 진압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전한 군대였으나, 선황(先皇)과 십상시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가 텅 비게 되면서 포상은 물론 급료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 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자렴.”
“예, 언니.”
조조의 부름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홍이 알아본 정보들을 열거했다.
“장졸들의 급료로 지급되는 녹봉을 하진의 휘하였던 대장군부의 장군들이 중간에서 횡령하는 것을 알아냈어요. 품질 좋은 쌀과 콩, 보리 등을 미리 솎아내고 저질의 녹봉만 걸러내어 장졸들에게 준 거죠.”
“…지금까지 하진의 눈치만 보던 늙은 졸개 놈들이 환관처럼 설치기 시작했다는 말이군.”
부패의 상징이었던 십상시를 죽였으나,
그 자리를 대신하듯 대장군부의 늙은 장군들이 횡령과 부정을 일삼기 시작했다.
조조와 원소가 대장군부의 무관들을 적극적으로 휘하에 두려고 하되, 하진의 측근이었던 늙은 장군들과 동맹을 맺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라의 창곡(倉穀)을 관리하는 창조(倉曹)와 거래하는 상단들로부터 직접 들은 정보니까 아마 확실할 거예요, 언니. 장졸들에게 내리는 녹봉을 중간에 빼돌리는 횡령을 하기 위해선 당연히 창조의 관리들과 내통관계를 맺었을 테니까요.”
고향인 예주(豫州) 패국(沛國)에서 수많은 상단들을 운영하는 조홍답게 일 처리가 매우 꼼꼼했다.
내조(內趙)의 13처부 중 하나인 창조.
창곡의 관리와 출납을 담당하며, 나라의 세금과 관련된 다른 처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는 선황과 십상시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을 때부터 거론되던 횡령의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조홍은 늙은 장군들의 부정과 횡령을 파악하기 위해 창조와 오랫동안 거래관계를 맺어온 상단들을 염탐한 것이다.
“창조가 늙은 장군들의 하수인으로 떨어졌다면 필시, 위조(尉曹)와 금조(金曹)까지도 떨어졌겠군.”
위조는 한나라 13주의 물자운반을,
금조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철과 소금 사업을 담당하는 처부였다.
너구리처럼 음흉한 늙은 장군들이라면 분명 십상시가 그러했던 것처럼 창조를 비롯해 위조와 금조에도 손을 댔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원양, 본초가 가덕전에 상소문을 올렸다고?”
“십상시 세력을 척결하면서 국고에 환속했던 환관들의 재물을 풀어, 낙양 군단의 장졸들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요청이었지. 물론 기각되었지만.”
하후돈은 원소 휘하의 무관들 중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원소가 가덕전의 하태후에게 상소문을 올렸다는 것을 비롯해 상소문에 적힌 내용에 대해 알아냈다.
그리고 또한,
가덕전에 올린 원소의 상소문이 결국 기각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지방관들의 수탈과 부정축재, 잦은 반란들로 인해 세금이 크게 격감된 최악의 상황에… 장졸들의 녹봉을 늙은 장군들이 중간에서 횡령을 하고 있다. 더욱이 이 사태의 책임이 있는 한나라의 황족들은 재산을 내놓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지…. 사예주의 사대부와 호족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니, 필시 한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나무에 계속 물과 거름을 주더라도,
뿌리가 썩었다면 결국 그 나무는 쓰러지기 마련.
조조는 한나라의 멸망을 예견했다.
아니,
예견이 아니었다.
한나라가 이윽고 멸망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백성들 또한 체감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원양, 연주의 자효에게 연통을 넣도록. 자렴은 계속 대장군부의 동태를 살펴라.”
조조는 하후돈과 조홍을 보낸 뒤, 이성휘와 단둘이 안채에 남게 되었다.
일부러 그 상황을 유도한 것일까,
이성휘를 바라보던 조조의 시선이 순간 흔들렸다.
“귀관.”
“예, 맹덕 님.”
“내게 아무런 당부의 말조차 없이, 무맹도위의 둔영을 무턱대고 급습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요란하게 일을 벌였으니,
조조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맹도위 정원의 수양딸이자 병주 군단의 비장이었던 여포와 혈전을 벌인 무단행위를 조조가 지적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나?”
“모시는 주군에게 무례를 가한 자를, 주군을 모시는 부하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무단행동을 범한 죄와 책임은 기꺼이 지겠습니다.”
이성휘의 대답에 조조는 기쁜 표정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주군으로서 근엄한 모습을 부하에게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떠올렸는지 급히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계속 씰룩대고 있는 뺨은 어쩔 수 없었지만.
“흠…. 흠흠…! 귀관은 정말이지 제멋대로군.”
조조는 애써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며,
연모의 감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이성휘에게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충성에서 비롯된 말이었겠지만,
마음의 형태와 종류는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이성휘가 바친 충성의 마음을 사랑과 연모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사랑하는 상대의 행동하나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두는 법이었으니까.
“그럼 귀관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겠네.”
큼큼, 하고 헛기침하면서 애써 들뜬 마음을 억누른 조조가 입을 재차 열었다.
“거병의 뜻을 품고 연주(兗州)로 내려가 거병할 때까지…, 나를 측근에서 보좌하면서 끝까지 봉행(奉行)하도록 하게. 우직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귀관에게 합당한 벌이라고 생각하네.”
내 곁에 끝까지 있어 달라.
곁을 결코 떠나선 안 된다….
사랑에 빠진 흑발의 여인은 거병을 위한 대의를 포장하여 자기 마음을 간접적으로 고백했다.
물론 그때문에 실로 우둔하고 둔감한 부관은 그러한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주군의 거병을 위해 분골쇄신을 하겠노라,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했을 뿐이었다.
* * *
정원이 장졸들을 동원하여 위세를 떨치면서 스스로 야심가임을 자청하는 상황은 동탁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놈은 역시 늑대였다.
싸움을 잘하고 용맹하나,
야욕과 본성을 숨길 줄 몰랐다.
“허나 정원, 그놈의 휘하에 있는 병주의 기병군단은 실로 위협적이군. 북방의 흉악한 오랑캐들을 상대로 백전불태(百戰不殆)를 기록한 놈의 용장들은 가히 일당백에 가깝다!”
동탁은 정원의 성급함을 비웃으면서도,
그가 보유한 병주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면서 한껏 경계심을 드러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어르신! 어르신의 십만 대군이 한양군(漢陽郡)에 포진하고 있습니다. 당장에라도 명을 내리시면 서량의 위풍당당한 십만 대군이 삼보(三輔) 지역을 넘어 사예주를 들이칠 것입니다!”
정원만큼이나 성급한 성격을 자랑하는 이각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병 준비는 이미 옛적에 끝났다.
흑산적 토벌에 동원하기 위한 병력의 소집을 명령했던 하진의 지시는 여전히 서량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마를 동원하여 낙양을 급습하면 천하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을 터인데, 이각은 어째서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하냐며 강경한 어조로 진언했다.
“멍청한 놈! 그건 정원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십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듯이, 정원은 무려 수만에 이르는 기병군단을 휘하에 두고 있다. 내가 거병을 택하지 않는 것은 병주 놈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무맹도위 정원의 휘하에는 한나라 최강으로 손꼽히는 병주 기병대가 있었으며, 뛰어난 기마궁술로 유명한 궁기병대까지 있었다.
우둔하게 놈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다.
이길 확률보다 질 확률이 높았으며,
설령 이긴다고 할지라도 많은 병마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시 그렇게 되면 지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다른 군벌들이 낙양에 쳐들어와 내 목을 치겠지!’
동탁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 쟁탈에 성공한 뒤, 손아귀에 움켜쥔 권력을 단단히 지킬 힘이었다.
서량의 십만 대군으로는 어렵다.
은밀하게 수하들을 풀어 낙양 군단의 장수들을 회유하고 있다고는 하나, 권력 쟁탈에서 승리하여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더 많은 장졸들이 절실했다.
“어르신께 필요한 것은 천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천운을 기다리고자 저들에게 바짝 엎드리고 계신 것이지요.”
이유가 입을 열었다.
총애하는 모사의 말에 동탁은 어지러운 심기를 드러내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기회가 뭡니까?”
이각이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면서 물었다.
포악한 성정을 가진 서량의 장수는,
그저 몸을 눕힌 채로 기회만 기다리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못마땅하게 보일 뿐이었는지 부정적인 생각만 할 뿐이었다.
“어르신.”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화웅이 장지문을 열면서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냐?”
“부곡장 오광의 노복(奴僕)이라고 밝힌 놈이 어르신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화웅의 말에 동탁과 이유는 서로를 쳐다 보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부곡광 오광이라면,
환관들의 손에 시살된 대장군 하진의 심복이 아닌가.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오광이 은밀하게 노복을 보냈다는 소식에 동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여라.”
부곡장 오광은 대장군을 보필하면서 무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가 보낸 노복이 분명하다면,
결코 문전 박대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말했던 ‘기회’를 떠올린 동탁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기대감을 드러냈다. 작금의 꽉 막힌 상황을 풀어 줄 계기가 될까, 뱃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야욕이 꿈틀대면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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