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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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를 휩쓸면서 북쪽에서 내려온 기병부대에 의해 사예주(司隸州) 하내군(河內郡)이 점령당했다.
물리적인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하내태수의 치소가 위치한 회현(懷縣)이 무맹도위 정원의 휘하였던 비장(飛將) 여포가 이끄는 선봉부대에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맹도위 정원의 하내군 점령 소식을 듣게 된 낙양은 십상시의 난을 거친 직후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다시 대규모 반란이 벌어진 것일까, 크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감히 역모를 꾀하다니!”
하내태수의 치소를 포위하기 시작한 정원군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왕광이 크게 소리쳤다.
왕광은 대장군 하진의 심복 중 한 명으로,
현재 공석이었던 하내태수의 직임을 대리하여 하내군을 다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필해온 주군이 십상시의 손에 사망하면서 크게 상심에 빠져 있던 왕광은 난데없이 하내군을 급습한 정원군에 의해 치소에 구금되는 치욕마저 당하게 되었다.
“어찌 둔장(屯長)께서는 그리도 역정을 내시는가.”
왕광의 거센 외침을 바깥에서 들었는지,
날렵한 인상을 가진 중년남성이 20여 명의 무관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치소 안으로 들어왔다.
무맹도위 정원이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였음에도 여전히 기골이 장대하고 근력 또한 상당했다. 또한 그는 초원의 늑대를 연상하게 하는 날카로운 안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역모가 아닐세. 병주와 사예주 경계에 쥐 새끼처럼 숨어 있던 백파적(白波賊)과 흑산적(黑山賊)을 모조리 토벌하기 위함이지. 의심되면 밖에 나가서 보게나! 그들의 수급을 몽땅 베어왔네.”
정원이 꺼낸 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왕광은 문을 가로막던 병사들을 제치면서 밖으로 나섰다.
수십 대에 달하는 수레들이 있었는데,
그 수레 위에는 흑산적과 백파적의 수급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잘린 수급들을 모두 소금에 절였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본 왕광은 구역질을 참지 못했는지 그만 바닥에 구토를 하고 말았다.
“껄껄껄! 둔장께서는 무엇을 그리 놀라시는 겐가? 우리 병주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인 것을.”
대경실색하는 왕광의 모습을 본 정원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왕광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밝혔다.
“조정에 보낼 장계를 써 주게! 이 무맹도위 정원이 그간 골치를 썩이던 악명 높은 흑산적과 백파적 무리들을 영웅적인 쾌거로 토벌했다고 말이네! 대장군부 소속인 자네라면 능히 황실과 조정을 설득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지금쯤이면 황실과 조정 또한 소식을 접하고서 크게 난리가 났을 터.
일을 크게 벌인 정원은 이를 수습하고자 왕광을 이용했다. 왕광은 대장군부 소속이었음은 물론, 의협심으로 명망이 높은 장수였으므로 황실과 조정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장 하내군에서 군대를 철군시키시오! 이것은 명백히 반역이외다!”
“내 그리하도록 하지.”
정원은 하내군에서 병주 병력을 철수시키는 대가로 왕광에게 원하던 바를 얻어냈다.
이윽고 황실과 조정에 상주할 장계를 든 하내군의 전령이 말을 타고 낙양으로 향했다.
“이건 너무 무모한 짓이예요.”
반협박에 가까운 방식으로 왕광을 압박하는 정원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흑발의 여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금발의 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나는 화려해서 좋은데. 저 꼰대치고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병주 촌놈이라고 낙양 샌님들에게 무시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공포를 각인시켜 주는 게 좋을 테니까.”
방천화극을 어깨에 짊어진 채로 병사들을 감독하던 여포의 말에, 장료는 근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낙양 조정은 아군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내군의 무단 점령을 결국 어물쩍 넘겨 주겠지만… 분명 불쾌감을 품을 게 분명해요. 게다가 둔장 왕광은 오랫동안 대장군 하진을 섬긴 측근 중의 측근입니다. 필시 대장군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낙양 조정에 정원군의 위엄과 기세를 보여주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고는 하나, 과다한 용맹은 매번 두려움과 경각심을 일으켜왔다.
당장은 정원군의 위용에 고개를 숙이겠지.
하지만 그다음은? 낙양 조정이 십상시의 난을 수습하고 혼란에 빠진 대장군부를 다시 수습한다면?
필시 낙양 조정은 이번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복수를 준비할 게 분명했다.
“문원은 매번 어려운 말만 한단 말이야. 거만하기 짝이 없는 낙양 놈들은 이렇게 윽박질러야 말을 알아먹는다고. 나는 이번 일에 대해선 저 꼰대가 잘했다고 생각해.”
뇌를 거치치 않은 듯한,
가공하지 않은 것을 그대로 꺼낸 듯한 여포의 대답에 장료는 머리를 싸매야 했다.
“봉선 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터운 갑옷을 입은 거구의 남성이 다가왔다.
병주 출신의 강병들로 구성된 함진영(陷陣營)을 지휘하는 무관인 고순이었다.
“이제 다시 출발한다! 낙양으로 가자!”
여포가 크게 소리쳤다.
이제 곧 낙양에 입성하게 된다.
호승심에 찬 강자들이 서로의 무명에 이끌리듯, 낙양성의 성문을 넘게 되면 머지 않아 중원제일 검(中原第一劍)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내와 만날 수 있게 되겠지.
무맹도위 정원의 수양딸이자 정원군의 비장인 여포가 들뜬 모습들을 계속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 * *
중원제일 검으로 한나라 전역에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이성휘는 하남윤 왕윤의 부름을 받은 상태였다.
왕가부(王家部)의 대문을 넘었다.
그러자 작약꽃을 연상시키는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아리따운 미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성휘를 반겼다.
“어서 오시옵소서, 명공.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어르신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그러하옵니다.”
원래라면 응당 왕윤이 대문 앞에서 이성휘를 맞이했겠으나,
이성휘의 뛰어난 무위와 황실과 조정을 향한 충성심을 보게 된 왕윤은 수양딸과 그를 맺어 주게 할 요량으로 단둘이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했다.
그 너구리같은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선은 반가운 이를 만나게 되어 그저 기쁠 뿐이었다.
“팔의 부상은 이제 괜찮으시옵니까?”
“예, 심려하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소녀에게 존대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명공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시옵소서.”
“…….”
자신을 극진하게 예우하는 초선의 모습에 이성휘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초선의 모습에 조금 부끄러워졌다.
낙양제일미라 불리는 미녀답게,
농염하게 머금은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은 완고한 성격의 중원제일 검조차 부끄러움을 탈 정도였다.
“정변 진압에서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수괴들의 수급을 베어 혼란과 도탄에 빠진 황실과 조정을 구하셨다고….”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아니옵니다! 명공께서는 황실과 조정을 구한 영웅이시옵니다! 천하 만민들이 모두 간적들을 무찌른 명공의 활약을 상찬하는 의미에서 중원제일 검이라는 별칭으로 부르지 않사옵니까? 오늘 저잣거리에서만 하더라도….”
연발로 쏘는 쇠뇌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을 이어 나가는 초선의 모습에 이성휘는 난감함을 느껴야 했다.
항상 수줍은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강경하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중원제일 검의 명성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잖아도 중원제일 검이라는 그 별칭을 낯간지럽게 생각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붙듯이 찬양을 이어 나가는 초선의 모습에서 이성휘는 가슴 깊이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큼. 큼큼큼….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무심코 명공에게 감히 결례를 범하였사옵니다.”
중원제일 검을 향한 존경심이 실로 대단하여,
만약 어느 누군가가 이성휘를 힐난하거나 모욕하는 말을 한다면 그대로 싸대기를 갈길 것만 같았다.
“…언젠가 명공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소녀가 비천한 재주로나마 명공께 춤을 보여드리겠사옵니다.”
초선은 명석한 학식과 서예를 갖추었음은 물론, 무희(舞姬)처럼 현란한 무용(舞踊)을 자랑했다.
양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보여 준 적 없었지만, 초선은 황실과 조정을 구하였으며… 또한 자신과 양부를 구해 준 은인에게만큼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춤을 보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저는 괜찮습니다. 소저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성휘는 공손하게 사양한 뒤,
초선에게 묵례를 하고는 별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
겸허히 사양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초선은 안타까움에 찬 침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폭 숙였다.
너무 의욕이 앞선 것일까,
그래서 명공에게 곤혹을 안긴 것이 아닐까,
초선은 지금까지 양부가 아닌 다른 남성을 위해 이토록 마음을 다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서투르고 어수룩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게.”
별당에서 정좌한 채 기다리던 왕윤이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이성휘를 맞이했다.
이성휘는 왕윤에게 예를 취한 뒤,
그의 허락받은 뒤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일말의 예의도, 예법도 모르는 늑대가 이제 곧 낙양으로 내려올 걸세. 필시 저잣거리의 난봉꾼처럼 위세를 떨치면서 온갖 패악질을 부릴 놈의 폭거에 대비하고자 자네를 급히 불렀네.”
왕윤은 황실과 조정을 기만하고 겁박하기 위해 군대를 함부로 움직인 정원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놈은 무법자다.
국법의 지엄함도,
황실과 조정의 권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무뢰배와 같았다.
병주의 막강한 군권을 믿고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기 바쁜 정원이 낙양에 입성하게 된다면 필시 황실과 조정에 온갖 해악들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왕윤은,
정원이 이끄는 병주 출신의 용장들에 맞서기 위해 중원제일 검으로 명성 높은 이성휘를 전면에 내세우려하였다.
“황실과 조정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만…, 저는 우장군을 모시는 몸입니다. 우선 우장군에게 허락을 구한 뒤에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크흠! 그리하도록 하게.”
이성휘는 황실과 조정에 충성을 맹세한 무관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우장군 조조의 심복이기도 했다.
그것이 왕윤은 불안 했다.
권력을 향한 야심을 가진 조조가 만에 하나라도 딴마음을 품는다면, 그녀의 심복인 이성휘 또한 황실과 조정에 등을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한 왕윤은 수양딸인 초선을 배필로 주어 이성휘를 조조의 심복이 아닌, 황실과 조정의 명신(名臣)으로 전향시키려 노력했다.
‘정원은 자기 위세와 위엄을 천하에 떨치기를 좋아하는 안하무인 같은 놈이다. 왕윤의 말처럼 낙양에 입성하자마자 무뢰배처럼 온갖 포악질을 부릴 게 분명하지. 그리고 그 옆을 항상…, 여봉선이 지키고 있을 터.’
병주 제일의 맹장,
여포가 필시 정원의 신변을 호위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내군을 무단으로 점령했을 때처럼, 정원은 수양딸 여포의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워 좌중에 강압을 가할 게 분명했다.
천하 무쌍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될 여포와 싸운다는 것은 이성휘에게 있어서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예, 말씀하십시오.”
공손하게 예를 취하는 이성휘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왕윤이 제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자네는 우리 딸을…, 딸아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당사자인 초선 또한 수줍게 긍정의 뜻을 밝혔기에, 왕윤은 이성휘의 마음을 떠볼 요량으로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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