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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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들의 정변이 성공적으로 진압된 뒤,
원소는 여남원씨 가문의 연줄과 자기 영향력까지 모두 동원하여 지지기반을 쌓아나갔다.
낙양의 사대부와 호족들은 물론,
정변 진압을 통해 얻은 명성과 활약을 동원하여 대장군부의 장군들까지 모두 포섭하기 시작했다.
“본초 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신명을 모두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이옵니다!”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크게 명성을 떨친 여남원씨 가문의 영웅이며, 현명한 지혜와 인의를 바탕으로 한 바른 성품을 두루 갖춘 원소의 휘하에 뛰어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사대부와 호족들은 재물을 내놓았으며,
대장군부의 무관과 병사들은 목숨을 바쳤다.
적모(嫡母)와 친부(親父)를 위하여 6년상을 치렀으며, 또한 오랫동안 청류파 인사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정치적 위상을 쌓은 원소였기에 더욱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하하핫! 이게 다 사대부와 호족들이 보내온 재물들이란 말이지! 군자금으로 쓰고도 남겠군!”
허유가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궤짝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던 금괴들을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장차 권력을 쥐게 될 유망주에게 바치는,
사예주를 주름잡는 사대부와 호족들이 원소에게 기꺼이 바친 투자금이었다.
향후 원소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자신들의 이 충성심을 결코 잊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뇌물로, 사대부와 호족들은 원소에게 기꺼이 자기 소중한 재물을 바칠 정도로 많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곧 사면령이 내려질 거예요. 십상시에게 파면되었거나 유배지에 보내졌던 청류파 인사들을 복권시키겠어요.”
“그래,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
“또한 사대부와 호족들에게 받은 재물들의 반절을 청류파의 부흥을 위해 사용할 방침이예요. 정쟁(廷爭)에 휘말려 좌천되었거나, 연좌제로 인해 탄압을 당해야 했던 청류파의 유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십상시 일파를 모두 척살한 이후,
한나라 조정은 청류파가 장악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소는 청류파를 가장 든든한 우군으로, 또한 자기 가장 굳건한 지지기반으로 삼기 위한 준비를 착수하기 시작했다.
‘이, 이걸 모두? 설마 아니겠지…!’
누런 금괴들을 꿀꺽할 생각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허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그에 허유는 조금 빼돌릴까 궁리했지만,
원소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품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기에 감히 시도할 수 없었다.
혹여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원소라는 출세가도를 잃는, 소를 탐하려다가 큰 것을 잃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 분명했다.
“용맹한 장졸들과 현명하기로 이름 높은 명사들이 기꺼이 자네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낯빛이 어둡군. 혹여 탐탁지 않은 것인가?”
순우경이 물었다.
그 물음에,
원소는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제 대망에 동참하여 모인 인사들에게 그런 망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어요? 저는 그저….”
무언가를 말하려던 금발의 여인은,
이윽고 입을 꾹 다물면서 말을 끊어냈다.
‘중원제일 검…. 사예주 최고의 무인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그 사람을 아직 수하로 두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예요.’
수천 명의 넘는 수하들을 두었으되,
원소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단 한 명을 수하로 두지 못했음을 슬퍼했다.
다홍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짙은 수심과 회한을 담아낸 채, 슬며시 눈꺼풀을 내리면서 중원제일 검을 향한 소유욕과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목숨을 다해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성을 위한 애틋한 마음을 싹틔웠다.
‘당신은 죽음이 턱밑까지 다가왔음에도 저를 지켜 주었죠. 물론 맹덕을 위해서 그리 한 일이겠지만….’
여심의 마음은 실로 변덕스럽다.
한없이 냉혹해질 수 있으면서도,
어느 계기를 맞이하게 되면 봄바람을 맞이한 경칩처럼 사르륵 녹아내리고 만다.
원소의 마음 또한 그러했다.
사시사철,
대한(大寒)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마음에….
한 줄기의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무미건조하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마음을 다그치면서 단단히 잡아주던 목소리.
그는 알고 있을까? 견고한 의지가 되어 주는 남성의 목소리는 여성에게 있어, 빠져나오기 어려운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것을.
‘제게서 3보 이상 떨어지지 마십시오.’
뒤에 이어진 그 말을 떠올린 원소는,
청명(淸明)을 맞이한 날의 꽃봉오리가 활짝 꽃잎을 펼치는 것처럼 뺨을 불그스름하게 붉히기 시작했다.
“중간, 자원.”
원소가 순우경과 허유의 자를 부르면서 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뒤,
원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사들과 함께 중원제일 검을 제 휘하에 둘 방략을 마련해주세요.”
갑작스러운 원소의 명령에 순우경과 허유는 적잖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당혹서린 시선에도,
원소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결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중원제일 검, 맹덕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만 목숨을 걸어줬으면 해요. 당신의 무(武)를, 그리고 명(命)를….’
맹덕,
미안 하지만….
중원제일 검은 당신의 휘하에 두기에는 너무도 뛰어나고, 너무도 매력적인 인재예요.
당신에게 몇 번을 사과하고, 몇 번을 사죄하더라도 중원제일 검만큼은 제가 가져야겠어요.
* * *
흐음,
중원제일 검이라….
황제의 직속 호위군인 어림군(御臨軍) 무관들과 대련을 치르면서 무예를 연마하는 이성휘의 모습을, 턱을 비스듬히 괸 채 쳐다보고 있던 조홍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어마어마하긴 하네.’
일당백의 무인들이 모인 어림군이 새롭게 어림총사(御臨總司)로 임명된 이성휘에게 박살이 나고 있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것은 물론,
목검에 얻어맞은 팔과 다리를 움켜쥔 채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뻐억!! 뻐어억!!! 목검이 부딪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타음이 훈련장에 울려 퍼지게 되었고, 그때마다 바닥에 쓰러진 무관들이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커헉!”
지면을 박차면서 높게 도약한 이성휘가 발을 휘두르면서 달려들던 무관을 걷어찼다.
그리고 휘둘러지는 목검,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달려들던 무관들이 동시에 허리가 꺾인 것처럼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언니가 직접 지목해서 부관이 된 건 들었는데….”
언니를 따르는 이유를,
충성과 정성을 바친 이유를 들은 적이 없었다.
여남원씨 가문의 원소가 직접 왕래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임택(任擇)의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그를 거절하고 언니의 휘하에 계속 남아 있는 이유.
‘언니를 좋아하나?’
한참 동안 턱을 괸 채로 이성휘의 모습을 쳐다보던 조홍이 의미심장한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저 농담조로 한 말이었지만,
조홍은 이성휘가 필시 자기 언니를 남몰래 연모하여 그 곁을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피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조홍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마흔 명이 넘는 무관들과 동시에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꼴에 보는 눈은 있어서,
언니의 아름다움에 눈독들이기 시작했다는 거지?
설부화용(雪膚花容)의 수려한 자태를 가진 언니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포착한 점은 칭찬해야 마땅하겠으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언니를 눈독들이기 시작했음이 건방지고 괘씸했다.
‘자효가 있었으면 분명 사생결단을 내려고 했겠지? 어딜 감히 언니에게 언감생심을 부리냐면서. 물론 나는 그런 완고한 돌머리까지는 아니니까 겸허하게 충고만 해주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연주(兗州)에서 거병을 위한 병마를 훈련시키고 있을 종매(從妹)를 떠올렸다.
투박하고 다부진 성품의 여성,
사촌 언니를 향한 충성심이 가히 태산과 같은 무장이기도 했다.
태만(怠慢)과 과태(科怠)와 매우 거리가 먼, 정직과 성실함 밖에 모르는 석녀(石女)를 떠올린 조홍은 한숨을 살포시 내쉬면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 끝났어요?”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낸 뒤,
마흔 명에 달하던 무관들을 어느덧 모두 때려눕힌 이성휘에게 한 걸음씩 다가섰다.
“미처 오신 줄 몰랐습니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그 정도는 아니예요.”
자신을 배려해 주는 이성휘의 말에 새초롬한 반응을 보인 조홍은 ‘그래도 언니는 절대 못 줘!’ 라고 속으로 소리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성휘에게 확실히 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조홍은 설부화용의 자태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언니에게 반하지 않을 사내 따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성휘가 언니에게 흑심이 있어 곁을 함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중원제일 검이십니다…!”
“추호나마 그 무력과 위용에 의심했던 저희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먼지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졌던 어림군 무관들이 절뚝대면서 두 다리를 일으키더니 일제히 이성휘에게 예를 취했다.
뛰어난 무를 경험하였음에 만족했는지,
근골을 부러뜨릴 것처럼 매서운 공격을 수차례 가했던 이성휘에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달했다.
“내일도 검을 봐주겠다.”
“영광입니다!”
이성휘의 말에 어림군 무관들은 크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 휴식을 명령한 뒤,
이성휘는 지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조홍과 동행했다.
“꽤 열심히 하네요?”
“어림군은 오랫동안 대장군부 휘하에 있던 집단입니다. 명실상부한 황제의 호위부대였음에도 대장군의 직속으로 운용되어 왔습니다.”
“주인을 잃은 호위부대를…, 길들일 생각이라는 말이네요.”
“예, 그렇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어림군은 일당백의 무와 용맹을 떨친 집단이었기에 필시 향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이성휘에게 대답을 들은 조홍은 앙큼하게 콧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무관들을, 내일은 휘하 병사들을 훈련시킬 생각입니다.”
“음….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요?”
딱히 당신을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조홍이 빈틈 없이 강인한 이성휘의 옆얼굴을 쳐다 보면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늑대와 이리를 대비해야 합니다. 필시 놈들은 입조를 핑계로 온갖 위세를 부릴 테니…, 어림군으로 하여금 놈들을 억눌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맹덕 님을 위해서입니다.”
오로지 맹덕 님을,
모두 언니를 위한 일이라는 이성휘의 답변에 조홍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주군을 향한 충성일까….
연모하는 사람을 향한 연심일까….
지금은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언니를 섬기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에 조홍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이성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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