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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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의 난이 진압된 뒤,
사예주의 수많은 호사가들은 십상시의 난을 통하여 부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군웅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강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인물은 당연히 ‘중원제일 검’, 이성휘일 것이다.
사예주에서 지독한 악명을 떨친 검객들을 모두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린 무관. 악성전의 살수들을 참살하면서 화려하게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무관이 십상시의 난에서 결정적인 활약들했다.
그에 낙양 사대부와 호족들 역시,
이성휘를 중원제일 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 별칭이다! 나 또한 그대를 중원제일 검으로 부르겠다!”
금발의 여자아이가 가슴을 척 내밀면서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중원제일 검이라는 별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황녀는 자기 일처럼 크게 기뻐하면서 이성휘를 중원제일 검이라 불렀다.
악성전의 궁인들도 마찬가지얐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이성휘에게 존경과 경외를 담아, 중원제일 검이라 부르면서 크게 칭송했다.
“아, 저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칭송과 찬양의 의미로 중원제일 검이라는 별칭으로 불러 주는 것은 고맙지만 당사자인 이성휘로선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조금 참아줄 것을 부탁하려 했으나,
유리색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면서 기뻐하는 유협의 모습에 결국 이성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거둬야 했다.
‘왜 하필 이런 귀찮은 일이….’
입신양명, 혹은 공명을 목적으로 하는 무인들에게 노려지기 쉬운 별칭이다.
중원제일(中原第一),
호승심에 불타는 무인들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름이었다.
분명 ‘저놈을 꺾으면 내가 중원제일 검이 될 수 있다!’ 라고 외치면서 달려들 멧돼지 같은 놈들이 앞으로 차고 넘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대는 중원제일 검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것은 내가 확신하마! 나와 궁인들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는가!”
“예, 감읍한 말씀이십니다….”
애타는 남의 속도 모르고,
순진무구한 웃음으로 기뻐해주는 유협의 모습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말한 대로… 일 전에 폐하를 알현하여 천천히 의논을 해 보았다. 과연 그대의 말대로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분이더구나.”
오랫동안 학대하고 괄시해온 하씨 일가를 향한 고포와 두려움을 애써 참아내며, 크게 용기 내어 유변을 직접 알현하고 마음을 고백했다는 유협의 말에 이성휘는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물론 먼저 진언한쪽은 자신이었지만,
설마 진짜로…, 이 작은 황녀가 해낼 줄은 몰랐기에….
두려움을 이겨 내고 앞을 향해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디딘 유협에게, 이성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잘하셨습니다. 역시 발해왕 전하께서는 용기와 지혜를 겸비하신 분이십니다.”
이성휘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작은 황녀와 같은 눈높이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담아,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쑥스럽구나…. 별일 아니었다!”
무릎을 꿇으면서 예를 취하는 이성휘의 행동에 유협은 다소 쑥스러웠는지 뺨을 불그스름하게 붉혔다.
하지만 이성휘는,
그런 황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두운 과거에 맞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평생 동안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전하께서는 그것을 훌륭하게 해내신 겁니다.”
다 큰 성인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두운 과거를 떨쳐 내지 못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서 평생 자괴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성휘는 아직 어린 황녀가,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황녀가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 고맙다…. 그대 덕분이다!”
유협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부드러운 뺨에 보조개가 폭 생겼다.
새하얀 설원처럼 맑고 청려한 미소였다.
“그럼…! 그대에게 한 가지… 억지를 무릅쓰고 부탁을 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갑작스러운 유협의 요구에도 이성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응답했다.
본디 착한 아이에게는,
나름의 보답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럼 그 착한 아이에게 어떤 선물하면 좋을까? 지난번에 말한 저잣거리에서 파는 군것질거리들이 좋을 것 같았다.
“소, 손을….”
입술을 우물쭈물하면서,
애꿎은 바닥만 발끝으로 툭툭 치던 작은 황녀가 이윽고 웅얼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손을, 한 번… 잡아보고 싶다….”
“제 손 말씀입니까?”
이성휘는 설마 작은 황녀가 자기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에 크게 당혹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그런데도 놀란 것은,
귀여운 황녀가 설마…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매우 수수하면서도, 또한 엉뚱한 부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예, 알겠습니다.”
딱히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으므로,
부탁의 이유를 감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성휘는 작은 황녀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푸흣!”
이성휘가 뻗은 오른손을 두 손으로 쥔 유협이 뺨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부드러운 손을 가진 자신과는 다른,
굳은살이 사군데 박힌 울퉁불퉁한 손을 신기하다는 듯 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버지의 손을 만지는 귀여운 딸처럼, 오밀조밀한 양손으로 자기 오른손을 만지는 유협의 모습에 이성휘는 속으로 아빠 미소를 지었다.
둥근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손가락과 손바닥을 만지고 쓰다듬는 유협의 손길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황녀의 두 손에 담긴 따스한 온기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중원제일 검의 손은 이렇게나 울퉁불퉁하고 투박하구나. 나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습니까?”
“궁녀에게 들은 적 있다. 기술에 매진하는 장인들의 손은 모두 이렇게 투박하다고. 하지만 그 투박한 손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인의 손이라고 말해주었다!”
“제가 하는 건 살생을 행하는 행위입니다. 기술자들과 비교하면 그들이 화내지 않겠습니까?”
“허나 나와 궁인들을 모두 지켜 주지 않았는가. 나는 그대를 은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부디 미안 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오목조목하게 설명하는 유협의 말에 이성휘는 무심코 ‘진짜 여덟 살 맞나?’ 라고 문득 생각했다.
남을 위로해주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유협의 모습이 매우 어른스러웠기 때문이다.
작은 황녀의 배려 덕분에 마음속에 응어리가 맺혀 있던 무언가가 사르륵 녹아서 없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 * *
십상시의 정변을 신속하게 진압한 공로로 효기교위 조조는 우장군(右將軍)에, 사례교위 원소는 전장군(前將軍)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금군을 지휘하는 교위였던 조조와 원소가 대장군부를 대표하는 일곱 장군의 반열에 올랐음을 뜻했다.
게다가 지금은 하진이 십상시의 암계에 시살되면서 대장군 자리가 공백이 된 상황이었으므로 그 휘하를 관할하는 일곱 장군들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해져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모두 귀관이 성심을 다한 덕분이 아니겠는가.”
우장군 조조에게 한나라의 권력과 군권이 넘어오기 시작했음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군부의 중심이 넘어오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장군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장군 하진을 추종했던 늙은 장군들은 정변 진압에서 크게 활약한 조조와 원소, 두 여걸들을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권력에 빌붙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귀관 또한 어림군(御林軍)을 이끄는 장군(將軍)이 되지 않았는가? 나 또한 귀관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네.”
어림군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직속부대를 말한다.
오로지 황제의 명령만을 하달받으며,
황궁을 수비하는 호분 중랑장 원술의 황실 친위대보다 직급이 한 단계 높은 부대였다.
지금까지 어림군은 대장군 하진의 직속으로 운용되어 왔으나, 이성휘가 어림군의 사령(司令)에 임명되면서 대장군부 직할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어림총사(御林總司).”
번쩍이는 황금투구를 든 흑발의 여인이 다가오면서 이성휘를 불렀다.
자기 벼락출세를 자랑하고 싶었는지,
황금으로 장식된 갑옷을 입은 여인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걸어왔다.
정변 진압의 활약으로 금군교위에서 단숨에 우장군 휘하의 호위장군(虎威將軍)에 임명된 조홍이었다.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어림총사로 임명된 이성휘를 슬며시 두 눈에 힘을 주면서 쳐다보았다.
“이번 진압에 많은 활약했다면서요? 축하해요, 중원제일 검이라는 이름으로 경내(京內)가 크게 떠들썩하던데.”
항상 이성휘에게 퉁명스러운 모습들만 보이는 조홍답지 않은 칭찬이었다.
원소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사촌 언니인 조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투를 치렀기에 특별히 칭찬을 해준 것이었다.
사촌 언니를 위해 목숨을 불태웠다면 칭찬 정도는 해 줘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물론 언니의 옆, 2인자를 탐하겠다면 이 조자렴이 용서 없이 맞서겠지만.
“별일 아닙니다.”
“수십 명을 벴다면서요. 아니, 수백 명이었던가? 저잣거리에서는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것으로 유명한 검귀(劍鬼)라고 들 부르던데요. 이마에 날카로운 뿔이 돋아 있고 입에서 불까지 내뿜는 괴물이라고 들 생각하더라고요.”
조홍이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사촌 언니인 조조와 마찬가지로,
항상 무뚝뚝한 반응만 보이는 이성휘를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하지만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좋은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공포와 두려움은 곧 힘이니까.”
“음….”
이성휘와 조홍이 사뭇 친근한 모습을 보이자 조조는 짐짓 불편한 반응을 보였다.
부하들끼리의 교분과 유대는 중요했지만,
이성휘에게 항상 울퉁불퉁한 모습만을 보였던 사촌 동생이 갑자기 살갑게 구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기분이 왈칵 나빠졌다.
‘음, 지방으로 보내버릴까…. 현도군(玄菟郡)이나 일남군(日南郡)으로 보내버리는 것도 좋겠지.’
감히 자기 (예비) 연인에게 사뭇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사촌 동생의 반응에 조조는 한나라의 동쪽 끝이나 남쪽 끝으로 보내버리겠다는 감정적 보복대응을 잠시 생각했다.
“우장군!”
조조가 사촌 동생을 향해 질투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때,
휘하 무관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서량(西凉)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예! 병주목 동탁이 황실과 조정에 입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서량에서 10만이 넘는 대군을 지휘하는 병주목 동탁이 입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병주(并州)에서도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무맹도위 정원 또한 동탁과 마찬가지로 황실과 조정에 입조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둘 다 한꺼번에 입조를 요청했다는 말이군….”
낙양의 북쪽과 서쪽에서 대규모의 군단을 지휘하는 군벌들이 입조를 요청했다.
전령이 전한 보고에,
조조는 물론 이성휘 또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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