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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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분 중랑장 원술이 북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변이 진압된 이후였다.
십상시들이 모두 참살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던 환관들 또한 창검 아래에 쓰러지게 되었으며, 북궁의 궐문에 내걸린 채로 치욕을 당하고 있었던 대장군 하진의 수급 또한 온전하게 수습했다.
“모, 모두 끝났단 말이냐…!”
사방에 넘쳐흐르는 핏물,
산더미처럼 쌓인 수많은 주검들.
피를 쏟은 채 죽은 주검을 수레로 운반하고 있던 대장군부 병사들을 본 원술은 자신이 한 발 늦었음을, 결국 조조와 원소… 빌어먹을 화냥년들이 자기 전공을 모두 가로챘음에 분통을 터트렸다.
“황실 근위대를 이끄는 호분 중랑장인 내게 그 어떤 보고도 없이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이건 나를 향한, 그리고 여남원씨 가문을 향한 치욕이자 모독이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이 잔칫상에 올라왔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텅 빈 접시들만 목격한 사람이 바로 이러한 심정일까.
십상시들은 모두 참살되었으며,
그를 지지했던 환관과 병사들 또한 모두 정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허탈함에 젖은 분노를 발산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크게 격분한 원술은 원소와 조조가 의논을 나누고 있던 백호관(白虎觀)을 급습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당장에라도 경거망동을 벌일 것처럼 난폭한 모습을 보였다.
“많이 늦었군.”
“닥쳐라, 환관 년아.”
아픈 곳을 찌르는 조조의 말에 원술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에 조조의 뒤에 있던 이성휘가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원술을 위협했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단 일격에 목을 떨어트릴 것처런 그 기세가 날카로웠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는지,
이성휘의 날 선 행동에 원술은 침음을 삼키면서 잠시 뒷걸음질 했다.
“큭! 이 잡것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내 부관이다. 경동(輕動)을 계속 부렸다간 네 목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거다.”
“건방진 년 같으니!”
원술이 일갈하면서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곁을 지키고 있던 호분 중랑장 휘하의 무관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뽑을 생각까진 없지만,
다소 위협을 가할 정도는 될 것이다.
마치 시궁창의 부랑배처럼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우위에 서려는 원술의 거친 행동에 조조는 경멸에 찬 비웃음을 날렸다.
“귀관.”
“예, 맹덕 님.”
“한 놈이라도 검을 뽑으면 모두 죽여라.”
“알겠습니다.”
이성휘 또한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했다.
이성휘와 원술 휘하의 무관들이 서로를 노려보면서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신경전이 펼쳐졌다.
“그만.”
두 군웅들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자존심 건 신경전을 중재한 사람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원소였다.
금발의 여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을 뻗으면서 제지하자 조조와 원술이 신경전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우리끼리 싸울 이유는 없을 텐데요. 대장군을 시살했던 십상시들을 모두 일망타진했으니, 어서 이 기쁜 승전보를 황제 폐하께 진상해야죠.”
손뼉을 한 번 치면서 조조와 원술의 시선을 집중시킨 원소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원술이 이를 빠득 갈면서 입을 열었다.
“네년들이 먼저 나를 기만하고 멋대로 행동했을 텐데! 정변 진압의 일등 공신은 여남원씨 가문의 적통인 내가 차지하는 것이 마땅했거늘!”
“공로, 당신의 이름은 이등공신의 반열에 올려드리도록 하죠.”
“뭐?”
정변 진압에 나서지 않았음에도 이등공신의 반열에 올려주겠다는 원소의 호의에 원술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얼녀 년이 뭘 잘못 먹었나?
내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을 텐데.
지금까지 기고만장하게 설치던 년이 갑자기 자기 분수를 깨닫고 꼬리를 말지 않는 이상에야….
“일등 공신은 하남윤과 조정의 청류파(淸流派) 영수들이, 이등공신은 우리 대장군부의 무관들이 해당되겠죠.”
“조정의 늙은이들에게 일등 공신의 자리를 모두 줄 셈이냐.”
“본래 정변 진압의 일등 공신 자리는 전투와는 무관한 대신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니까요. 왕윤 공은 청류파의 영수 중 한 명이자 대장군부의 중신이 시기 때문에 일등 공신에 책봉되시는 거죠.”
원소의 설명에 원술은 분개를 거두고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등공신의 반열,
지금으로선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건방진 년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실질적으로 군을 이끌었던 조조와 원소 또한 이등공신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 하였기에 욕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네놈은 뭐냐. 감히 대명문가의 적통에게 검을 뽑으려고 하다니.”
원술이 성난 짐승처럼 위협하듯 이성휘를 노려보면서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냈다.
그에 조조가 대답했다.
“기도위 이성휘다. 낙양의 수많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용저라고 불리우고 있지.”
“용저?”
용저, 라는 이름을 듣게 된 원술은 낙양은 물론 사예주 전역에서 회자되고 있는 인물을 떠올리게 되었다.
30여 명의 검객들을 도륙한 괴물.
검으로 검객들을 모조리 찢어 버린 것은 물론, 맨손으로 사람의 척추까지 부러뜨렸다고 전해지는 도깨비 같은 놈.
“큭!”
원술이 두려움에 찬 침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돌렸다.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모습에 조조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자신을 이용하여 오만불손한 원술을 겁박하는 조조의 행동에 이성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알아서 물러 갔을 것을.
구태여 여남원씨 가문의 미공자를 조롱하는 조조의 장난기 가득한 행동은 경솔한 감이 없지 않았다.
물론 질겁한 채 물러서는 원술의 모습이 조금 쌤통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 * *
십상시들이 일으킨 정변 진압을 총지휘했던 효기교위 조조는 사례교위 원소와 함께 이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청류파 권신들에게 일등 공신 자리를 양보했지만 앞으로 효기교위 조조가 한나라 군부의 실세가 되었음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신속하게 병마를 지휘하여 정변을 속전속결로 진압해 버린 조조의 무략에, 환관 집안의 손녀라며 멸시했던 대장군부의 장군들은 조조를 뛰어난 군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비록 환관 집안의 여식이나…, 이번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만약 효기교위가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대장군에 이어 우리들 또한 교활한 십상시에게 떼죽음을 당했을 걸세.”
의지할 구심점을 잃은 대장군부의 장군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실세인 조조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정변 진압을 총지휘했던 조조,
신속하게 진압군에 합류하여 십상시가 무단으로 점거했던 북궁을 탈환한 원소.
하진의 사망으로 무주공산이 된 한나라 군부는 정변 진압에서 두각을 드러낸 두 여걸들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성휘라는 자에 대해서 들었는가?”
“사례교위를 도모하려 송현(松縣)을 습격했던 무자비한 살수들을 모두 쓰러트렸다지…. 실로 굉장한 무용을 가진 자일세.”
원소를 시살하기 위해 송현을 급습했던 십상시들의 악행에 사예주의 사대부와 호족들이, 또한 한나라의 수많은 유자(儒者)들이 크게 격분했다.
그리고 송현을 짓밟은 살수들을 모두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린 이성휘의 활약에 큰 지지를 보냈다.
“하남윤을 구했다고도 들었네만.”
“사례교위에 이어 하남윤까지 구했다…. 과연 효기교위와 사례교위에 이어 이등공신에 책봉될 만하군.”
장양과 조충, 두 역신(逆臣)들의 수급을 벤 이성휘는 당당히 이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과정에 다소 반발이 있었지만,
공과 활약이 하늘을 가히 덮을 정도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이었기에 반발은 단숨에 무마되었다.
정변 진압에 가장 큰 활약을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이성휘는 논공행상에서 두 여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고안한 대학자로 유명한 채옹 공이 기도위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군.”
중원제일(中原第一),
드넓은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무예와 충심을 칭송하는 무인을 위한 시였다.
* * *
채옹은 한나라의 수많은 학자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뽑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의랑(議郞)을 지내다가 환관들의 모함을 받아 삭방군(朔方郡)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뒤, 그 이후 사면령을 받아 고향인 진류군(陳留郡)에 돌아와 있었다.
고향에서 유유자적하게 학자로서의 삶을 보내던 채옹은 낙양에서 벌어진 변란을 듣고는, 이를 진압함에 있어 가장 큰 공과 활약을 한 이성휘를 위해 그의 무(武)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중원제일, 그럼 응당 중원제일 검(中原第一劍)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거 좋군!”
채옹이 지은 시를 듣게 된 낙양의 호사가들은 무자비한 살수들을 모두 불귀의 객으로 만들어 버린 이성휘를 칭송하면서 그를 ‘중원제일 검’ 이라고 불렀다.
백성들 또한 그를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악행과 부정부패의 대명사였던 환관들의 목숨을 끊어낸 이성휘의 활약에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원제일 검의 이름을 칭송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중원제일 검이라는 부담스러운 별칭을 얻게 된 당사자는….
“축하하네, 중원제일 검.”
흑발의 여인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중원제일 검으로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에 이성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중원제일이겠습니까.”
“지나친 겸손도 그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일세. 나를 몇 번이고 구해 준 귀관에게 중원제일 검이라는 별칭이 붙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다독이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부관을 놀리려는 의도가 매우 다분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들 잊을 겁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나의 신변을 호위하는 귀관이 계속 중원제일 검이라고 불리어야 나 또한 어깨를 으쓱이면서 자랑하지 않겠나.”
“…….”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중원제일 검이라는 별칭을 소문내고 다니는 조조의 행동에 이성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에게 곁눈질을 보냈다.
“…저는 검을 휘두르는 걸 싫어합니다.”
이성휘의 그 말에,
조조는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째서인가?”
그 말에 이성휘가 답했다.
“계속 휘두를 때마다… 명이 단축될 테니까요.”
“하지만 귀관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를 위해서 매번 검을 뽑고 있지 않은가.”
“검을 뽑는 것 말고는… 맹덕 님의 도움이 될 방법을 잘 모르니까요.”
조조의 물음에 이성휘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대답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될 방법은,
명을 단축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검을 뽑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나, 나의 도움이 되고 싶어서 검을 뽑는다는 말이로군….”
“예.”
“그리 부끄러운 말을… 귀관은 어찌 그리 쉽게 하는 겐가!”
직접 자기 마음을 밝히는 이성휘의 모습에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조조였다.
얼굴을 빨간 봉숭아처럼 붉히면서,
작은 어깨를 움찔움찔 떨 정도로 수줍어했다.
환관들을 모두 도륙하고 궁궐의 정변을 진압한 효기교위 조조라고는 보이지 않는, 첫사랑에 빠진 숫처녀처럼 여리면서 애틋한 모습이었다.
* * *
무거운 병장기를, 방천화극(方天畫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병장기를 어깨에 짊어진 금발의 여성이 이를 드러내면서 입을 열었다.
“중원제일 검? 재밌네. 놈을 꺾으면 내가 중원제일 검이라는 말이잖아. 물론 나는 검이 아니라 창을 쓰지만.”
강한 열망과 열의, 상대를 짓누르고 싶다는 투쟁심이 깃든 그녀의 말에 장료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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