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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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휘를 내당(內堂)에 들인 뒤,
금창약이 든 작은 단지를 서랍장에서 꺼내어 가져온 초선은 문득 든 생각에 몸이 경직되었다.
미약하게 덜덜 떨리는 두 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애써 태연한 척 하려고 했다.
‘외, 외간 남자와 단둘이…! 게다가 금창약을 몸에 발라야 하는데… 어찌 시집도 안 간 처자가 외간 남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겠사옵니까…?! 하지만 명공께서는 역천을 행하려는 무뢰배들로부터 아버지를 구하신 은인이시옵니다! 또한 이것은 아버지의 명이 시기도 하니….’
사랑초처럼 새하얀 뺨에 홍조를 그리기 시작한 초선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꿀걱 삼키면서 이성휘에게 다가섰다.
그를 자리에 앉힌 뒤,
작은 단지를 열어 금창약에 손을 뻗었다.
누런빛을 띄는 고약(膏藥)을 손가락에 묻힌 초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성휘를 바라보았다.
“…….”
낙양제일미라 불릴 정도의 아름다운 절색을 겸비한 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망부석처럼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 점이 야속했다.
둘 다 부끄러워하는 상황이었다면 조금 덜 민망했을 텐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신 혼자 유난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며, 명공…. 오, 옷을… 아니, 의복을 잠시 벗어 주시겠사옵니까…?”
옷을 벗으라고 하면 색에 밝히는 여자로 오해받을까, 초선은 급히 의복으로 정정했다.
물론 딱히 달라진 건 없었지만 말이다.
초선의 부탁에 이성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뻘건 핏물에 절어 있던 옷을 벗었다.
피칠갑한 채 계속 싸움을 누볐던 탓인지,
옷이 살갗에 쫙 달라붙어서 단번에 벗기 어려웠기 때문에 잠시 난항을 겪었다.
“읏!”
초선이 잠시 침음을 흘렸다.
외간 남자의 맨살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옷을 벗은 이성휘의 몸에는 검에 베인 상처들과 함께 무수히도 많은 흉터들이 살갗 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남성의 몸을 훑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을 뿐 더러, 흉터들로 가득한 흉신(凶身)을 보는 것 또한 생전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포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하얀 살결을 가진 사대부 공자의 몸을 보았다면 꺅꺅 비명을 지르면서 부끄러움에 떨 뿐이었겠지.
하지만 오랫동안 검을 휘둘러 온 무관의 몸은 양갓집 아가씨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했다.
“소저, 제게 주시면 스스로 바르겠습니다.”
잠시 초선이 멈칫하자,
이성휘는 스스로 금창약을 바르겠다고 말했다.
그에 토끼처럼 놀란 두 눈으로 바라보던 초선이 이내 확고한결심을 한 사람처럼 입술을 꾸욱 다물면서 다부진 결심을 보였다.
“아니옵니다…! 소녀와 아버님을 구해주신 명공에 대한 하해와 같은 은혜의 십 분지 일이나마 갚기 위한 최소한의 도리이오니 소녀가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옵니다!”
완고하고 결연했다.
스스로 하겠다는 이성휘의 말에,
작약꽃 같은 연분홍색이 감도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미녀가 두 눈에 힘을 주면서 귀여운 고집을 부렸다.
“소, 소녀가 하겠사옵니다…. 우선 등부터… 금창약을 바르겠사옵니다, 명공.”
부상자를 처음 상대하는 막내 의원처럼,
아름다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뺨에 툭 떨어질 정도로 크게 긴장한 초선이 떨리는 손을 애써 용기를 내어 뻗으면서 이성휘의 등에 얹었다.
꺄아악!! 하고 비명을 속으로 내질렀다.
외간 남자의 몸에 손을 얹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넓은 등에 내 손끝에 닿고 있었다!
초선은 이성휘의 등과 접촉하는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그만 혼절해 버릴 것만 같았지만 결코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소녀와 아버지를 구해주시다니…. 분명 필사적으로 치소까지 달려오셨을 터….’
칼에 베인 자국들이 실로 섬뜩했다.
분명 인내하기 어려운 끔찍한 격통을 겪었을 터.
그런데도 아버지를 구하고자 필사적으로 하남윤 치소에 달려온 이성휘의 노력을 떠올리며, 초선은 한낱 수치심 때문에 잠시나마 망설였던 자기 우매한 행동에 자괴감을 느꼈다.
“명공에게는 항상… 도움들만 받는 것 같사옵니다. 소녀가 일생을 다하기 전에 그 하해와 같은 은혜들을 다 갚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괜찮습니다.”
잠깐의 대화를 끝낸 뒤,
초선은 다시 금창약을 바르는 일에 집중했다.
약을 바르면서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다.
은인의 몸에 손을 대고 있으면서 감히,
살결에 약을 바를 때마다 점점 그 손가락 끝에 사심이 담기기 시작했음을.
‘명공께서는 무수히도 많은 부상들을 입으셨음에도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만약 그때,
아버지께서 역도들에게 그대로 끌려갔다면….
사례교위 휘하의 무관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환관 무리가 대장군 하진과 반란을 모의하였다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운 뒤, 양부를 살해하고 하남윤의 권한을 빼앗아 궁궐과 낙양을 통째로 손아귀에 쥐려 했음을 넌지시 알게 되었다.
“…으음.”
“소,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잠시 상념에 빠져 그만…!!”
상념의 샘에 너무 깊이 빠진 탓일까,
칼에 베인 상처 위를 무심코 짓누르고 말았다.
초선이 다급히 놀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에 이성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우으으…. 또 폐를 끼치고…. 명공에게 매번….’
이성휘의 입에서 잠깐이지만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온 것을 들은 초선은 자신을 탓하면서 속으로 우는 소리를 냈다.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실수를 해 버린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루 다 할 수 없는 은공을 받았사옵니다. 어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명공께서는 소녀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배척치 말아 주시옵소서.”
자신에게 연모의 감정을 고백했던 사내들은 환관의 횡포에 놀라 모두 달아나버렸는데,
이 남자만큼은 나와 아버지를 구해주었다.
불길처럼 뜨겁고,
바위처럼 견고한 이 사내에게….
은인을 향한 감사가 아닌,
경칩을 맞이한 보리처럼 모종의 감정이 점점 싹을 트기 시작했다.
“혹시 의원을 불러 주실수 있겠습니까?”
“네, 혹시 다른 다친 곳이라도….”
“화살촉이 팔에 박혀 있습니다. 혼자서 빼내려 했지만 아무래도 의원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낸 이성휘의 모습과는 달리, 팔에 화살촉이 박혀 있다는 말을 들은 초선은 경기를 일으키듯 소스라치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지, 진작 말씀하셨어야지요! 일단 금창약으로 상처들을 처치하였으니 당장 의원을 불러오겠사옵니다!”
이 남자,
답답한 면이 있다.
무예 실력이 무쌍(無雙)을 이룰 정도이며, 그 담력 또한 용저와 번쾌에 이를 정도로 용맹하였지만 뜻밖에 아둔한 면이 있었다.
“그러한 심각한 부상들을 떠안은 채 오신 것이옵니까! 명공에게 은혜를 받은 소녀가 할 말은 아니오나, 명공께서는 본인의 심신에 좀 더 애착을 가지셔야 할 것으로 보이옵니다!”
금창약이 담긴 작은 단지를 다시 뚜껑으로 덮으면서 말했다.
크게 놀랐기 때문인지,
낙양제일미의 여성은 처음으로 외간 남성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였다.
“아, 예…. 알겠습니다.”
설마 혼나게 될 줄은 몰랐는지,
귀여운 다람쥐가 두 발로 일어서 위협하는 것처럼 퉁명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초선의 행동에 난색을 표했다.
* * *
병력들을 동원하여 남궁을 점거한 효기교위 조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제와 태후를 알현하여 반란 진압에 대한 전권을 받아 내는 일이었다.
십상시가 일으킨 정변을 진압하고자 하니,
정변 진압에 동원되는 병력을 총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황명으로 내려달라고 진언했다.
오광, 원술 등 대장군부의 급진파 인사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장군 하진이 죽었으니, 정변이 진압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주인 잃은 대장군부의 실권을 잡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십상시들이 대장군을 시살했단 말이냐!”
남궁을 포위한 조조로부터 십상시가 정변을 일으켰음을 알게 된 하태후는 이복오라비였던 하진이 그들에게 살해되었음에 대경실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의 대장군이,
황제의 가장 든든한 정치 후견인이었던 이복오라비가 죽었다.
그 소식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관들이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대장군을 꾀어내 북궁 성찬문에서 살해했다는 소식에 고개를 떨구기까지 했다.
“정변을 일으킨 십상시 또한 큰 근심이지만 대장군을 잃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대장군부의 장군들 또한 큰 근심거리입니다.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황명이 필요합니다.”
조조는 자신이야말로 십상시들의 정변을 속전속결로 진압할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이며, 한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충신이자 명신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또한,
주인을 잃은 대장군부 병력들이 감히 황실에 창검을 겨눌지도 모른다며 태후를 간접적으로 위협했다.
“효기교위 조조, 그대에게 전권을 위임하도록 하겠다! 대장군을 시살한 역당들을 모조리 척결하고 황실과 조정을 불온한 무리들로부터 구원토록 하라!”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위협은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자기 어리석은 행동들로 인해 이복오라비를 잃게 된 하태후는 통한의 슬픔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냉철한 사리 분별을 할 수 없었기에 무주(無主)가 된 병권을 차지하려는 조조의 야심을 꿰뚫지 못했다.
덕분에 조조는 아무런 의심 없이 야심을 실현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수, 숙부께서… 숙부께서…!! 어찌 숙부께서 이리도 허망하게 돌아가실수 있단 말인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후견인이었던 숙부를 잃은 유변은 크게 오열하면서 슬퍼했다.
슬픔에 빠진 황제와 태후,
대장군 하진의 죽음으로 슬픔과 한탄에 빠진 그들은 매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하진에게 많은 부분들을 의탁하고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천세일시(千歲一時)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 모두 귀관이 나를 도운 덕분이다.’
황제와 태후로부터 전권을 받아 낸 조조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성휘에게 감사를 보냈다.
모두 네 덕분이다.
환관 집안의 손녀라며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아왔던 내가 드디어 뜻을 펼칠 때가 왔다.
나는 결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나를 가로막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뜻을 실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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