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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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을 가하는 처지에서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 버린 환관이 절박한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모, 모두 무기를 버려라! 당장!”
하남윤 치소를 향해 육박해 오는 수천 명의 병력을 목격한 환관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휘하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다.
치소를 습격하여 하남윤 왕윤을 체포했던 병사들은 분명 참살되어야 할 사례교위 원소가 멀쩡히 살아 있으며, 또한 그녀가 군대를 몰고 등장하였음에 거사에 승산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철그럭,
병사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자, 자네는…!”
두 팔이 묶인 채 끌려갈 위기를 겪은 왕윤이 이성휘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피칠갑한 채 등장하여,
순식간에 주변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환관의 목덜미에 칼을 겨눴다.
“대체 뭐 하는 놈이냐!”
“필시 대장군부의 무관이렷다!”
십상시 일파의 무관들은 목숨을 위협받는 환관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이성휘에게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아악!”
이성휘는 목에 칼끝을 겨누고 있던 환관을 무관들에게 밀어낸 뒤,
크게 검을 내지르면서 환관과 함께 십상시 일파들의 무관들까지 베어 버렸다.
순식간에 그들이 모두 일소되자 휘하 병사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을 선택했다.
“괜찮으십니까, 하남윤 어르신.”
이성휘가 왕윤의 두 팔을 묶고 있던 밧줄을 날카로운 칼끝으로 끊어내면서 물었다.
그에 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대 덕분에 누명을 받아 끌려가는 수치를 면할 수 있었군. 헌데 어찌 된 일인가? 이놈들이 다짜고짜 나와 대장군을 역신이라고 칭했네. 필시 십상시들이 뭔가 흉계를 꾸민 게 분명하지 않은가!”
원소가 대장군부의 참모 역할을 맡고 있다면 왕윤은 견고한 숙장(宿將) 역할을 전담했다.
오랫동안 그들과 반목을 쌓아왔던 만큼,
당연히 십상시 처지에서는 자신이 어떻게든 제거해야 될 눈엣가시로 보였을 것이다.
“환관들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노, 놈들이 기어코 역천을 꾀하였단 말인가…!!”
십상시들이 난을 일으켰음을 드디어 알게 된 왕윤이 침음을 흘리면서 한탄했다.
기어코 정변이 벌어졌다.
선황의 총애를 등에 업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권력의 괴물들이 기어코 황실과 조정마저 범하려 했음을 알게 되었다.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시 낙양 군대를 이끌고 십상시 일파들을 모조리 도륙내야 할 것이었다.
“하남윤!”
원소와 그녀의 휘하 장수들이 하남윤 치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말에서 내린 뒤,
왕윤에게 예를 취하면서 비상사태가 벌어졌음을 알렸다.
“방금 기도위에게 들었네. 십상시, 그 역신 놈들이 정변을 꾀하였다지!”
“예, 그래서 하남윤께 고견을 들은 뒤에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가 십상시들을 척결할 계획이예요.”
“이를 말인가! 그 역적 놈들의 씨를 모조리 말려 버릴 것일세!”
원소의 말에 크게 동의한 왕윤은 자신 또한 군세를 모아 정변 진압에 동참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초선아.”
“네, 네… 아버지!”
양부의 부름에 그제야 끔찍한 위협에서 벗어났음을 알게 된 초선은 안도의 기쁨을 터트리면서 양부의 품에 안겼다.
구사일생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만약 아버지가 병사들에게 끌려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는 수양딸의 모습에 왕윤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기도위의 상처를 봐주지 않겠느냐?”
“네.”
왕윤이 수양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온몸이 넝마가 된 이성휘를 바라보게 했다.
시뻘건 피칠갑한 모습에,
초선은 어깨를 미약하게 떨면서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의 남성은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했던 양부와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었으므로 두렵고 무서웠지만 애써 마음을 굳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치소에 금창약(金瘡藥)이 있사옵니다. 안내해드리겠사옵니다. 따라오시옵소서, 명공.”
목숨을 구원받았기 때문일까,
왕윤의 수양딸인 초선은 이성휘를 ‘명공’ 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그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이성휘는 난색을 표하면서 사양했지만 초선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결국 명공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
치료를 목적으로 초선의 안내를 받으면서 치소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성휘의 뒷모습을 원소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재차 왕윤에게 언질을 전하고는 휘하 장수들과 함께 말 위에 올랐다.
“무슨 일인가, 본초?”
순우경이 물었다.
그 물음에 금발의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한시가 급하니 당장 궁궐로 하도록 하죠.”
이성휘는 잠시 하남윤 치소에서 부상을 치료하기로 한 뒤, 원소는 휘하 장수들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궁궐로 향하기로 했다.
그가 옆을 지켰다면 더 든든했겠지.
하지만 이성휘는 십상시가 보낸 검객들과의 싸움에서 적잖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무리하게 둘 순 없었다.
‘지금은 맹덕을 돕는 게 먼저겠죠. 그리고…, 대장군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 또한 시급하고요.’
그러나 이미 하진은 십상시 일파에 의해 온몸이 찢겨나간 뒤였다.
그 사실을 결코 알 리 없는 원소는,
지금쯤 십상시의 난을 진압하고 있을 대장군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라며 병마들을 재촉했다.
* * *
궐담 너머에 수많은 병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것을 목격한 악성전의 궁인들은 부리나케 달려가 유협에게 그 사실을 고했다.
무슨 사달이 난 게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궁중 생활을 해온 악성전의 궁인들은 필시 궁궐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궁궐에 몸을 숨긴 채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남궁 점거에 성공한 조조 군은 십상시 일파들이 대장군 하진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황실과 조정에 알렸다.
“하, 하진이…! 대장군이 죽었답니다!”
궁녀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렸다.
그 사실에 유협은 물론,
전각 안에 있던 환관과 궁녀들 또한 크게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왜냐하면 정변을 꾀한 세력이 십상시 일파였기 때문이다.
“그, 그게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바깥을 지키는 금군 무관에게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금강야차(金剛野叉) 같았던 하진이 설마 십상시들의 손에 어이없게 죽어 버리다니….”
번번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발해왕을 도모하려 했던 하진이 죽었다.
그 소식에 악성전의 궁인들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할 상황에 애매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대체 이 혼란스러운 정국은 언제쯤 끝날 요량인지. 새 황제의 등극으로 잠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궁인들은 다시금 궁궐에서 참변이 발생하였음을 크게 우려 했다.
“지금부터 여기 악성전을 포함한 남궁 전역을 저희 무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황녀 전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궁인들이 크게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금군의 갑옷을 입은 여성 무장이 악성전에 고했다.
효기교위 조조의 사촌인 조홍이었다.
그녀는 황제와 태후를 알현하고자 자리를 잠시 비운 사촌 언니를 대신하여 유협을 비롯해, 궁궐의 황실 종친들을 위무하면서 거병의 대의명분과 정당함을 선포하는 중이었다.
“정말… 대장군이 시해된 것이… 사실인가…?”
유협이 물었다.
작은 여자아이의 물음에 잠시 당황한 반응을 보인 조홍이었지만, 이내 헛기침하면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위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환관들이 태후의 조서를 위조하여 대장군을 북궁 성찬문에 유인하여 무도한 사변을 도모했다고 합니다.”
선황의 딸,
현 황제의 이복누이.
한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황통(皇統)을 마주하게 된 조홍은 혹시 자신이 실수를 범하진 않을까,
속으로 노심초사하면서 유협의 눈치를 살폈다.
십상시가 일으킨 정변에 맞서 군대를 일으킨 조조 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의명분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담당하게 된 조홍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기도위는… 어찌 되었는가?”
유협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 조홍은 황녀가 언급한 ‘기도위’ 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윽고 이성휘가 악성전의 황녀를 살수들로부터 구해 냈음을 떠올렸고, 이성휘의 안위를 묻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쯤 궁궐로 복귀할 것입니다. 제가 기도위에게 직접 황녀 전하의 부름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라.”
대장군 하진의 시살(弑殺),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심정으로 대장군부에게 복수의 칼을 갈아온 십상시들의 정변.
조정대신들을 누구도 믿지 않는 유협이었지만 궁중에서 유일하게 이성휘만은 신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구해줬으니까.
이번에도 또한 나와 궁인들을 지켜 줄 것을 알기에.
이성휘가 곧 궁궐에 복귀할 것이라는 조홍의 답변에 유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가 빨리 악성전으로 와 불안에 떠는 자신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다독여주기를 기도했다.
“자렴 어르신!”
조홍이 발해왕 유협을 알현하고 있을 때,
문 너머에서 다급함에 찬 목소리가 조홍을 불렀다.
그에 조홍은 유협에게 예를 취하면서 전각을 빠져나왔다.
전각을 나서자 다급함에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무관의 모습이 보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맹덕 님께서 빨리 자렴 어르신을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데?”
“북궁에 터를 잡은 환관 놈들이 병력을 몰고 이쪽 남궁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 그게 진짜야?!”
북궁 성찬문에서 대장군 하진을 시살한 환관 무리가 병력을 몰고 남궁을 도모하려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변을 일으킨 환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거병을 시도한 조조군과 마찬가지로 ‘대의명분’ 이기 때문이다.
“전투를 준비하라! 역적들이 온다!”
“최소한의 병력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태극전(太極殿)으로 집결하라!”
무관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면서 남궁의 병력들을 집결시켰다.
남궁을 중심으로 전투대형을 구성했다.
환관이 이끄는 병력이 들이닥친다면 궁중에서 백병전이 벌어질 것이었기에 금군 병사들은 크게 긴장한 눈빛으로 명령을 기다렸다.
“본초가 무사하다면 필시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올 것이다. 그때까지 수비에 전념한다. 자칫 공격에 나설 경우, 황상과 태후의 신병을 노리는 적들에게 남궁이 노출될 수 있다.”
환관들이 이끄는 병력이 북쪽에서 내려온다는 다급한 소식을 들은 조조가 하후돈, 하후연과 함께 병사들을 지휘했다.
환관들의 병력은 많지 않을 것이다.
궁중 병력들의 대부분이 대장군부의 휘하였기 때문이다.
놈들의 공격은 그저 발악에 불과했다. 정변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온 돌발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조조가 공세를 포기하고 수비에 일관하려는 것은 만에 하나라도 황제와 태후의 신병을 빼앗기게 될 경우에 벌어지게 될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대장군 하진이 시살되고 십상시들이 마침내 정변을 꾀하였다.
이 소식을 형님께 빨리 알려야 한다.
봉거도위(奉車都尉) 동민은 벌매를 이용해 낙양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란 상황을 알리려고 했다.
‘하진이 죽었으니 더 이상 형님의 군대를 막을 적수는 천하에 없다!’
오랫동안 군림한 산군(山君)이 죽었으니,
이제 새롭게 산에서 호령할 산군을 뽑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동민은 서량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형님이야말로 천하의 영예와 부귀영화를 거머쥐게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서량인들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다.
평생 권력자들의 눈치나 보면서 살게 될지,
아니면 일발 역전의 도전에 성공하여 하진을 대신하여 만인지상에 오르게 될지.
어깨 위에서 고개를 갸웃 흔들고 있는 벌매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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