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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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하진이 북궁(北宮) 성찬문(盛饌門)에 매복하고 있던 검객들에 의해 참살되었다.
육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겨나간 어육이 되어 버렸고,
그 머리는 장대에 매달리는 치욕을 당했다.
한나라를 오랫동안 병들게 한 십상시를 모두 죽이고 환관들을 내쫓으려 했던 대장군부의 거두는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조카를 황제에 옹립하여 만인지상의 권력을 손아귀에 쥔 인물의 죽음이라고 하기엔 비참하고 덧없기 그지없었다.
“어르신! 천출 놈의 목을 베었습니다!”
하진의 숨통을 끊어낸 상방감(尙方監) 거목이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칼날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중상시(中常侍) 장양에게 보고했다.
그에 장양이 크게 기뻐했다.
“잘했다, 상방감! 이번 거사의 일등 공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소신은 그저 천하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큰 역신을 죽인 것뿐이옵니다.”
십상시의 수장, 장양이 활약을 크게 위무하자 거목이 감읍하다는 듯 고개 숙여 대답했다.
하진의 머리를 궐문에 내걸었다.
외척의 지위를 이용하여 전횡과 패악질을 일삼았던 역신의 죽음을 널리 알리는 한편, 대장군부가 우두머리의 죽음에 동요하여 사분오열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사례교위 원소가 참살되고 하남윤 왕윤이 반란모의 혐의로 체포되었을 터.
계획들이 모두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중상시 어르신!!”
환관 단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다급한 소식을 들었는지,
그의 얼굴이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효기교위 조조의 병력이 난데없이 난입하여 남궁을 점거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효기교위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다니!”
단규의 보고에 장양은 물론, 옆을 지키고 있던 환관들까지 크게 놀라 소리쳤다.
효기교위 조조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분명 그 년은 고향에서 상경한 친척을 만나기 위해 궁궐을 비웠다고 했다. 분명 간자들이 그렇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십상시 일파들은 효기교위 조조를 위험에서 배제하고 거사를 획책한 것이었다.
“그년에게 속은 겁니다!”
단규가 크게 소리쳤다.
조조,
그 계집이 몰래 술수를 부린 것이다.
자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간자들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여 십상시 측에 가짜 정보를 흘려보냈다.
휘하 병력을 미리 준비시켜뒀음은 물론, 조씨 가문의 사병까지 동원하여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속았다니… 그럼 설마 우리들의 거사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던 말이냐!”
장양이 놀라 소리쳤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대에게,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계집에게 모든 계획들을 간파 당했음을 알게 된 장양은 모멸감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분을 토해냈다.
“여우 같은 년이…!”
“어르신!”
늙은 환관의 몸이 휘청거렸다.
주변 환관들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던 장양을 부축했다.
“금군이 남궁을 점령했다고 하옵니다!”
“이리 되면 황제와 태후를 볼모로 잡을 수 없지 않은가!”
효기교위 조조가 이끄는 병력이 남궁을 점거하였음을 듣게 된 환관들이 크게 술렁였다.
대장군 하진의 참살에 성공했으나,
거사의 가장 중요한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와 태후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모든 것들이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명분 없이 서원군을 일으켰던 건석이 아무런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한 채 비참히 죽지 않았던가.
“단규.”
“예, 중상시 어르신.”
“당장 허상과 번릉에게 궁궐과 낙양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집결토록 명해라!”
“아… 알겠사옵니다!”
지금쯤이면 번릉과 허상이 사례교위와 하남윤의 지휘권을 확보했을 터.
그들을 동원하여 남궁을 탈환하려 했다.
궁궐에서 교전을 벌이는 것은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양은 효기교위 조조에게 먼저 선수를 빼앗긴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는 과감한 수단을 결행하기로 했다.
“비록 아비가 조씨 가문의 양자로 들어온 놈이라고는 하나… 족보에 적힌 제 조부가 환관이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뒤를 친단 말인가!”
괘씸한 년 같으니라고.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환관 집안의 손녀에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음에 장양에 크게 노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이미 허상과 번릉이 궁궐과 낙양의 병력을 확보했을 것입니다.”
중상시 조충이 다독이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던 장양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분기에 찬 한숨을 깊게 토해냈다.
그래,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남궁 점령에 실패했으나,
다른 계획들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황제와 태후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패착이었지만, 그렇다고 대국(大局)이 무너진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장양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다음 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초선은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이 가득 든 찬합을 들고 양부의 치소(治所)에 도착했다.
매일 처소를 출입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양부가 산더미 같은 업무들로 인해 끼니를 거를 때마다 이렇게 찬합을 가지고 치소를 방문하고는 했다.
실로 아름다운 효심이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효심까지 두루 갖춘 초선을 낙양 백성들은 존경과 경애, 연모의 감정을 담아서 낙양제일미(洛陽第一美)라고 부르면서 칭송하였다.
“소저! 제가 들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더 힘이 세니 부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초선이 치소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남정네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향긋한 꽃에 벌과 나비들이 몰려들 듯,
낙양제일미의 등장으로 인해 딱딱한 분위기만 감돌던 치소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들끓는 남심을 주체 못한 남정네들이 서로 찬합을 들어 주겠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종사중랑 겸 하남윤 왕윤의 수양딸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된다면 부귀영화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왜 이렇게 치소가 소란스러운 것이냐! 이놈들, 모두 썩 물러가 일들 보지 못할까!”
시끌벅적해진 분위기 속에,
중년남성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문을 열어 고개를 내민 왕윤이 불호령을 내리자 초선에게 몰려들었던 남성들이 거미들이 흩어지듯 삽시간에 물러 갔다.
“아버지!”
“역시 너로구나.”
찬합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면서 배시시 웃음을 짓는 수양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고집불통 성품으로 유명한 왕윤도 어쩔 수 없는 딸바보라는 것을 인증하듯 노기 섞인 표정을 지우면서 허허 웃음을 지었다.
“번거롭게 올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예요.”
딸의 애정 어린 효성(孝誠)을 뿌리칠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짐짓 퉁명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왕윤은 끼니를 거르고 업무를 보는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든 요리들이 담긴 찬합을 가져온 수양딸의 지극정성에 감복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너도 같이 먹겠느냐.”
“네!”
책상 위에 놓인 4단 찬합,
왕윤과 초선이 오붓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뚜껑을 열자 황제의 수랏상에 오를 법한 고풍스러운 음식들이 매우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지극한 효성,
지아비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은 요리 실력까지. 장차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르게 된다면 한나라 제일의 현모양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대역죄인 왕윤은 당장 나와서 태후의 조서를 받들라!”
두 부녀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돌연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하남윤의 치소를 위협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날카로운 외침을 들은 왕윤은 딸에게 집무실에 그대로 있으라고 당부한 뒤,
문을 열어 모습을 드러냈다.
치소 밖에는 태후의 조서로 추측되는 공첩(公牒)을 든 환관과 두 눈을 부릅뜨고 창검을 든 병사들이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왕윤은 필시 상서롭지 못한 이유로 그들이 하남윤의 치소를 위협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내가 대역죄인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망발이냐!”
왕윤이 새하얀 수염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거친 노성을 내질렀다.
소싯적에 용맹한 장군이었음을 드러내듯,
마치 사자후와 같은 대성일갈하면서 환관과 병사들을 꾸짖었다.
왕윤의 외침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위세를 믿고 오만한 표정을 보이던 환관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윤, 네놈이 외척인 대장군 하진과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하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뭐라…?”
“지엄하신 황실의 명령 앞에 무릎을 꿇으라! 태후께서 명령을 내리셨거늘, 그런데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발뺌을 할 셈이냐!”
태후의 조서라고 주장하면서 공첩을 펼치기 시작한 환관의 행동에 왕윤은 궁궐에 큰 변란이 벌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환관 놈들이,
십상시 일파가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리 황망한 일이 벌어질 수 있겠는가. 필시 대장군과 대장군부 세력을 표적으로 한 십상시의 공격이 분명했다.
“죄인을 당장 추포하라!”
환관이 크게 소리쳤다.
그에 창검을 든 병사들이 왕윤을 향해 위협적인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다가왔다.
“아, 아버지! 아버지!”
환관의 악의에 찬 목소리와 병사들의 위협적인 발걸음을 문 너머에서 들은 초선이 문을 열고 나와 소리쳤다.
우악스럽게 다가오는 병사들,
억울한 누명에 분개를 발산하는 아버지.
행복한 점심시간이 되었어야 했으나 하남윤 치소를 들이닥친 무도한 병사들로 인해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소란을 들은 인원들이 치소에 몰려들었지만 날카로운 창검을 든 병사들이 무서워 감히 나서려 하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간 창검에 온몸이 찢겨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호오…. 저년이 바로 그 유명한 왕가부의 여식인가.”
다급함과 절박함에 찬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붙잡힌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초선의 모습에 환관은 두 눈을 빛내면서 흥미가 동한 표정을 지었다.
낙양제일미라고 불리는 왕가부의 여식답게 참으로 절색이 아닌가.
어차피 왕윤은 하진과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저잣거리에서 효수될 터. 왕씨 가문은 결국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터이니 저 절색의 미녀를 취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여봐라, 저년도 잡아라. 반란을 모의한 역적의 딸이다.”
환관이 턱짓을 보냈다.
그에 왕윤을 체포한 병사들이 애달픈 눈물을 쏟아 내면서 주저앉은 미녀 또한 붙잡으려 했다.
“어르신!”
환관의 호위를 선 무관이 크게 소리쳤다.
그 외침에 환관이 외침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하남윤의 포박을 풀고 병사들을 모두 뒤로 물려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치겠다.”
온몸에 피칠갑한 채,
넝마가 된 행색을 한 남성이 검을 겨누었다.
흙바닥에 서너 명의 병사들이 피를 쏟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대체 언제 검에 베인 것인지…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내지 않고 병사들을 제압한 뒤 자기 목덜미에 검까지 겨눈 남성의 신출귀몰한 검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왕윤 공을 구원하라!”
“십상시 놈들을 모조리 쳐라!”
무려 1천 명이 넘는 병력들이 하남윤 치소를 향해 육박해 오기 시작했다.
사례교위 원소의 휘하들이다.
송현에서 살수들에 의해 급습을 당한 원소가 순우경, 조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하남윤 왕윤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치소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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