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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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와 대장군.
하씨 가문의 천하를 이룩한 두 오누이의 돈독한 관계에 반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십상시의 난’이 머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십상시의 난.
태후의 조서를 사칭하여 대장군 하진을 궁궐로 불러들인 뒤, 매복하고 있던 자객들을 동원하여 하진과 그 호위를 서던 무사들을 모조리 도륙한 사건임과 동시에 군웅할 거의 시대를 열게 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소제(小帝)가 즉위하고 4개월 뒤에 십상시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악성전 습격으로 인해 사태가 가속화되는 움직임을 보이는 만큼, 지금부터 철저히 그 대비해두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
예상보다도 사태의 악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에 이성휘는 그것을 우려 했다.
혼란이 도래할 때가 빨라지고 있다.
작은 변이점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사건으로 빚어지는 것처럼,
궁중의 분위기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유협의 암살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믿었던 누이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일까.
부귀영화의 정점에 섰음에도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다급히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묘재가 이끄는 사병들을 모두 낙양 도처에 분산시켜뒀어. 위기를 알리는 신호를 보내면 모든 사병들이 조부(曹部)로 집결하겠지.”
하후돈이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계획대로 사병들을 모두 불러들였으니,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족제(族弟) 하후연이 사병 군세를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란이 발생하게 된다면 남궁(南宮)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될 겁니다.”
“심려하지 마. 나와 맹덕이 남궁을 먼저 점거할 테니까.”
이성휘와 하후돈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발의 여인이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끼어들었다.
“십상시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명확한 증좌도 없잖아요. 사병을 움직이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점거한다느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가 반란 분자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요?”
모든 실권을 빼앗긴 채 몰락한 십상시 세력이 대장군을 살해한다,
함부로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조조로부터 이성휘의 감시를 명령받은 조홍은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며 믿기를 거부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자렴.”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내는 조홍의 모습에 입을 연 것은 조조였다.
반신반의했던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궁중에서 벌어졌던 하씨 일가의 반목과 대장군부의 행보를 보게 된 이후부터는 이성휘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진이 흑산적 토벌을 명분으로 지방 군단들을 낙양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낙양에 지방 병력을 집결시키는 대장군부의 군사행동은 하태후의 그늘 아래에 숨은 십상시들에게 있어 최악의 위협일 테지.”
선황(先皇)과 함께 흑산적에 대한 유화책을 펼쳤던 자들이 바로 십상시였다.
흑산적의 대대적인 토벌을 주문하는 하진의 행동에 그들이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지방의 군단들을 불러들인 하진이 흑산적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내세우면서 자신들을 숙청하려 들 것이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성휘가 꺼냈던 말처럼 십상시들이 대장군 하진의 암살을 꾀한다면,
병주목 동탁과 무맹도위 정원이 이끄는 지방 군단들이 낙양에 입성하기 전에 거사를 치러야 했다.
“언니, 그러면 어서 그 사실을 대장군부에 알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자칫 대장군이 십상시들에게 암살되기라도 하면….”
“내가 원하는 바다.”
십상시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게 되자,
조홍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에 조조는 확고한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이미 자신은 뜻을 굳혔음을,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음을 밝혔다.
“맹덕 님, 하지만 아군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본초와 연계를 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게로군.”
“예, 그렇습니다.”
휘하의 금군 병력으로 궁궐을 장악하고 낙양을 점거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십상시의 난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해,
궁궐 장악과 낙양 점거를 함께 할지사(志士)들이 더 많이 필요했다.
원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이성휘의 말에 조조는 불편한 내색을 내비치면서도,
그의 말에 일부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 * *
속 시원하게 답을 들으려 한다.
어째서 내게 망신을 준 것인지,
원소의 주장처럼 이복오라비인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흑산적 토벌을 막아선 것인지를.
하진은 시위(侍衛)들과 함께 분개에 찬 걸음을 걸으면서 황후의 침전인 가덕전(嘉德殿)에 도착했다. 궐문밖에서 시위들을 둔 뒤, 가덕전 궁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홀로 전각 안에 들어섰다.
“어째서 흑산적 토벌을 막아선 것이냐. 놈들은 북방의 후환이다. 한나라 13주를 모두 도탄에 빠트렸던 장각과 그 형제들과 다를 바 없는 악적이란 말이다!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여 이 나라에 법도와 치국이 여실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거늘!”
하진이 크게 일갈하면서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이복누이의 반대를 힐난했다.
그에 하희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 감히 황상을 대신하여 국사를 도맡은 내게 하대하는 것인가! 대장군의 눈에 아직도 내가 누이로 보이겠으나, 나는 한나라의 태후이자 섭정을 행하는 황실의 최고 어른이다! 말을 고치도록 하라!”
도리어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면서 쏘아 보는 하희의 행동에,
하진은 당장에라도 분탄하고 싶었지만 애써 들끓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송구하옵니다….”
신경전에서 한 발 물러나듯,
하진이 고개를 숙이면서 이복누이에게 자기 언행을 사과했다.
“허나 황실과 조정을 향한 소신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폐하의 치세를 위해서라도 흑산적과 십상시는 천하에 사라져 마땅한 대역죄인이자 역신들이옵니다! 소신에게 전쟁의 전권을 일임하여 주신다면 기꺼이 나서서 황실과 조정을 간악한 무뢰배들로부터 지켜낼 것이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내몰린 충신지사처럼 자신을 포장하는 하진의 외침에도,
태후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군권을 기반으로 한 영향력을 황실과 조정, 그리고 지방에 행사하는 하진을 제2의 양기… 이복오라비를 역신(逆臣)으로 취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자기 이복오라비를 견제하기 위해 십상시와 손을 잡았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터.
부패와 탐욕의 대명사로 한나라에서 그 악명을 떨친 십상시와 손을 잡아야 할 정도로 이복오라비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장군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낙양으로 진군하는 동탁과 정원의 군단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대장군부에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할 것을 명한다.”
이복누이의 강압적인 명령에 하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를 빠득 갈았다.
무려 15년 동안 나라에 충성했다.
이복누이를 태후의 자리에 앉혔으며 애지중지하던 조카를 황제에 옹립하였다.
나는 새 황실을 여는 데 있어 혁혁한 활약을 한 일등 공신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무도한 역신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낭중(郎中)으로 처음 출사한 이래로, 단 한순간조차도 감히 역심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태후와 지금의 폐하를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심정으로 섬기면서 천하를 거머쥐게 해드렸습니다! 헌데 어찌 이 오라비의 충정을 몰라주시고 십상시 같은 간악한 무리들을 가까이하신단 말입니까!!”
하씨 가문의 천하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들을 해 오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기에 울분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충성을 다한 오라비를 배척하고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십상시를 비호하는 행동에 저항의 뜻을 내비쳤다.
* * *
천출 놈이 지방 군단들을 낙양으로 불러들이려 하고 있다.
우리를 죽이려 함이 분명하다.
흑산적 토벌을 명분으로 우리들까지 모두 한꺼번에 소탕하려는 속셈이다.
대규모 군사행동을 계획하는 대장군부의 행동에 하태후의 그늘 아래에 숨어 있던 십상시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죽을 위기에 내몰렸다고 생각한 십상시들은 도리어 하진을 죽일 궁리하기 시작했다.
“병주목 동탁과 무맹도위 정원이 이끄는 군단들이 낙양으로 입성하기 전에 거사를 치러야 하오! 상군교위 건석이 그러하였듯…, 하씨 일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봐야 할 때가 아니겠소!”
행동파 대장처럼 나선 태감(太監) 단규의 저돌적인 주장에 환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심정으로 대장군과 휘하 장군들을 주살해야 한다.
건석의 난이 진압된 이후부터 대장군부에게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모든 권력과 재물들을 빼앗겼던 십상시들은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크게 분개하는 상태였다.
“태후의 조서를 꾸며 죽여 버립시다! 장양 어르신의 자제께서 하태후의 여동생과 혼인을 한 몸이니 직인(職印)을 슬쩍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검객들을 동원하여 놈을 치겠소이다.”
환관 장공의 말에 후람이 대답했다.
검술에 능한 검객들이 많다며,
후람은 검객들을 궁궐 호위병으로 위장시켜 잠입시킨 뒤에 하진의 배후를 급습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다음일세. 하진을 죽여 천하의 대의를 바로세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나 궁궐을 장악하고 낙양을 점거하는 일 또한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진을 죽여 후환을 제거하자는 환관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장양이 입을 열었다.
늙은 여우가 입을 열자,
두 눈을 살의로 번뜩이고 있던 여우들이 입을 다문 채 경청했다.
“하진을 궁궐로 불러들여 참하는 즉시, 소부(少傅) 허상을 하남윤(河南尹)에 임명하고 전(前) 태위(太尉) 번릉을 사례교위(司隸校尉)에 임명하여 낙양을 점거하게. 나는 황제와 태후를 겁박하여 하진 일파를 역적으로 규정한다는 조서를 손에 넣을 것일세.”
지금까지 기회를 노려온 것처럼,
하씨 일가의 천출들이 반목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장양은 궁궐과 낙양을 동시에 점거하여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장양의 계획에 환관들은 크게 감탄하면서 하씨 일가의 천하를 끝날 때가 머지 않았음을 느꼈다.
하진은 이복누이와의 갈등으로 인해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는 상태였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다.
환관들은 모두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나라 황실을 주무르면서 정치권을 장악해왔던 거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회를 포착하고 그 틈을 노리는 것이 매우 능수능란했다.
“부곡장(部曲長) 오광은 저돌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기에 그리 경계할 것 없소. 가장 큰 문제는 하진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사례교위 원소와 종사중랑과 하남윤을 겸임하는 왕윤일 것이오.”
궁궐과 낙양을 점거하기 위해선 허상과 번릉이 각자 하남윤과 사례교위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도 대장군부의 핵심인사들인 왕윤과 원소를 어떻게든 반드시 참살해야 했다.
“내가 원가의 년을 죽이겠소이다.”
“나 또한 나서겠소. 청류파의 유자랍시고 떠들어 대는 왕윤은 물론이거니와 하진에게 빌붙어 감히 우리를 핍박했던 더러운 갈보 년을 죽이겠소.”
상악감(上樂監) 고망. 상시(常侍) 율숭.
그들은 대장군부의 참모였던 원소에게 많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꺼이 원소를 죽이겠다며 나섰다.
대장군부에 권력을 빼앗기게 되면서 많은 사병들을 빼앗겼지만 잘 훈련된 정예병만큼은 사냥꾼으로 위장한 채 낙양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원소를 척살하겠다며 호기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원소와 왕윤을 죽여 궁궐과 낙양을 점거한 뒤, 황제와 태후의 조서를 발표하여 하진의 예하들을 모조리 추포한다면 대장군부는 머리 잃은 이무기에 불과하게 될 것 이외다! 설령 동탁과 정원이 낙양으로 달려온다고 하더라도 황명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니 전혀 걱정할 것이 없소!”
중상시(中常侍) 조충이 두 팔을 뻗으면서 환관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하씨 일가의 천하를 무너뜨리자.
그리하여 우리 환관들의 천하를 다시 세우자.
대장군부의 알력과 억압으로 인해 권력의 중추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 환관들은 천출 일가에 당했던 굴욕을 곱씹으면서 복수를 부르짖었다.
“역신 양기를 죽였던 우리가 아닌가!”
“하진은 제2의 양기다! 황실의 외척이라는 신분으로 국사를 전횡하고 황실과 조정을 기만하고 있으니 역신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천출 일가가 세운 황제를 폐위하고 발해왕 전하를 옹립합시다! 발해왕을 옹립하면 적잖은 청류파 인사와 지방 유자들이 옹호하고 나설 것이니, 여론을 쉽게 손아귀에 쥘 수 있을 것입니다!”
여우들이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흉계를 속삭이면서 때를 기다렸다.
하진을 죽여라!
원소와 왕윤을 죽여라!
천출에게 빌붙어 전횡을 펼쳤던 대장군부의 장군들 또한 모두 죽여라!
천출 놈들에게 잠시 빼앗겼던 천하를 다시 되찾기 위해,
여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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