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조군으로 천하통일까지-23화 (23/616)

23화

==========================

부황의 부고조차도 모른 채,

궁궐에 연금되다시피 했던 유협은 이복오빠의 도움을 받아 상복을 입고 숭덕전으로 행차할 수 있었다.

상복을 입은 유협이 모습을 드러내자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거짓 눈물을 흘리던 황실 종친과 고관대작들은 크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상 연금 상태였던 발해왕 유협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예상치 못했을 뿐 더러, 황태자와 함께 숭덕전으로 행차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자!”

한나라의 황후,

이제 태후(太后)에 오르게 될 하희가 크게 소리쳤다.

대체 어째서 왕미인의 소생을, 황위계승의 정통성을 가장 위협하는 화근을 불러들인 것에 대하여 아들의 잘못을 힐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붕어하신 부황께서는 생전에 협을 가장 총애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부황께서도 협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정론을 내세우는 아들의 모습에 하희는 입술을 꾹 깨물어야 했다.

어째서 밉살스러운 왕미인의 소생을 진심으로 아끼는지, 진심으로 누이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며 속으로 크게 한탄하였다.

‘저 계집아이가 부황의 부고에 끝내 참석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정쟁의 도구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을! 어찌하여 태자는 이 어미의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는 것이냐! 모두 너를 위하여 행하고 결단하는 것을 어찌 이리도 몰라!’

효(孝)와 의(義), 그리고 인(仁)를 가장 중요시하는 한나라에서 불효(不孝)는 가장 큰 결점이다.

그래서 하희는,

악성전에 끝까지 소식을 숨김으로서 유협이 숭덕전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만일 유협이 끝내 오지 못했다면 이는 불효를 범한 것이기에, 장차 정치 세력을 얻게 될 유협을 공격하기 좋은 정쟁거리로 이용할 수 있었으리라.

모두 황태자를 위한 안배였다.

가장 큰 화근인 유협을 짓밟기 위한 술수,

왕미인의 소생이 감히 황위 계승을 노리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결점이었다.

그러나 유변은 이복누이를 위해,

황위 정통성의 입지를 크게 드높일 수 있었던 안배와 술수를 거부했다.

“부, 부황…!! 어찌하여… 어찌하여 소녀를 두고 떠나셨습니까!!”

작은 황녀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면서 눈물을 쏟아 냈다.

두 눈망울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여자아이가 내지른 외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절절하고 애달픈 오열로 숭덕전에 모인 황실 종친과 고관대작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직 어리신데 안타깝기 그지없군.”

“분명 황태자 전하의 말씀대로 황상께서는 발해왕 전하를 가장 총애하셨지.”

당장에라도 정신을 잃고 혼절할 것처럼 크게 울음을 터트리는 여덟 살 황녀의 모습에,

고관대작들은 숙연함에 찬 반응을 보이면서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간교한 계집 같으니라고….’

그저 안타까워하는 고관대작들과는 달리,

유협이 오열하는 모습을 두 눈 부릅뜬 채로 노려보던 하희는 지독한 모멸감을 곱씹고 있었다.

유협의 친모였던 왕미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 어미와 하는 짓이 똑같았다.

세상 불쌍한 척 행동하면서 남들의 동정과 연민을 받으려는 행동이.

아양을 떨며 총애를 얻어냈고,

그를 이용하여 황후의 자리까지 넘보려 했던 사특한 계집이었다.

진심으로 슬퍼하여 우는 것인지, 아니면 제 어미처럼 동정과 연민을 받으려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희의 눈에 그 모습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 * *

언니가 어째서 이 남자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성휘의 옆모습을 힐끗 쳐다 보면서,

노골적으로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용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서도….’

적들을 가차 없이 유린했던 광경을,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피투성이의 현장에서 창검을 휘두르면서 날뛰었던 이성휘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설마 나를 공격하진 않겠지?

평소 마음에 안 들었다느니…. 뭐, 이런 이유들을 대면서.

“이제 어떻게 될 것 같은가요? 황태자가 새로운 천자로 즉위하시게 되면.”

조홍이 물었다.

그의 의중이 궁금했기 때문에,

또한 지금까지 언니를 보좌했던 그의 안목과 식견을 알아보기 위해 짐짓 물음을 던졌다.

“십상시와 대장군부가 본격적으로 부딪치게 될 겁니다.”

이성휘가 대답했다.

그 말에 조홍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어째서죠? 십상시는 모든 권력을 잃고 몰락해 버리고 말았는데. 대체 무슨 힘이 있다고 대세를 거머쥔 대장군부를 상대로 칼끝을 들이밀겠어요? 그 방울 없는 것들은 힘 있는 위정자에게 굴종할 줄만 알지, 대세를 상대로 맞설 용기가 없어요.”

황제에게 엎드려 부와 권력을 갈취하면서 빌붙었던 그 쓰레기들이 감히 대장군부를 상대로 적의를 드러내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조홍은,

자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을 한 이성휘에게 의구심을 느끼게 되었다.

‘뭐지? 소황문(小黃門) 곽승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협박해서 건석이 반란혐의를 꾸몄다는 증거를 받아 냈을 때는 분명 제법 총명한 것 같았는데…. 완전히 헛다리를 잡고 있잖아?’

그리고 그 의구심은,

이성휘의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이제 곧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조홍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는 듯, 이성휘가 말을 덧붙였다.

그에 조홍은 자기 내심이 읽혔다는 것이 불쾌했는지 입술을 삐죽 드러내면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홱 하고 빼앗긴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인데….’

이성휘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 상념에 빠졌다.

황태자 유변이 즉위한 뒤,

대장군부 세력에 짓눌려 시름하던 십상시들은 결국 거사를 모의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십상시의 난. 대장군 하진을 시해하고 황궁과 궁궐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대미문의 대혼란이 낙양에서 벌어지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한나라의 중앙 통제력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난세를 막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십상시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될 하진의 신변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조는 평생 대장군부의 맹견 노릇을 하다가 그 쓰임새를 다하게 되겠지….’

일 전에 조조에게 말한 적이 있다.

환관 집안의 손녀가 정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구태(舊態)를 떠안고 있는 양대 세력권인 십상시와 대장군부가 모두 공멸해야 한다고.

부와 권력을 점거하는 세력들을 모조리 박살 낸 뒤,

그 잿더미 위에 깃발을 꽂고 새롭게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상념의 늪에 푹 빠져 버린 이성휘의 모습에,

조홍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조조와 매우 닮은 용모인 조홍이 붉은 눈동자를 익살스럽게 반짝이면서 얼굴을 들이밀자 이성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방금 한 말 들었어요?”

“아, 죄송합니다….”

“흥.”

대체 무슨 심사숙려를 하고 계셨기에 바로 옆에서 하는 말조차 듣지 못한 걸까,

언니의 가장 큰 총애를 받고 계신 분께서!

조홍이 콧방귀를 끼며 쌍심지를 켰다.

자신을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했는지,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화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처럼 귀엽고 아름다운 미녀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감히 딴생각을 뒀다고? 아주 복에 겨우시네. 이것도 다 언니의 총애를 받아서인가? 어차피 결국 언니의 총애는 나를 향하게 될 텐데!’

벌써 2인자 자리를 견제하려는지,

조조에게 가장 큰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성휘를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 대장군부에서 공식적으로 황상의 부고를 발표하고 즉위식 준비에 박차를 가할 겁니다. 이제 계획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거칠 것이 없겠지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황태자가 새로운 황제에 즉위하게 되면 황후는 태후가 되는 거잖아요. 몹시 심기를 거슬리게 만든 어느 누구에게 그 화를 풀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습니다.”

“예? 방금까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게 자기 신변문제 아니었어요?”

멀리 떨어진 문제를 고심하느라 당장 발등을 찍을지도 모르는 문제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홍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발해왕 유협의 목숨을 구함으로서 황후와 대장군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것을 떠올렸다.

“기도위!”

조홍과 함께 옥당전과 영대전 주변을 순찰하고 평성문으로 향하던 이성휘에게 휘하 무관이 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사례교위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금발의 여인을 떠올리게 되었다.

황금을 뜨거운 열에 녹여서 실을 뽑아낸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여인.

사례교위 원소.

조조와 함께 서원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대장군부로부터 사례교위에 임명된 원소가 찾아온 것이었다.

“…사례교위?”

특기가 고변이며,

취미가 고자질이었던,

조조의 일름보를 담당하는 조홍이 무관의 말을 듣고는 이성휘를 힐끗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용무로 원소가 이 남자에게 찾아온 것일까. 조홍의 붉은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사실관계를 크게 파헤칠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 계셨네요.”

조홍의 맹렬한 시선을 받고 있을 때,

금발의 여인이 사뿐사뿐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이성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에 이성휘는,

조홍의 감시를 받으면서 원소를 만나게 되었다.

* * *

숭덕전 앞에 모였던 인원들이 해산했다.

간신히 짜낸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며,

지금까지 통곡하고 오열했던 모습이 거짓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듯 숭덕전 앞에서 눈물을 쏟아 냈던 하진은 매우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종이와 먹을 가져오게.”

대장군부의 집무실에 도착한 하진은 즉시 무관에게 종이와 먹을 주문했다.

먼 곳에 서찰을 보내야 할 일이 있는지,

하진은 종이와 먹을 주문하면서도 먼 곳으로 서찰을 보내는 임무를 맡길 전령들을 준비시켰다.

‘황상이 죽고 황태자께서 새 만승천자에 오를 것이나 여전히 조정 내부에는 나를 반대하는 늙은 고관대작들이 버티고 있다. 그 늙은이들을 찍어누르기 위해서는 낙양을 포위하여 무력시위를 할 군사들이 필요한 실정이다.’

황제의 바짓가랑이에 빌붙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십상시를 권력가도에서 실각시키는 일은 매우 수월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달랐다.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십상시와는 달리 조정대신들은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는 청류파 인사였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내정을 관할하는 조정을, 내정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조정대신들을 말 잘 듣는 개로 길들이기 위해선 지방에서 군권을 지휘하는 장수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령들은 있는가.”

“예,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었사옵니다.”

서찰을 모두 작성한 뒤,

하진은 문 너머에서 대기하는 전령들을 들어오게 했다.

하진이 전령들에게 건넨 서찰은 총 두 장이었다. 두 장의 서찰들을 전령에게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이 서찰은 양주(凉州) 농서군(隴西郡)의 병주목에게 전달하고, 이것은 병주(并州) 태원군(太原郡)에 있는 무맹도위에게 전하거라.”

“알겠사옵니다.”

그에 전령들은 대장군 하진이 건넨 서찰들을 각자 받아들면서 고개를 숙였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