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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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하후돈을 보내어 이성휘에게 부름을 내렸지만 결국 오지 않았다.
어째서 오지 않은 걸까.
그대를 한없이 연모하는 상관이 불렀거늘.
아슬아슬하게 타오르는 등잔 위의 불씨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흑발의 여인은 마치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청승을 떠는 아내를 연상시키는 처량한 두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설마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 없다. 내 부관이 된 이후에도 사람을 붙여 일거수 일투족을 몰래 감시하지 않았던가. 발해왕, 남자에게 아양 떨기를 좋아하는 천박한 계집아이 말고는 달리 접근한 상대도 없었을 터인데.’
상대는 겨우 여덟 살짜리.
게다가 황후와 대장군의 견제와 감시를 받는 신세였다.
언제 죽임을 당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은 파리 목숨이 아닌가.
그렇기에 조조는 유협을 경계하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는 황제마저 죽게 되면 천애 고아가 될 뿐인, 자신을 지켜 주는 모든 후견인들을 잃은 채 정적들에게 죽어갈 뿐인 그런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언니! 언니!! 큰일 났어요!!”
우당탕,
장지문 너머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급히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
조조의 눈길이 문 너머를 향했다.
“아악!”
철퍼덕,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아래로 쓰러졌다.
분명 미끄러운 나무 바닥에 넘어진 것이리라. 만약 발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면 나무 바닥에 넘어질 위험성이 더욱 높았겠지.
“드, 들어가도 될까요?”
조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조조는 조홍에게 출입을 허락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벽에 부딪힌 이마를 쓱쓱 문지르고 있는 조홍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나무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벽에 이마를 받아버린 듯했다.
“죄송해요, 조금 미끄러워서.”
조홍은 버선을 신고 있었다.
그를 본 조조는 자기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지, 자렴.”
조조가 물었다.
그에 조홍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급한목소리로 조조에게 소리쳤다.
“지금 궁궐이 발칵 뒤집혔어요! 당장 궁궐로 입궐해야 할 것 같은데요?!”
“비상령이 떨어진 것인가.”
“아뇨, 아직은 아닌데…. 곧 대장군부에서 모든 제장들이 소집될 것만 같아요. 제가 궁궐 궁인에게 들은 내용이 사실이라면요.”
조조가 들은 내용을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손짓하자 조홍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발해왕 유협이 기거하는 악성전에 자객들이 침입했다고 해요! 지금 악성전이 온통 피바다라고 하던데요?”
“황후의 짓이겠군. 아니면 대장군의 소행이거나.”
둘 다 꾸민 소행일지도 모르고.
야심한 새벽을 노려 자객들이 습격했다.
악성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분명히 하씨 일가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너무 노골적인,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씨 일가가 독한 마음을 먹고 살수들을 동원하였다면 발해왕은 필시 죽었겠군. 분명 악성전을 호위하던 병력들은 대장군부 휘하의 금군이지 않나.”
“아뇨, 발해왕은 무사하다고 해요.”
“…뭐?”
대장군부가 독한 마음을 품고 검을 빼 들었다면 필시 여덟 살짜리 황녀의 목숨을 거뒀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한 조조의 말에 조홍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발해왕이 무사하다는 대답에 조조의 시선이 조홍을 향하게 되었다.
“어떻게.”
대장군부가 보낸 살수들이 분명하다면,
차디찬 칼날 아래에 작은 황녀의 목숨은 덧없이 사라졌어야 했다.
조조가 해답을 요구하듯 조홍을 바라보았다.
그에 조홍은,
“그, 그게….”
악성전에서 벌어진 진의를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는 조조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자신이 궁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고하기 시작했다.
* * *
서른 명이 넘는 살수들이 단 한 명의 무관에게 모두 살해당했다.
소식이 궁궐을 타고 널리 알려졌다.
마치 영웅의 무용담에서나 등장할 법한,
과장들로 온통 뒤섞인 민담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건이 새벽의 장막을 꿰뚫으면서 낙양과 그 주변 일대까지 모두 크게 들썩이게 만들었다.
“악성전이 모두 피바다라고 하네.”
“서른 명에 달하는 살수들을 혈혈단신으로 모두 추살하다니…. 마치 용저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군.”
무관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발해왕 유협이 기거하는 악성전이 살수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에 비상령이 떨어졌다.
그들 중 일부가 도망쳤다고 한다.
급히 소집된 금군 병력은 궁궐을 이 잡듯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첫닭이 울지도 않은 이른 새벽이었음에도 궁궐은 수색에 동원된 무관들로 북적북적하게 되었다.
“그대가 모든 살수들을 처리한 것이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른 새벽녘,
수색에 동원된 모든 장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시각.
악성전을 습격했던 모든 살수들을 도륙내는 전과를 기록한 이성휘는 대장군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군부의 수장이자 한나라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 하진과 휘하 장군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악성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아무래도 서른 명에 달하는 살수들을 모두 처리한 것이 사실인 모양이군. 두 팔로 척추까지 박살 내버렸다지….’
중앙의 상석에 앉은 하진은 턱을 괸 채로 이성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괴물이다.
어떻게 혈혈단신으로 서른 명에 달하는 노련한 정예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살수들을 직접 조련한 인물은 다름 아닌 부곡장 오광이다. 오광의 휘하라면 모두 일당백의 전력을 자랑하는 날래고 무자비한 살수들이었을 터.
하지만 그날래고 무자비한 살수들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당한끝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크흠! 무도한 간적들로부터 발해왕 전하를 지켜냈다면 이는 상을 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대장군부에 이런 용장(勇將)이 있었을 줄이야. 인재들을 두루 배치하여 안배를 마련하신 대장군의 홍복입니다.”
휘하 장군들은 발해왕 암살을 승인한 인물이 대장군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이성휘의 공을 치하하면서 하진을 치켜세우기 바빴다. 휘하 장군들의 감언이설에 하진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려.”
하진은 이성휘에게 불편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경직된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큰 공을 세운 이성휘에게 관직을 올리고 포상을 내리겠다는 등의 약속했다.
발해왕을 죽여 황태자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겠다는 하씨 일가의 거사를 무산시킨 놈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촉새 같은 궁인들이 저놈을 용저라고 부른다지?’
그것이 가당찮다는 듯,
하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용저라니.
초나라의 맹장, 용저를 논한단 말인가.
우스운 일이다. 저놈을 용저에 비견하다니. 왜, 차라리 초패왕이 살아 돌아왔다고 떠들지.
자신이 계획한 거사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놈에게 찬사를 보내는 궁인들의 방정맞은 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를 용저라고 치켜세우는 소문에 불쾌감을 느꼈다.
“대장군!”
심문, 혹은 질의를 하고 있을 때.
문이 좌우로 열리면서 젊은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우 앳된 소년이었다.
기껏 해야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용모.
소년은 자신이 매우 고귀한 신분임을 알리듯이 금실로 수를 놓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태자 전하!”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하진은 물론, 좌중의 모든 장군들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한나라를 대표하는 군부 장군들이 있는 대장군부에 왕림한 황태자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순하고 유약한 성정의 황태자가 험악한 인상의 장군들이 모여 있는 대장군부를 방문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숙부, 우리 협을 구해 준 은인이 있다기에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황태자 유변이 들뜬 목소리로 예를 취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이성휘를 보고서 발해왕 유협을 구한 무관임을 직감하였는지 화색을 띄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크흠.”
기쁨에 들뜬 황태자의 모습에 하진은 헛기침하며 불편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이 숙부의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영악하고 교활한 성정의 누이동생의 태중에서 나온 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하고 유순한 성품을 가진 황태자는 자기 이복누이를 구해 준 이성휘에게 순수한 호감을 드러냈다.
‘전하! 그놈은 전하의 앞길을 가로막은, 전하의 입지를 가장 위태롭게 만들 발해왕 유협을 구한 놈이란 말입니다!’
이성휘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황태자의 모습에 하진은 답답한 마음을 담아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결코 입을 열 수 없었다.
황태자가 크게 기뻐하는 이 순간에,
좌중 장군들 또한 이성휘의 공을 치하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악성전에 살수들을 보낸 흉수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다.
그렇기에 하진은 불만을 애써 삼킨 채,
조카를 애지중지 아끼는 숙부의 모습을 하고 황태자에게 입을 열었다.
“오셨사옵니까, 황태자 전하. 어찌 기별도 주지 않으시고….”
“무도한 자들로부터 동생을 구한 무관이 대장군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 오라비로서 동생을 구한 은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용력이 매우 출중한 무관이 수십 명이 넘는 살수들로부터 발해왕과 궁인들을 지켜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변은,
자기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그 용력이 출중하다는 인물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대장군부에 왕림한 것이었다.
“협을 구해주어 진심으로 고맙다. 내 이름을 걸고서 무엇이든 들어 줄 터이니 기탄없이 나에게 말하도록 하라.”
황태자가 호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 이성휘에게 말했다.
이제 곧 황제로 즉위하게 될,
머지 않아 한나라의 지존으로 등극하게 될 황태자는 살수들을 보낸 흉수가 보는 앞에서 그 살수들을 모두 추살했던 무관을 향해 무엇이든 들어 주겠노라는 매우 과감한 제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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