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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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비명이,
그리고 칼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금속음조차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소쩍새의 울음소리와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어, 어떻게 됐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로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끝나기만을 빌었던 환관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소리가 멎었다.
지금까지 밖에서 들린 그 끔찍한 소리가 모두 허영이었다는 것처럼,
죽어 가면서 내질렀던 남성의 단말마를 끝으로 바깥이 조용해졌다.
“전하.”
쿠당탕!
외부의 충격으로 반쯤 박살 났던 문이 강제로 벌컥 열리면서 온몸에 피칠갑한 남성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옷이 온통 넝마가 된 채,
온몸에 적잖은 부상들을 입은 무관이 두 눈을 번뜩이면서 처소 안으로 발걸음을 들였다.
“무사하십니까.”
위태롭게 흔들리는 두 다리를 애써 움직이면서 처소 안으로 들어온 남성이 유협의 안위를 물었다.
얼굴에도 온통 피칠갑하고 있어,
그 모습을 자세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목소리를 통해 이성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도위, 바깥의 흉수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외부의 천적들로부터 아기새를 지키려는 어미새처럼 유협을 품에 안고 있던 궁녀가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답했다.
“일부 잔당이 도망쳤습니다만…, 악성전을 도모하려 했던 놈들은 거의 처리했습니다.”
후우, 이성휘가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벽면에 몸을 기대었다.
온몸에 입은 부상들이 심상치 않았다.
급소를 피했지만 계속 놔뒀다간 상처가 덧날 게 분명했다.
그를 본 유협이 벌떡 일어났다. 궁녀들의 제지에도 몸을 일으킨 유협은 종종걸음으로 이성휘에게 다가가 두 팔을 뻗으면서 그의 몸을 살폈다.
“부, 부상이 심하구나….”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 없다! 그대는 숨기지 말고 고하거라!”
그저 괜찮다고 말할 뿐인 이성휘의 행동에 유협은 짐짓 분노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갈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에,
이성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유협을 쳐다보았다.
“그럼 혹시 붕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도록 하라!”
이성휘의 물음에 유협이 다급한목소리로 대답하면서 궁녀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어서 붕대와 경고(硬膏)를,
시급히 치료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유협의 외침에 계속 두려움에 떨었던 궁인들이 그제야 벌떡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바깥으로 나선 환관이 비명을 내질렀다.
떨리는 손으로 장지문을 열며,
처소 바깥에 나선 환관이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우웨엑!!”
그리고 대뜸 고개를 숙이면서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지문이 열리면서 드러나게 된 매우 끔찍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온통 핏물이오,
처참하게 죽은 이들의 주검이 가득하다.
목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들이 바닥에 툭 떨어져 있는 것은 물론, 기괴스러울 정도로 허리가 뒤로 꺾여 버린 시체도 있었다.
도합 30여 명이 넘는 살수들이,
단 한 명의 무관에게 모두 살해된 채로 싸늘한 주검이 된 채였다.
“우우웁!!”
처소 안에 있던 궁녀들도 구역질을 느꼈는지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코를 찌르는 역한 쇠 비린내,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비릿한 냄새는 분명 지독한 혈향이었다.
악성전 궁인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이성휘가 나서서 막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저 지옥도의 주인공이 되었을 테니까.
처참하게 죽은 살수들의 모습을 통해 궁인들은 악성전에 드리웠던 죽음의 공포를, 자신들이 죽다 살아난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미, 미안하다…. 그대가 나 때문에….”
유협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성휘의 몸을 두 손으로 살폈다.
새하얀 손이 핏물로 물들어감에도,
자신으로 인해 이성휘와 악성전 궁인들이 죽을 뻔했다는 자책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없었다면.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차라리 옛적에 죽어 버렸다면.
이러한 비극이. 이러한 위기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터인데.
자기 존재가 재액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악성전의 모든 궁인들을 죽음의 위기에 몰아 넣었다는 생각하게 된 유협은 피투성이가 된 이성휘에게 연이어 사과하면서 지금까지 꾹 누르고 있었던 괴로운 감정을 토해냈다.
“무사하시어 다행입니다.”
이성휘가 말했다.
진심을 담아,
작은 황녀가 무사함에 안도했다.
나는 말재주가 없어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여자가 울고 있을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작은 황녀의 모습에 그저 진심을 담은 말을, 그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간결한 말을 전달했다.
“읍…!”
작은 황녀가 와락 안겨들었다.
다람쥐처럼 작고 귀여운 황녀가 품에 들어오자, 이에 놀란 듯 이성휘가 침음을 흘렸다.
고운 의복에 더러운 피가 묻었다.
아름다운 나비와 꽃들을 황금을 녹인 금실로 수놓은 의복에 붉은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그에 이성휘는 품에 안긴 유협을 떼어내려 하였으나, 두 팔로 힘껏 안긴 황녀는 결코 꿈쩍하지 않았다.
“의복이 더러워지십니다.”
“상관없다!”
감정이 복받친 황녀에게,
의복을 걱정하는 이성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앙증맞은 손으로 자기 옷소매를 꾹 붙잡은 유협의 모습에 이성휘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황녀의 부드러운 금발에서,
따스함이 감도는 금발이 뺨에 접촉할 때마다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포근한 향기를 맡았다.
“나를 구해 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거늘…, 의복이 더러워진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결코 개의치 않는다.”
품에 안긴 황녀에게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죽음의 냄새에 대비되는,
금속의 차가움에 감히 비할 바가 못 되는,
작은 황녀의 따스함이었다.
* * *
손아귀에 땀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했던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누이동생을 십상시 일파에게 바쳤을 때?
아니,
아니다.
황건적의 반란이 발발하였을 당시,
당시 하남윤(河南尹)이었던 자신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반란군 진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됨과 함께 군부의 수장인 대장군에 등위하였을 때만큼 긴장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얼마나 떨었던지.
여름 매미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던 게 기억난다.
‘군사에 전혀 소질이 없었던 내가…, 황상의 총애를 받고 대장군에 임명되었지. 청류파 인사들이 모두 황보숭을 대장군으로 천거하였을 때, 오직 황상께서는 나를 고집하여 대장군에 앉히셨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을 기만하고 위협하는 무뢰배들을 처단하라는 분부와 함께.’
깊은 칠흑이 드리운 새벽,
하진은 하나의 등불만을 켠 채 소식을 기다렸다.
악성전을 습격한 살수들이 발해왕 유협을 참살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만을.
침소에 든다고 한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에 하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악성전에서 낭보가 전해지기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고작해야 여덟 살 계집아이의 목을 취하는 것이지 않나! 지금까지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했던 것처럼, 어서 빨리 결과를 알려주지 않고 뭘 꾸물대고 있는 것인지!!’
초조함은 곧 답답함이 되어,
불안에 휩싸였던 마음은 짜증 섞인 분노를 토해내면서 하진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서 빨리 소식을 가져와라.
우리 황태자 전하의 가장 큰 정적인 발해왕을 참살하였노라고.
이제 두 번 다시 발해왕 때문에 걱정할 일 없을 것이라고 어서 한나라의 대장군인 나에게 소식을 가져오란 말이다.
‘당연히 성공했겠지…. 지금쯤 발해왕을 도모한 뒤에 복귀하고 있을 터. 내가 너무 초조하여 흥분하고 말았군. 노련한 살수들을 모두 투입시켰는데 어찌 여덟 살짜리 황녀 하나 못 죽이고 실패할까.’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장지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왔다.
대장군부 전각들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잉어들을 키우는 연못과.
각종 귀한 화초들을 키우고 있는 정원.
하진은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정원을 계속 돌면서 근심을 떨쳐 내고자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정원을 계속 돌면서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불안감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대장군!”
고민을 애써 떨쳐 내려 하고 있을 때,
이른 새벽의 적막을 깨듯이 날카로운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점군사마(點軍司馬) 장장이 휘하 무관들과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번 거사에 대해서 아는 인물은 자신과 누이동생, 거사를 처음 계획했던 부곡장 오광뿐이다. 점군사마 장장은 오랜 세월 대장군부에서 활약한 무관이나 이번 거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갑자기 달려온단 말인가.
“악성전에 흉악한 자객들이 급습한 모양입니다! 지금 악성전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아, 악성전 말인가…!”
장장의 보고에 하진이 두 눈을 떨면서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발해왕의 생사여부를 알아야 했다.
원래는 자객들을 휘하에 둔 부곡장 오광에게 보고를 들어야 했지만, 하진은 점군사마 장장에게 발해왕 유협의 생사여부를 듣게 되었다.
“발해왕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 그게…, 사실인가…! 무사… 하시다고?”
“그렇습니다.”
발해왕 유협이 자객들의 습격에도 무사하다는 장장의 보고에 하진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 했건만,
노련한 살수들을 모두 투입시켰음에도 발해왕이 무사하다는 보고를 듣고 상실감과 허탈함을 차마 주체할 수 없었다.
정예들을 파견했다. 부곡장 오광이 육성한 실력 좋은 자객들을 모두 투입시켰다. 그런데도 여덟 살 황녀를 암살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차마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기도위 이성휘라는 무관이 혈혈단신으로 악성전을 습격했던 자객들을 추살하였다고 합니다.”
“…그건 또 누구인가.”
“건석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무관이 있지 않았습니까.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자진하려 했던 건석을 끄집어냈다는….”
하진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들어 장장의 말을 끊은 뒤,
그대로 손을 흔들면서 장장과 무관들에게 물러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뭐라고? 실패했다는 말이냐!! 겨우 여덟 살짜리 해치우지 못했다니! 그 귀신 같았던 자들이 겨우 한 명에게 막혀 실패했단 말이냐!!’
하진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당장에라도 크게 사자후를 터트리고 싶은 격노를 참아냈다.
참아야 했다.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야 했다.
나는 대장군부의 수장이다.
이제 곧 황제의 숙부가 될 몸이기도 하다.
한나라 황실과 한나라 조정을 수호하는 명신(名臣)으로서 이번 암살사건에 ‘분노’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노골적으로 분노할 수도,
암살을 저지하였다는 기도위라는 놈을 대놓고 공격할 수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니,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감히 궁궐을 습격한 배후세력을, 한나라의 대장군으로서 악성전의 발해왕을 도모하려 한 놈들을 발본색원하여 모두 척결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해야만 했다.
‘죽여 버리겠다, 이놈…!!’
하지만 그런데도,
속을 뒤집어버릴 정도의 격노만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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