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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으로 천하통일까지-16화 (16/616)

16화

이성휘는 발해왕 유협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녀의 서찰을 숭덕전의 환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 뒤,

숭덕전의 소식을 전해주겠다는 두 번째 약속내용을 지키고자 발해왕 유협이 기거하는 악성전의 궐문을 넘었다.

악성전에 출입한 이성휘의 행동에 대장군부 무관들은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그가 대장군부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이 되 침묵으로 일관했다.

“부황께서, 많이… 편찮으시다고…?”

기품이 넘치는 금발의 작은 소녀가 침울함을 머금은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읏!”

조금의 배려도 없는 그의 직설적인 답변에 유협이 작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에 발해왕 유협의 궁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이성휘를 노려보았다.

숭덕전의 소식을 가져다준 것은 고마우나,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에게 냉혹한 현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지만 유협은 일말의 거짓 없이, 오로지 사실만을 전해준 이성휘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부황의 소식을 일러 주어, 정말 고맙구나….”

유협이 한숨을 깊게 내쉬면서 이성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직 많이 어린데…. 꿋꿋하네. 아니, 애써 꿋꿋한 모습을 보이려는 거겠지. 어릴 때부터 풍파에 휩쓸리게 되면서부터 일찍 조숙해진 건가.’

부황(父皇)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작은 황녀는 울지 않았다.

작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흙바닥을 잠깐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회상하는 걸까. 작은 황녀에게는 분명 기쁜 추억이 존재하지 않을 터. 낳아준 모친은 지금의 황후에게 독살 당했고, 길러준 조모는 대장군 하진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은 이 작은 황녀는,

비극 속에서 태어나 비극 속을 걸었으며 지금도 비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그, 저기 말이다….”

“예, 전하.”

갑자기 말하려다가 말고 입술을 우물쭈물 움직이면서 고민하는 작은 황녀의 모습에,

이성휘가 허리를 숙이면서 경청했다.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유협이 짐짓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이성휘를 불렀다.

직책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자신에게 부황의 소식을 알려 준 이성휘에게 고마움을 느꼈는지,

작은 황녀가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로 이름을 물었다.

“기도위 이성휘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별 성(星)에, 빛날 휘(輝)를 쓰고 있습니다.”

“성휘…. 그런가!”

“예.”

작은 황녀는 이름을 듣고서 무척이나 신기한 듯 행동했다.

자신을 보필해주고 있는 궁인들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같은 시선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새로운 인물과의 만남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놀라워할 정도로,

박해와 모멸 속에 가로놓인 황녀는 타인과의 유대와 관계를 깊게 바라고 있었다.

‘나한테 갑자기 왜 관심을 보이지? 부황의 소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인가? 겨우 그 사소한 이유로 경계심을 풀고 나를 대할 리는 없을 텐데…. 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결국에는 어린아이라는 건가.’

갑자기 말을 거는 유협의 행동에 잠시 이성휘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상대가 겨우 여덟 살인 어린 소녀라는 것을 깨닫고는 의심을 거뒀다.

여덟 살이다.

짐짓 어른처럼 행동하고 기품 있는 언행을 하고 있지만 냉혹하게 사리 분별을 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럼 그대의 출신은 어디인가?”

“홍농군(洪農郡)입니다.”

“오오. 홍농군이라고 하면 그….”

한나라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가문인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였다.

출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에,

이성휘는 사람들이 출신을 물을 것에 대비하여 자기 고향을 홍농군으로 지었다.

“하동군(河東郡)보다 더 서쪽에 있는 군(郡)이옵니다, 전하.”

“그랬었지!”

바로 지척에서 이성휘를 경계하며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궁녀가 귀띔해주었다.

그에 유협이 그제야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낙양 출신이구나.”

“예, 높은 함곡관이 위치한 홍농현에서 태어났습니다.”

게임 세계로 떨어진 지 2년,

그동안 이성휘는 매우 치밀하게 자기 과거를 만들어냈다.

없는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황건적의 봉기로 인해 한나라 전역이 쑥대밭이 된 상황이었던 데다가, 홍농군을 비롯한 사예주 군현까지 이민족의 침입과 황건적의 습격이 되풀이 되면서 대부분의 호적들이 불살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과거세탁… 아니, 과거 조작을 빠르게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연고관계를 매우 중요한 척도로 삼고 있는 한나라에서 일가친척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조조를 만나기 전까지 성문교위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삶에 지장을 줄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황태자 전하를 의지하십시오. 반드시 황태자 전하의 비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인정이 많고 성품이 온화한 분이시니 필시 황녀 전하의 안정을 보장해 줄 겁니다.”

이성휘가 작은 황녀에게 충고했다.

이렇게까지 챙길 이유는 없었지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은 황녀의 금색 눈동자를 볼 때마다 안쓰러움을 느꼈다.

우악스럽게 생긴 대장군부 장졸들에게 억류된 채로 연금이나 다름없는 고립된 생활을 보내는 유협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말았다.

찰나의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하는 것을 가장 기피하던 이성휘였지만, 이 작은 황녀에게만큼은 무정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시, 싫다…!”

새로운 사람과의 대화에 깊은 흥미를 보이던 유협이 대뜸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황태자 유변을 의지하라는 그 말에,

작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섭다! 어찌 믿으라고….”

유협은 황태자를…,

아니, 황태자를 지지하는 그 후견인들을 두려워했다.

작은 황녀는 알고 있었다.

이 차디찬 새장 같은 궁궐에 자신을 가둬버린 사람들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어머니처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 못 믿어…! 믿을 수, 없다! 어찌 그 무도한, 무례한…. 안 돼! 싫다! 그들은, 절대로…, 절대로…!!”

금발의 작은 황녀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린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한 채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마저 보였다.

“제 혓바닥이 감히 황녀 전하의 성심(誠心)을 흐리게 하였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 아니다…! 그대가 나를 걱정해준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니…, 다른 이야기…! 그래, 다른 이야기하자꾸나!”

이성휘가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그에 유협은 머릿속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워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학대와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겠지. 유협은 하씨 일가를 괴물보다도 두려워했고 악몽보다도 끔찍하게 여겼다. 주변 궁녀가 다독이면서 진정시킨 덕분에 유협은 겨우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은 황녀의 귀여운 얼굴이 단순에 공포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본 이성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저잣거리에 알록달록 하게 색을 입힌 알사탕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기꺼이 그 알사탕을 진상토록 하겠습니다.”

“알사탕 말인가!”

방금 전 실언에 대한 답례였다.

이 사소한 답례조차 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던 황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처럼 맺힌 죄책감을 덜어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궁녀가 입을 열었다.

결코 불가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타협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딱 잘라서 말하는 궁녀의 제지에 유협의 축 늘어진 눈썹이 시무룩해진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독이라도 넣을까 그러는 건가? 하긴 유협의 모친인 왕미인이 짐독을 넣은 음식을 먹고 독살 당했으니까 경계할 법도 하지. 게다가 나는 대장군부 무관이니.’

노골적으로 자신을 의심하는 궁녀의 모습에도 이성휘는 결코 불쾌하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유협과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시선을 마주한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씨 일가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아온 악성전의 궁인들이 경계와 적의를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먼발치에서 노려보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너무 괘념치는 말거라. 내 서찰을 부황에 전달해주고 소식까지 알려 준 그대를 나는 믿는다.”

“…….”

서찰을 가져다주고,

소식을 알려 줬다고 해서,

대장군부의 무관인 자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협의 모습에 이성휘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날카로운 비수가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는 것처럼,

마치 양심(良心)이라는 결코 보이지도 않는 덩어리를 뱃속을 갈라 강제로 끄집어낸 것처럼,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황녀의 금색 눈동자를 본 이성휘는 알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 *

하진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사흘 이내에 숨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던 태의령의 진찰 결과와는 달리,

황제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이었다.

‘분명 사흘 안에 죽는다고 했을 텐데!!’

그렇게 크게 소리치고 싶은 하진이었지만,

분에 못 이겨 태의령의 멱살을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다간 스스로 건석 같은 대역죄인임을 자인하는 꼴이었으므로 분을 삭이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대장군, 방안이 있습니다.”

하진이 근심에 못 이겨 한숨을 깊게 토해내고 있을 때,

그의 수하였던 부곡장(部曲長) 오광이 근심에 빠진 하진에게 극단적인 방안을 꺼냈다.

“이 기회에 발해왕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이자는 뜻이다.

오광의 갑작스러운 말에 하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주변을 살폈다.

바깥을 경비하는 장졸들은 모두 자신에게 충성맹세했던 수하였기에 내부에서 나눈 이야기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지만, 하진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면서 혹시라도 새어 나가게 될까 경계했다.

“오광, 당최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장군. 만에 하나라도 황상께서 병석에서 일어나시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여전히 황상의 곁에 환관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건석의 난을 진압한 이후,

본격적으로 실권을 잡게 된 하진은 황제를 보필하던 환관들을 모두 갈아치웠다.

하지만 새로 들인 환관들 또한 믿을 수 없었다. 십상시의 영향력은 사물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와도 같았기에 매번 경계해야 할 정도였다. 숭덕전으로 새로 들여보낸 환관들 또한 십상시의 수족이 아닐까, 하진이 그것을 우려하는 건 당연했다.

“자네의 말은 그러니까…, 갑자기 황상께서 일어나 황태자 전하가 아닌 발해왕을 후계로 정할 위험성이 농후하다는 뜻이군.”

“소장은 그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분명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네. 모든 것들이 순리처럼 술술 풀리고 있다고는 하나…, 경계심을 늦춰선 안 될 일이지.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순간이니.”

하진은 매우 신중한,

돌다리도 두들겨 본 연후에 건널 정도로 신중한 성격을 자랑했다.

오광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던 것은 황상의 총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군부의 수장이라 할지라도 감히 황상의 결정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만에 하나 황제가 벌떡 일어나 발해왕을 후계자로 내정하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황태자를 밀어 주었던 대장군부 처지에서는 닭 쫓던 개가 지붕을 바라보는 최악의 사태에 놓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대세가 이미 저물었으나….

황보숭과 주준, 왕윤 같은 늙은 대신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으므로 황명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은 아무리 하진이라도 감히 하기 어려운 미친 짓이었다.

“대장군께서 준비를 명하셨던 노련한 살수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악성전을 보호하는 대장군부 병력을 철수시킨 틈을 노려 살수들이 궐담을 넘는다면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사흘 안에 죽는다고 확신했던 황제의 수명이 예상치 못하게 계속 이어지면서,

하진은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가 깨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진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병환으로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유변을 못마땅하게 여긴 황제가 황태자 책봉을 미루지 않았던가. 하진이 직접 나선 끝에 결국 황태자 책봉을 성립시킬 수 있었으나 황제의 어심이 황자가 아닌 황녀에게 향하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만약 황제가 일어나게 된다면,

자기 후계자로 발해왕을 지목할 것은 지극히 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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