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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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진압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이성휘는 대장군부로부터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황실 친위대가 휘하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효기교위 조조의 명령을 받아 황궁과 궁궐을 경비하는, 예전의 역할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아무런 말도 없이 슬쩍,
가끔 빤히 쳐다 보면서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조조의 모습에 이성휘가 물었다.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시선이 마주치게 되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때마다 새하얀 뺨에 불그름한 홍조가 그려져 있었다.
“본초가 그대의 무용을 칭찬했네.”
“그렇습니까?”
조조의 말에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가 나를 칭찬했다라….
후일, 하북의 패자로 성장하게 될 인물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었다.
조조와 원소, 훗날에 천하의 패권을 걸고 양립하게 될 관계가 아닌가. 이미 조조의 부관인 신분에서 원소로부터 호의와 관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썩 기분이 괜찮은 결과였다.
“허나 본초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가진 여자일세.”
내가 원소의 이름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자 조조가 갑자기 그녀에게 악평을 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여 본초가 귀관에게 접근하여 갖은 요설을 늘어놓거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게.”
“하지만 중군교위… 아니, 사례교위님은 맹덕 님의 오랜 친우분이 아니십니까?”
“흥. 친우는 무슨….”
내 말에 조조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얼굴로 그를 부정했다.
그 모습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오랜 친우였던 조조와 원소의 교우관계가 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기 시작하는 것은 서로 하북(河北)과 하남(河南)의 패권을 양분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조조는 마치 원수로 취급하듯 원소를 힐난하는 것일까.
“귀관의 후일은 내가 모두 보장할 터이니 안심하고 나만 믿고 따라오게.”
“예.”
영문 모를 말들뿐이었지만,
조조라는 여성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수긍했다.
지금으로선 멀고 먼 이야기겠지만…. 조맹덕은 언젠가 높고 위대한 권좌에 오르게 될 터. 그런 그녀를 믿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믿겠는가. 빈 찬합을 받게 되는 경우만 아니라면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주군이다.
“제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직접 발탁해주신 분이 맹덕 님 아니십니까.”
“그래, 그 말대로일세……. 귀관의 가치를 가장 먼저 헤아린 사람은 본초가 아닌 바로 나일세. 귀관의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는군.”
이성휘의 대답에 후우, 하고 한숨을 깊게 내쉰 조조는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들인지 잘 모르겠지만,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는 조조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된 것처럼 이성휘는 잠시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지켜보았다.
타인에게 결코 속내가 들키지 않도록, 항상 무표정의 가면을 쓰는 그녀였지만 가끔 헤픈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이성휘는 그런 조조에게 조금씩, 점진적으로 조금씩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 * *
궁궐 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금군의 정예부대들이 대부분 남궁(南宮)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기본 상식,
매우 당연한 사실이다.
황제가 기거하는 있는 숭덕전(崇德殿)과 황후가 기거하는 가덕전(嘉德殿) 등, 동궁(東宮)을 관할하는 황태자를 제외한 황실의 주요 인사들이 머무는 궁궐들의 대부분이 남궁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금군의 정예부대들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황상 폐하의 환호가 날이 갈수록 위중해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발해왕 전하의 앞을 가로막는 겁니까!”
여관(女官)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켠 채 궐문을 가로막고 있는 무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도 무관들은 요지부동이다.
거센 항의를 받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무시로 일관했다.
계속해서 격노가 담긴 외침이 귀를 시끄럽게 했지만, 그럼에도 궐문을 막고선 무관들은 앞을 가로막으면서 누구도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궐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인원은 극소수, 식사를 가져오는 궁인들이 전부였다.
“대장군의 명입니다.”
험상궂은 인상의 무관들이 대장군의 명령을 내세웠다.
누구도 악성전(樂成殿)에 출입하지 말라.
대장군 하진은 건석이 발해왕 유협을 옹립하려 하였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 유협에 거처하는 궁궐인 악성전의 출입을 봉쇄했다.
자기 조카가 새 황제로 즉위하기 전까지 그 어떤 위험분자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하진의 결단이 담겨져 있었다.
“군부의 수장인 대장군이라 할지라도 감히 한나라 황실을 업신여길 순 없는 법이거늘!”
하진의 명령받고 궐문을 가로막은 무관들의 행태에 유협을 보필하는 인원들이 크게 항의했다.
유협의 보모 역할을 해온 여관은 물론,
궁녀를 비롯하여 환관들까지 가세하여 부당함을 토로하였다.
“무슨 일인가.”
궐문을 막으려는 인원과 나서려는 인원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금군을 지휘하는 고위급 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도위(騎都尉) 이성휘였다.
현재 악성전은 대장군 하진의 직속병력과 효기교위 조조의 병력이 혼재된 형태로 방비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궁궐 내의 소란이 이성휘에게도 들리게 된 것이었다.
“기도위께서 오셨습니까.”
이성휘가 모습을 보이자 악성전 궁인들의 앞을 가로막던 무관들이 모두 예를 취했다.
무관들은 모두 대장군의 직속부대 소속이었지만 상대는 황제의 기병장(騎兵長)인 기도위다. 발해왕을 섬기는 궁인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던 무관들이 공손히 예를 취하는 건 당연했다.
“대장군께서 악성전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라고 아시지 않으셨습니까? 헌데 악성전의 궁인들이 무단으로 궐문밖을 나서려고 하기에 그를 막아서는 중이었습니다.”
대장군부 무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듣게 된 이성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또한,
대장군부의 무관들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송구하오나 대장군의 명입니다.”
“감히 무관들 따위가 대장군의 권위를 믿고서 발해왕 전하의 행차를 막겠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난폭한 격앙이 담긴 외침에도 이성휘는 입장에 변화는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장군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십상시마저 대장군 하진에게 무릎을 꿇었는데 감히 누가 대장군부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악성전의 궁인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제지를 무시한 채 궐문을 넘는다면 그 즉시 궁궐을 포위하는 대장군부 병력이 무력을 동원하여 제압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건석의 반란 이후로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다. 조카의 황위 정통성을 가장 위협하는 대상을 그만큼 노골적으로 경계하고 있다는 뜻일 테지.’
이성휘가 고개를 돌려 악성전을 포위하는 수많은 장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날카로운 병장기와 두터운 갑주,
당장 전쟁터로 나가도 될 정도로 분위기 또한 매우 살벌했다.
궁궐의 다른 구역들도 모두 경계가 삼엄한 편이었지만 특히 악성전 주변은 전시(戰時)를 방불케 할 정도로 매서운 위세를 품고 있는 수많은 장졸들이 방비를 서고 있었다.
“그, 그럼….”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
귀를 자세히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악성전의 궐문을 넘으려던 수많은 궁인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부, 부황께… 서찰, 이라도… 보내게, 해다오….”
이성휘의 고개가 천천히 밑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선 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황금을 그대로 녹여낸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작은 여자아이. 작고 왜소하기 이를 때 없었지만 어린 나이였음에도 한나라 황실의 황녀다운 고결한 기품이 느껴졌다.
작은 소녀가 두 손을 뻗었다.
툭 하고 치면 나뭇가지처럼 부러질 것처럼 작디작은 손에는 병석에 누운 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부황(父皇)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서찰이 들려 있었다.
“발해왕 전하.”
이성휘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작은 소녀에게 예를 취했다.
다른 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소녀의 고귀한 존안을 보게 된 무관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되겠는가…?”
왜소한 어깨를 축 움츠린 채,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유협의 행동에 잠시 이성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작은 황녀의 말에 대답했다.
“제게 맡겨 주신다면 황상 폐하께서 계신 숭덕전의 내관에게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고, 고맙다…!”
다람쥐처럼 조그마한 소녀가 웃음을 지어 주자 이성휘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숭덕전의 소식을 듣게 된다면 전하께 곧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새장 속에 갇힌 새와 다를 바 없는 작은 황녀를 위한 작은 위로였다.
동정과 연민에서 비롯된,
아주 조그마한 희망이었다.
“기도위.”
발해왕 유협으로부터 서찰을 건네받게 된 이성휘의 모습에 대장군부 무관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한껏 경계심을 품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찰을 전한 유협이 물러난 뒤,
마치 대치하듯이 궐문에 모여 있었던 궁인들 또한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이 모두 물러났음을 확인한 이성휘는 활짝 열려 있던 악성전의 궐문을 반쯤 닫고는 입을 열었다.
“황상께서 계신 숭덕전에 보낼 뿐이다.”
“허나 대장군께서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발해왕의 서찰을 숭덕전으로 보낸다고 한들, 황상 폐하께서는 몸져누우신 상태다. 그리고 태의령이 했던 말을 그대들도 들었을 터인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황제의 환호를 살피던 태의령이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숭덕전에 서찰을 전하더라도 결코 읽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작은 소녀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작성한 서찰을 건네면서 어렵사리 부탁했다. 하지만 서찰은 결국 누구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봉인될 운명이었다. 황제의 수명은 겨우 사흘, 사흘 안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장군께서 아시게 되면 크게 진노하실 겁니다.”
“책임은 내가 진다.”
대장군부 무관의 말에 이성휘는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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