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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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칠갑한 채로 적들에게 망설임 없이 돌격하는 이성휘의 모습은 원소에게 놀라운 충격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검을 휘두름에 있어 거침이 없다.
적들을 죽이는 것에 있어 조금의 인정조차 두지 않는다.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는 두려움을 금치 못했지만 불길 속에서 건석을 끄집어낸 모습을 봤을 때는 막연한 동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명령의 완수를 위한 이성휘의 광기 어린 용맹은 원소에게 하여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 남자를 오른팔로 둘 수만 있다면 천하를 거머쥐는 것 또한 꿈속의 꿈은 아닐 거예요.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는 대망을 실현시켜 줄 인재를 드디어 찾았군요!’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연하기 그지없었던, 불투명할 뿐이었던 대망을 향한 가능성을 이성휘라는 무관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원소는 집착하게 되었다.
자기 대망을 실현시켜 줄 사람을 마침내 찾았으니까.
설령 조조와 향후 껄끄러운 관계가 될지라도 그 남자를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고 마음속 욕망이 소리치고 있었다. 탐욕스러운 욕망과 교활한 지모를 겸비한 원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인재를 손에 넣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부탁? 그거참 별일이군…. 본초, 네가 나에게 부탁하는 날이 오다니.”
잠이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연 원소의 말에 조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드높은 오만함과 날카로운 자존심.
그것들을 모두 가진 인물이 바로 원본초가 아닌가.
자모위용(姿貌威容)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와 출중한 능력을 갖춘 원소가 자신에게 간곡히 부탁해야 할 일이 있어 찾아왔다는 사실에 조조는 의아하다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내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지?”
조조가 물었다.
그에 원소가 대답했다.
“맹덕, 당신의 부관을 제 휘하로 편입하고 싶어요.”
“…뭐?”
원소의 대답에 조조는 잠시 냉철함을 잃고 매섭게 빛나던 두 눈을 떠는 모습을 보였다.
부관이라고 하면 이성휘를 말하는 것일 터. 갑자기 그를 자기 휘하로 두고자 하는 원소의 행동에 깊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마치 농도 짙은 염료가 물에 뚝 떨어진 것처럼, 조조의 마음속에 당혹감이 번져 흘렀다.
“그 말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그리고 이내,
당혹감이라는 감정은 분노와 시기로 변질되었다.
“이성휘는 내 부관이다.”
“그를 알기에 친우인 당신에게 양해를 구할 겸,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 거예요.”
“친우라….”
원소의 말을 경청하던 조조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바깥으로 나오려는 분기(憤氣)를 애써 삭였다.
이 여우 같은 년이.
속으로 이를 빠득 갈면서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원소를 노려보았다.
분명 원소는 이성휘의 군사적 능력을 크게 평가하여 휘하에 두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조조에게 있어, 부관으로 두는 방법을 통해 겨우 이성휘를 손에 넣은 조조에게 있어 이성휘를 휘하에 두고 싶다는 원소의 의도는 끓는 기름으로 가득 찬 솥에 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본초, 네 말대로 너와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친우다.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허나 그 부탁을 들어 주기는 어렵다. 네가 이성휘를 필요로 하듯, 나 또한 이성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조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질투와 시기의 감정들을 애써 억누르면서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소는 그저 이성휘를 유능한 인재로 생각할 뿐이라는 감정적인 이유와 함께,
대장군부와의 연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장군 하진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원소와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맹덕, 제가 권력의 중추(中樞)에 오르게 된다면 절대로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같은 대망을 목표로 하는 친우잖아요. 제가 대장군을 대신하여 권력을 쥐게 되는 날, 역경을 딛고 일어나 함께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할게요.”
한사코 거절하는 조조의 행동에 원소는 다시 한번 간곡한목소리로 부탁했다.
원소에게 있어 조조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친우인 것을 떠나, 불우함을 딛고 일어나 한나라의 정점으로 군림하겠다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얼녀라는 이유로,
환관 가문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온갖 사회적 괄시를 받아온 그녀들은 한나라의 권력을 거머쥠으로서 출신과 배경 따위는 성공에 있어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하에 보여주겠다는 결의를 나누지 않았는가.
“그래, 우리는 함께 결의를 나눈 바 있지. 허나 내 결정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휘는 내 부관이다. 이성휘는 끝까지 나와 함께 하기를 약속했고, 나 또한 그와 함께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니 본초, 네가 넓은 마음으로 내 억지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자기 설득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는 조조의 대답에 결국 원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몹시 안타깝고 안타까우나,
오랜 친우이자 같은 목표를 두고 있는 동료와 척을 질 순 없었다.
‘새 황제가 즉위하고 대장군이 권력의 중심에 오르게 되면 저는 맹덕의 상관이 될 터. 맹덕의 부관 또한 자연스럽게 제 부하가 될 터이니 굳이 지금 성급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겠죠.’
이성휘라는 이름의 부관을 사이에 둔 조조와 원소의 대치가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를 원하는 이유가 달랐기 때문이다.
조조는 이성휘를 사랑의 대상이자 함께 하기로 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원소가 원하는 것은 이성휘의 출중한 능력뿐이다. 그래서 원소는 이성휘를 부하로 둘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죠. 미안 해요.”
“…아니, 이해한다. 내가 너무 무정하게 네 부탁을 거절한 것 같아 무안 할 따름이다.”
“저는 그저 이성휘의 용력을 높게 평가하여 휘하에 두고 싶었을 뿐이예요. 건석의 서원군 병력을 상대로 무적(無敵)를 떨친 이성휘의 용력은 대장군부에서도 큰 화제가 됐을 정도니까요.”
“흠, 그렇군.”
바늘로 뺨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항상 냉정한 면모만을 보인 조조가 노골적으로 분기를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원소는 조조가 이성휘라는 인물에게 상관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서 그를 마음을 두고 있음을 넌지시 알게 되었다.
조조의 반응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원소였기에 단숨에 내심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맹덕이 그에게 진심이라면 어쩔 수 없죠. 굳이 맹덕과 척을 질 이유도 없고…. 제가 고관대작에 오르게 되면 맹덕과 이성휘를 동시에 부리면 되는 일이니까.’
결국 원소는 이성휘를 자기 휘하로 두려는 계획을 잠시 보류해야 했다.
이렇게까지 조조가 완강한 모습을 보일 줄 몰랐기에, 그녀와 대척점에 서면서까지 그를 손에 넣으려는 어리석은 집착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마음을 끊어냈다.
“갑작스러운 부탁해서 미안 해요.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원소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깔끔하게 그를 포기한 듯한,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이성휘를 휘하로 두려는 마음을 접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외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 원소는 결코 이성휘를 향한 집착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위용을 통해 대망을 향한 가능성을 보았기에, 불길처럼 매서운 탐욕과 날카롭게 선 칼끝 같은 교활함을 두루 갖춘 원소가 그러한 인재를 포기할 리 없었다.
“…이 빌어먹을 불여우가.”
원소가 문을 닫고 나섰을 때,
날카로운 적의가 담소를 나눴던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사랑과 질투라는 감정은 동전의 양면과 다를 바 없어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질투라는 감정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법이다.
단순히 원소는 이성휘를 유능한 인재라고 판단하여 휘하에 두려 했다.
하지만 조조의 눈에 비친 원소의 행동은 자신이 편법을 동원해서까지 손에 넣으려 했던 사람을 빼앗으려는, 속을 뒤집어질 것 같은 질투를 품게 만드는 간악한 망동(妄動)일 뿐이었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게로군. 면천(免賤)할 생각으로 사세삼공 자제에게 두 다리를 벌렸던 노비 어미를 둔 얼녀다운 행동이다.”
원소에게 다시없을 폭언을 토해낸 조조는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붉은 눈동자를 적의로 불태우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벽에 힘껏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박살 나면서 그 파편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 * *
황망한 말씀이오나…,
폐하께서는 사흘을 넘기시진 어려울 것 같다.
사경을 헤매는 황제의 환호를 살피던 태의령(太醫令)으로부터 그러한 보고를 듣게 된 하진은 크게 노발대발하며 당장 황제 폐하를 회생(回生) 시키라면서 울분에 찬 모습을 보였다.
‘사흘을 넘기긴 어렵다라…. 그 사흘이 참으로 길게 느껴지겠군. 협력하는 태의(太醫)들에게 명하여 황상의 명줄을 좀 더 일찍 앞당길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하진이 진심으로 황제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장군부는 황제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듯이 새 황제의 즉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건석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조와 원소에게 금군을 맡긴 것도 준비의 일환이었으며, 대장군부 병력을 불러들여 낙양을 포위한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대장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십상시 놈들을 예의주시하는 중입니다.”
“잘했네. 놈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게나. 건석이 저잣거리에서 거열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다고는 하나, 절대로 경계를 늦추거나 방심해선 안 되네.”
“이를 말씀이십니까.”
모든 준비들이 완벽했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의 부고 소식을 알리고 새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일뿐이다.
오늘내일하는 황제가 죽는 순간,
대장군부는 황실과 연계하여 일사천리로 새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한나라에 도래하였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포효를 내지를 것이다.
“이제 대장군께서는 황상 폐하의 숙부가 되시는 것입니다!”
“역시 대장군께서는 한나라 황실의 수호자이자 한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이십니다!”
대장군부 장군들이 두 주먹을 쥐면서 하진을 치켜세웠다.
다소 아부성 짙은 발언이었지만,
이제 곧 황제의 숙부가 될 하진의 귀에는 썩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했다.
“경들이 나를 너무 치켜세우는구려.”
드디어 오랜 숙원이 달성되는 날이 온다.
천출로 태어나 한나라의 권좌를 목표로 했던 무수히 많은 노력들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날까지 머지 않았다.
어찌 감격에 차지 않겠는가.
황제 폐하가 사경을 헤매는 상태였기에 경거망동할 순 없었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벌떡 일어나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건석, 그놈이 감히 황태자 전하를 폐하고 발해왕을 새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었지. 언제 또 간악한 무리가 들고 일어나서 발해왕을 옹립하려 들지 모른다. 발해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철저히 감시해야겠군.’
하진은 금군을 통솔하는 효기교위 조조에게 명령하여 발해왕 유협이 거처하는 궁궐을 보다 철저하게 경계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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