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게임 속 캐릭터는 자기 분신(分身)이라 할 수 있는 존재에 가깝다.
그래서 그 이유로,
게이머들은 자기 분신인 캐릭터가 강하고 완벽하며,
무엇보다 초인 같은 업적을 쌓는 사기캐가 되기를 원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발매된 TS화 삼국지에 등장하는
‘나’, 다시 말해 신규 플레이어 캐릭터의 능력치를 올 MAX로 만들었다.
통솔: 100
무력: 100
지력: 100
정치: 100
매력: 100
나도 안다, 양심 없는 스텟이라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에서 찐따인데 가상게임에서도 찐따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수많은 독자들이 하렘물 소설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나 역시 초인에 가까운 플레이어 캐릭터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명사 스킬도 넣고, 당연히 명장 스킬도 넣어야지… 그다음에 내정 특화스킬과 군사 훈련스킬도 넣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게 스킬이다.
플레이어의 내정, 군사, 계략, 외교 능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능력치다.
그것 역시 모두 MAX로 채워 넣었다.
최대한 사기캐릭터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두 골랐다.
“응, 궁합?”
5대 스테이터스들을 모두 끝까지 돌린 뒤,
나는 그 밑에 위치한 ‘궁합’이란 조정치를 보게 되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친밀감, 즉 관계도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위나라의 무왕 조조 맹덕과의 궁합을 100으로 맞춰 놓는다면, 게임상에서 조조를 처음 만난 경우라 하더라도 아주 쉽게 호감도를 얻을 수 있다.
“조조는 미연시 삼국지에서도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히로인이었지. 그만큼 절벽 위의 꽃이라 불리는 인물이라 호감도를 올리기 더럽게 어렵다는 평가도 많았고…….
조조, 유비, 손권, 원소 등.
나는 군주형으로 설정된 인물들 간의 호감도를 모두 100으로 설정했다.
설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로 옆 칸에
‘모든 군주형 캐릭터들 간의 궁합을 100으로 설정하겠습니까?’라는 아주 친절한 체크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군주형 인물이라 알고 있는 미녀, 미소녀들뿐만 아니라 동탁과 이각 등,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운 느낌이 드는 털북숭이 아재들과도 궁합이 최고치를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조조를 최중요 친애무장으로 등록할까. 조조가 최중요 친애무장이면 조조 군에 임관하기도 쉬울 거고, 무엇보다 게임을 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냥 대충 옆에서 숟가락이나 얹으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겠지 . 쿨데레 조조와
활발한 성격의 미소녀 조홍, 무뚝뚝하지만 공략에 성공하기만 하면 조강지처가 되는 조인, 거기에 조씨 가문의 막내인 조순까지, 조씨 자매들을 공략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잡자고. 게다가 어차피 게임오버가 될 것 같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만약 세력이 패망할 것 같으면,
어차피 다시 시작하면 될 뿐이다.
왜냐고? 이건 게임이니까. 저장과 세이브가 매우 자유로운 전략 미연시 시뮬레이션이다.
『서기 187년. 중평 4년.』
황건적의 난 발발로부터 4년 뒤의 시대.
나는 본격적으로 영웅할 거가 시작되는 시대를 골라서 시간대를
설정했다.
동탁 군이 낙양에 입성하기 2년 전.
그리고 소제(小帝) 유변이 역적 동탁에 의해 퇴위 당하기 이전인 시대였다.
‘오오, 진짜 같은데?’
게임 세계로 입성한 나는 낙양의 정경을 볼 수 있었다.
낙양.
후한의 수도이자 모든 것이 시작된 도시.
비록 허창에게 수도 타이틀을 빼앗기나,
그 이전까지는 낙양이 모든 사건들이 시작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나는 플레이어 캐릭터를 만들 때 소속도시를 낙양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소속을 한나라 황실로 설정한 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으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 무관직인 낙양성의 교위(校尉) 신분으로 골랐다.
“겉으로는 냉철하면서도
내 남자에게만은 따뜻한 서주효도녀 조조에게 갈까, 아니면 세 딸들을 너무 사랑해 마지막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원소 마마에게로 갈 까.. 그도 아니면 양말 같은 표리부동 인성을 가진 여고생 유비한테로 가볼까.”
군주형 인물들 간의
궁합은 최고치.
어느 인물들에게 가던 간에 호감도를 올리는 건 간단하다.
이른바 난이도 최하(最下).
모든 히로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받는 단계도 간편하다.
어느 미소녀 군주부터 공략할까,
그런 행복한 망상에 빠진 나는 일단 낙양성에 플레이어 캐릭터를 만든 상태에서 저장부터 하려고 했다
.
“엥?”
저장 버튼이 왜 없어.
세이브 포인트도 없잖아.
수많은 낙양 백성들이 좌우로 줄지어 지나다니는 시가지에 선 채로,
나는 게임 창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저장, 세이브 포인트는 없었고, 심지어 가상게임에서 접속 종료를 할 수 있는 로그아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강제 종료!”
하늘을 보며 크게 외쳤다.
서버에 에러가 발생하거나 게임에 오류가 발생될 경우, 가상게임에서 즉시 종료할 수 있도록 설정된 매뉴얼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강제 종료!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음에도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가상의 공간은 변할 생각이 없었다.
“저 양반 왜 저런대?”
“뭘 종료하겠단 거여, 난세가 찾아오더니 인생을 끝내려고 하시나.”
주변을 걷던 백성들이 나를 보더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을 다 본다는 것처럼.
어느 누군가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발걸음을 돌렸고, 누군가는 나에게 괜찮냐면서 선뜻 배려를 건네 왔다.
‘씨발?’
게임에 갇힌 중생.
즐겨보던
게임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건을 겪고 있던 나는 낙양성의 중심지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첫 시작은 비슷합니다.
여포가 아닌 조조를 최중요 친애무장으로 내세웠고,
조조군에 임관하는 것을 첫 목표로 잡는 것만 다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