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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17화 (217/217)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뭐, 놈들도 그리 위험한 짓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회의가 끝났다.

황족들은 시간을 더 벌어 보려 했지만, 나는 그들과의 지지부진한 협상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의 조건을 건 몇몇 겸손한 황족과 협상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황족과는 아직 제대로 된 대화도 합의도 거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준비가 끝났으니까.

"그럼, 내일... 하면 되는 건가?"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지요. 여기 있는 사람이면 모를까, 대부분의 시민들은 즉위식을 직접 두 눈으로 보지 못했던 자들일 테니까요."

즉위식은, 당장 내일 이루어질 예정이다. 다른 황족들은 이제 '용사 에네렐'이 아니라, '황제 에네렐'과 대립해야 할 것이다.

"후우..."

"마음을 편히 하시지요. 황제 폐하가 되신다 한들, 저희가 과한 책무를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거, 진심이야?"

노신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일은 저희가 드리는 게 아니지요. 황제 폐하께서 스스로 하시게 될 겁니다."

"젠장."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다. 여기 있는 노신들은, 그 개인의 도덕성이나 여타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일단 나와 생사를 같이하는 이들이었다.

같이 수라장을 헤쳐 나오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내가 권력을 잃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들도 여생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내게 과한 요구를 할 리 없었다. 사실,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불편할 것도 아니었고.

업무는 곧 권력이다. 내가 황제의 직위만 가진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건 노신들의 권력을 강하게 할 뿐이다.

"근래, 여기저기 약속을 많이 하시던 것 같으시던데... 아닙니까?"

저 기묘한,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 심히 거슬렸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어제도, 그랬다.

/////

"결국, 이런 결말이 되어 버렸군요.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늙은 사제를 다시 마주한 나는, 그 몸에서 미세한 피비린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의 약한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됐어. 아이들은 잘 있고?"

"저를 대신할 사람은 많습니다. 제가 그분의 뜻을 따르다 희생된다 해도, 누군가는 이 일을 이어받을 겁니다."

"그런가."

"저도 나름대로, 이 아이들에게는 진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남겨 두고 떠난 여행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건 좀 슬픕니다만."

그에게는 조금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에리니스를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메이드의 신분으로 나와 함께 고생해 준 것은, 역시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누군가 내 울분에 함께 화내 준 것, 뭘 해도 괜찮다고 말해 준 것, 아무 목적 없이, 그저 내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함께 있어 준 것.

"나도, 그분에게는 빚을 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에리니스의 힘을 쓰지 않고서는 해내지 못 할 일을 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그래도, 지원이 부족하지는 않아?"

"적어도 이 안에 들어온 아이들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수도가 혼란스러웠잖습니까? 버려진 아이가 적잖이 생겼을 겁니다."

"그러려나...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꼭 도와줄게."

늙은 사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황제가 되시겠군요. 하지만, 선행과 개혁은 그에 따르는 반발과 증오를 불러오기 마련이니,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노력할게."

그대로였다. 그 어설픈 조각물들도 그대로 있었다. 에리니스의 모습이 내 눈에 명확히 들어왔다.

"그리고... 여신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정말?"

"들리더군요. 참, 그 은발 성녀가 미치도록 부러워질 지경이었습니다. 평생 이렇게 명확하고 선명한 신의 음성을 듣고 살아온 성직자가 있다니..."

늙은 사제의 표정이 복잡했다.

이걸 이제서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행복, 지금껏 그걸 경험하고 있었던 셀리아에 대한 질투.

앞으로는 그녀가 신과 대화하는 감각을 다시 겪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연민까지. 많은 것이 그의 표정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에리니스가 뭐라고 했어?"

"저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이니, 최대한 그분이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숨을 죽인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깨어 있는 것도 지루하구나. 네가 도와주면 다시 잠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생각 있느냐? 라고..."

잠시 멈춘 나는,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에리니스가 깨어 있는 것을 원치 않고, 다시 잠들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인가.

"사제님. 그분과 그... 자주 얘기 나누셨습니까? 실례지만, 평소에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항상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해 해주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며, 늘 슬퍼하셨지요."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스는, 내 '복수'에 관한 일이 아니면 제대로 나를 돕지 못한다.

자비를 담당하는 여신 교단에 비해, 직접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됐다고 전해 주세요."

당장,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이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다.

여신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뭐, 그녀도 언젠가는 스스로 깨어나지 않을까.

"용사님의 개인적인 일을 도와주실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도 알아요."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내가 받은 일에 여신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 자리를 복수의 여신이 메웠고.

다시 말해, 나를 이곳에 소환시킨 여신이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귀환에 필요한 마법 재료를 준비해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됐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신에게 기대고 싶지 않았다. 기회가 생겼다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미련이 남아 있었다면, 파시어와 셀리아를 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만약에 내려올 일 있으면 밥이라도 한 번 먹자고 전해 주세요. 좀 힘들겠지만."

"...알았습니다. 부디, 살펴 가시길."

"걱정하지 말라고도 전해 주시고요. 제가... 알아서, 열심히 해 볼 테니까."

고아원에 넘치는 아이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을 사람들.

슬픈 일이지만, 그걸 위해 에리니스가 원치 않는 잠에 빠지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것이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나는, 그렇게 약속했다.

/////

성가대가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기사단과 신하들이 내게 충성을 맹세한다.

수많은 의식과 주문, 마법들이 얽히고설켜 내 몸에 깃들고 있다.

'...무겁네.'

왕관은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 이 주문들이 지나칠 정도로 무거웠다.

엘레노어는 누구보다 경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기쁨이 슬그머니 얹혀 있었다.

내 앞에 선 그녀는, 손에 쥐고 있는 왕관을 내 머리 위에 씌우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르웬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는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는 눈이 아닌 다른 감각들을 모두 개화한 채, 내가 변화하는 모습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셀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수녀 친구들과 함께 광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그녀는,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파시어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퍽 잘 운영되고 있는 즉위식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의식을 매끄럽게 하고,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자세히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한 번 실패했던 그녀였으니까.

힘겹게 그녀와 눈을 마주친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의식 중이었으니, 섣불리 손을 흔들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 정도는 줄 수 있었다. 그녀도 조금 안심했는지, 황급하게 돌아가던 손을 멈췄다.

엘레노어가 마지막으로 나를 본 채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고대어였기에 내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해석하자면, '황제의 책무와 영광을 머리에 일 준비가 되었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 대답도, 미리 외워 둔 고대어였다. 말을 마치자, 수많은 마술들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제국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세계를 내가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따뜻한 세계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희생되는 사람, 아픔, 분노, 증오가 한없이 옅어진 세계로 만드는 것은.

용사 파티와의 관계도, 이제 시작이다.

셀리아가 내게 보여 줬던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다음을 선택했다.

미래가 두려워 안주하지 않았다. 과거에 집착하고 사로잡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했고, 현재의 자신이 무엇보다 원하지 않는 것을 피했다. 아니, 부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레노어가 쥐고 있던 왕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내 머리에 올라왔다.

무겁지만, 견딜 만 했다. 왕관의 무게도, 거기 걸린 주문과 서약, 책임과 권한도.

고개를 들어, 엘레노어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그녀도, 여기 있는 모든 사람도.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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