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도 참... 지나칠 정도로 미련하구나. 뭐라 할 말이 없어."
"그걸 이제야 깨달으셨습니까?"
갑옷을 챙겨 입은 기사단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 준 것이냐. 날 위해."
"언젠가 이렇게 돌아와 주실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이제야 '임시 단장' 자리에서 벗어나 부단장이 된 기사는, 엘레노어의 귀환을 웃으며 환영했다.
"정말, 어리석은 놈들..."
엘레노어의 쓴웃음에는 감사와 슬픔,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 선 사람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얻어진 달콤한 쾌락을 축하하고 있었다.
엘레노어. 기사 중의 기사인 그녀가,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조금 분위기가 유해지긴 했지만, 막 수도에 돌아왔을 때 망가지고 무너진 그녀에 비하면 이건 그나마 정상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검에 망설임은 없었고, 입가에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옅은 웃음이 배어 있었다.
"가자."
그녀가 검을 뽑았다.
명예도 보상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황폐한 기사단에 잔류했던 이들은, 이 뒷모습 하나로 완전히 보답받았다.
"평범한 갱단이다. 인신매매, 납치, 절도, 강도. 죄다 저지른 놈들이니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녀와 오래 만난 단원들은, 익숙한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레노어가 막 기사단을 배정받고 도시의 치안을 확립할 때, 그들이 매일같이 떠났던 여정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수도의 범죄 조직들은 씨가 말라 이런 소탕 작전을 실시할 필요가 사라져 버렸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연줄을 가지고 있는 범죄 조직이라도, 황녀가 직접 출전한 기사단에 맞서 싸워 안전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엘레노어는 그 고귀한 출신과는 달리, 암흑가의 생리에도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중간한 꼼수로는 그녀의 검을 피할 수 없었다.
범죄 조직이 조금이라도 세력이 커지고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면, 백금 기사단이 귀신같이 나타나 그들을 섬멸하고 사라졌다.
몇 년간 그 일을 반복했으니, 감히 수도에서 이름을 떨칠 만한 범죄 조직이 생겨나지 못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죽었다. 혼란은 가중되었고, 그들이 고개를 들 때마다 머리를 후려쳐 주던 황녀는 길을 잃었다.
각지의 황족들과 줄을 댄 범죄 조직들이, 서로를 먹어 치우고 이권 다툼을 하며 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진격!"
갱단의 조직원들은, 그들의 빛나는 백색 갑옷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전력의 격차가 너무 심했다. 사실, 엘레노어 한 명이 들어와도 이들을 전부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없이 백금 기사단만 투입되었더라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완전무장한 기사단은 도적의 간교한 블랙잭이나 단검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 거냐... 크헉!"
나름대로 만용을 부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범죄자들이 있었지만, 엘레노어는 단칼에 그들을 베어 버렸다.
"이곳은, 수도다. 곧 새 황제 폐하의 집이 되실 곳이지."
늘 간직했던 차갑고 냉철한 얼굴이 아니라, 웃음을 간직한 채 피를 뿌리고 다니는 엘레노어의 모습은 그녀의 적을 두렵게 만들었다.
"잡혀 있던 시민들을 발견했습니다! 여자 둘, 남자 하나, 아이 다섯!"
"4조가 그들을 대로에 있는 경비대에게 인솔한다."
"알겠습니다!"
앞을 가로막던 적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는 엘레노어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어이, 부단장. 우리가 이곳을 지나쳤던가?"
"아닙니다."
"그럼 이 소란은 뭐지?"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했다.
기사단의 움직임이다. 아무리 기습적이고 빠르게 들이닥친다 한들, 갑옷 입은 사람이 우르르 지나다닌다는 정보는 숨길 수 없었다.
제대로 된 범죄 조직이었다면 질서정연하게 후퇴하거나, 혹은 남은 인원들을 긁어모아 그녀를 막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백금 기사단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미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처럼, 어떤 대응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전진한다. 함정과 매복에 유의하라."
하지만, 그런 위화감 따위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허비했다가 주모자를 놓치게 된다면, 방심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시간이 중요했다. 엘레노어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그 범죄 조직의 본거지에 들어갔다.
"...무슨?"
"어? 네가 여기 왜..."
그리고 그녀가 본 것은, 난장판이 된 공터였다.
수많은 인간들이 쓰러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죽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적어도 다시 일어날 힘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그녀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 혼란의 중심에 서 있던 남자의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에네-"
"누구냐!"
엘레노어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덕지덕지 껴입은 검은 옷과 복면으로 암살자 흉내를 내고 있는 그였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에네렐이었으니까.
'...아.'
잠깐, 엘레노어는 그에게서 거부당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이런 차림으로 바깥나들이를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네... 네가 한 일인가?"
성검을 숨기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전기가 흐르는 작은 봉이 들려 있었다.
"...칫."
잠시 고개를 돌린 그는, 걸음을 돌려 잽싸게 달아났다. 상황 파악을 마친 엘레노어는 순식간에 명령을 내렸다.
"안에 있는 적은 전부 쓰러졌을 것이다! 생존자를 보호하고, 경비대와 인수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도록! 나는 저 남자를 추격하겠다!"
"...그러십시오."
허탈한 미소를 지은 부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백금 기사단 단원들도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다!"
엘레노어는,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를 쫓아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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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또 그걸 쫓아오고 앉았냐. 남은 애들은?"
나는 복면을 벗어던진 채, 주인 없이 버려진 의자에 앉아 엘레노어를 기다렸다.
"따라오라고 속도를 조절해 주신 것 아니셨습니까?"
"너 쫓아오는 게 너무 살벌해서, 어디 박을 것 같았다. 너는 그렇다 쳐도, 너한테 박힌 집은 무너지고 말 테니까."
좀 당혹스러웠다. 엘레노어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노신들과 많은 대화를 나눠 보았지만, 저 범죄 조직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범죄자다. 하지만 황족과 연이 닿아 있었고, 협상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섣불리 그들의 죄를 묻기 어려웠다.
게다가, 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나는,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해결책을 떠올렸다.
최종적으로, 전부 쓰러트리면 될 뿐이라는 해답을.
가면을 쓰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을 쓰러트린 사람이 나라는 걸 모르는 바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관계가 좀 있을 뿐인 범죄자가 당했다는 이유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예비 황제를 겁박하는 꼴이었으니까.
"다른 애들하고는 그럭저럭 화해한 모양이네."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들이 바라던 엘레노어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려나."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완전무결한 엘레노어는 이제 없다.
"저는 이제 제국의 검이 아닌, 당신의 검입니다. 홀로 싸움을 즐기고 싶은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필요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저를 써 주십시오."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네."
곧 황제가 될 사람이 복면을 쓰고 소란을 일으킨다면 평범하게 우스운 스캔들이지만, 황제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부족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애초에, 네 힘으로 해결이 안 될 문제가 있다면 누굴 써도 해결이 안 될 문제잖아. 마왕 정도가 아니고서야..."
그러고 보면, 몇백 년 뒤에는 마왕과 용사가 다시 나타나게 되는 걸까.
그때가 되면, 다시 성검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새 용사에게 이 검을 물려줘야 할지도 모르고.
"그것도 그렇지만, 제가 두려워하는 일은 그와 조금 다릅니다."
"뭔데?"
"당신의 검이라 자칭하는 여자가, 당신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휘둘러진다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지요."
나를 바라보는 엘레노어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조금,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기대와 희망으로.
"그래서, 조금이나마 배우고 싶습니다. 당신이 제게 하신 말,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 제가 의무를 따르게 하는 이유."
그건 감정을 얻고 사랑을 하는 기계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숭고한 모습이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나는 주머니에 챙겨 줬던 비스킷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 격렬하게 몸을 뒤흔든 것도 아니었기에, 과자의 원형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었다.
"먹어."
엘레노어는 말없이 그 비스킷을 받아, 오물거리며 그걸 먹었다.
"기억하겠습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이가, 순수한 모습의 엘레노어가 내 앞에 있었다.
사람이 본디 그렇듯이, 그리 나쁘지 않은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