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 당장, 저 메이드한테 사과하셔야죠!"
"허허..."
셀리아는, 다른 노신을 거세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제가 다 봤어요! 이 컵, 메이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밀어서 깨진 거잖아요!"
대충 말을 들어 보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남아 있는 노신이라 해서, 꼭 깨끗하고 양심적인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죽은 황제의 유해를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이었으니, 어느 정도 양심과 충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일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든 분야와 모든 상황에서 선한 모습을 보여 줄 리는 없었다.
뻔했다. 저 늙은 대신이 실수로 컵을 깨트리고, 그걸 메이드의 실수로 떠넘기려다가 셀리아에게 걸린 것이겠지.
"멀었어, 셀리아?"
"에, 에네렐 님? 이건, 그게... 그러니까."
셀리아의 은색 머리가 찬란하게 흔들렸다.
"가자."
"알겠습니다!"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 한다. 나는 그 늙은 대신의 앞까지 다가가, 짧은 말을 꺼냈다.
"조심하시죠. 연세도 있으신데."
"예, 예! 알겠습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나는 메이드의 이름을 기억해 둔 뒤, 셀리아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죄송해요. 그,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관없어."
셀리아의 힘은 돌아왔지만, 그만큼 그녀는 충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과 부딪히는 것보다, 다른 이와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미안해요..."
아주 작은 부조리와 불합리에도, 그녀의 목숨을 걸고 대항하려 했다.
"뭐, 미안할 필요까지야."
셀리아는 변화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유를 추측할 수는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동안, 다른 파티와의 충돌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었을 테니까.
모든 변화가 진보는 아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포용하던 그때의 셀리아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요? 그, 저분과 사이가 나빠지면, 문제가 생길지도..."
"그 정도는 상관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시비를 걸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를 쏟아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끼는 것이, 그녀가 다시 그걸 방치하고 있다가 버려진 사람의 분노를 대면하는 것이.
"가자. 성당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 정말요?"
"그래. 얼굴은 비춰 둬야지."
겉보기에도 꽤 그럴듯한 성당이었지만, 그 의미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신 교단의 성당이었고, 제국의 크기를 생각하면 조금 초라해질 정도로 중요한 위치였다.
셀리아를 따라다니며 실없는 소리를 하는 다른 수녀들도, 신성력만 따지고 보면 어지간한 주교 이상이었다고 한다.
"너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거니까. 교단에도 말을 해 눠야지."
셀리아의 현 위치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아예 직책이 없는 네르웬에 비하면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셀리아는 성당에도, 내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내게 편한 사람은 그녀였다. 인생의 활력소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쓸데없는 생각을 덜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데려와야 한다. 그녀가 신성력을 잃고 성녀가 아니게 되었음을 공표하고, 그녀의 소속을 황궁으로 옮겨야 한다.
"출발하자."
/////
처음 방문해 보는 대성당이었다. 밖에서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안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직까지는, 용사님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즉위식을 치르지는 않았으니까. 그리 하라."
아버지뻘, 혹은 그 이상의 나이로 보이는 지긋한 얼굴의 주교였다.
공적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높여 부르지 말라는 노신들의 충언이 아니었으면, 조금 더 진지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셀리아도 괜찮아 보이는군요. 신성력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다행입니다."
그를 만난 건 처음이었지만, 한눈에도 그가 얼마나 셀리아를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다."
"아닙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녀의 마음이 여신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았으니, 여신께서 셀리아의 몸을 통해 임하셨더라도 그녀가 했던 대로 행했을 것입니다."
"그래 준다면 다행이네."
최악의 경우에는, 교단을 피해 그녀를 숨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교는 쉽게 볼 수 없는 사안이다. 성녀의 배교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적어도 이 주교는 그걸 파헤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호재였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셀리아를 데려가시는 겁니까?"
"메이드야. 뭐, 제대로 된 직위를 주지 못하는 건 좀 미안하지만..."
"그걸로 충분할 겁니다."
"셀리아를 데려가는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일이... 이렇게 된 것도."
"이 또한 여신의 뜻일 겁니다. 그분은... 모든 불의와 고통을 세상에서 소멸시켜 주지는 않으시더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선한 자가 승리하게 하시니까요."
틀렸다. 내 싸움에 승자는 없었다. 나는 누구와도 싸워 이기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 선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엘리시아가 여신의 잠재의식 아래 있을 때도, 내 고통과 분노에 반응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잠들어 있는 지금도...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웃고 있을지도.
다행히도, 주교와의 대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나는 셀리아와 함께 자리를 옮겨,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아, 아니... 따로 볼 일이 있으시다면 지금 보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커다란 보자기를 준비해 온 그녀는, 그녀가 입던 옷과 책을 차곡차곡 거기에 담았다.
"괜찮아.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여차하면, 나도..."
"아, 안 돼요! 이제 곧 황체 폐하가 되실 본인 걸요? 제가 할게요."
셀리아는 내 도움을 거부한 채, 조심스레 그녀의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그리 많은 것들이 담기지는 않았다. 가구를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사치를 즐기거나 자기 물건이 많지 않은 그녀였으니까.
옷도, 셀리아가 개인적으로 입는 속옷이나 평상복 몇 벌이 전부였다. 이제 그녀는 사제복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이건..."
"아, 그 일기장이네?"
셀리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보, 보셨어요?"
"미안. 널 찾으러 다닐 때, 혹시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있나 해서 봤지."
셀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에네렐."
"왜?"
"저는... 여신님께서 이 책으로 제게 깨달음을 주기 전까지, 제 행동이 얼마나 비겁하고... 에네렐에게 잔인한 일인지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확실히, 여신의 절규는 처절했다.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신과의 연결이 끊기는 일이 없었더라면, 셀리아는 수많은 잔소리를 듣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은 깨달았잖아. 그거면 됐지."
"그렇게 말해 주셔서, 고마워요."
"굳이 여신의 도움이 없더라도, 내가 지랄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 나면... 너는 똑같이 아파했을 거다."
셀리아는, 셀리아다. 그녀가 용사 파티의 여정 중에 내 편을 들기 두려워했던 건, 나에 대한 진심 어린 혐오보다는 용기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랬을까요?"
"여신을 믿는 네 마음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네 선택이었다고. 널 희생해서 나를 돌려보겠다는 생각도, 나를 따라온 것도,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것도."
셀리아는 일기장을 서서히 쓰다듬었다.
"그런가요..."
신에 대한 졸업이다. 그녀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해낸 일이다.
셀리아는 신의 도움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나를 살리려 들었고, 자신의 의지로 거기에 죄책감을 느꼈다. 스스로 그걸 속죄하려 들었고, 내 설득을 통해 그걸 포기했다.
"성녀가 아니라 메이드 셀리아라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셀리아는 일기장을 보자기 안에 집어넣은 다음,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 저, 이제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 에네렐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요?"
"당연하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 안다.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보내왔던 시절이 적지 않았다. 셀리아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누구보다 편한 사람이었다.
심하게 대해도 괜찮을 것 같고, 뭘 해도 싫어하지 않을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줄 것 같은 사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졌지만, 어쨌든 내게 셀리아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돌아가자."
셀리아는 내게 짐을 떠넘기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짐째로 그녀의 전신을 들어 올리는 것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에, 에네렐?"
"그냥. 얼마나 무거운지 궁금해서."
"이, 이건!"
얼굴을 붉힌 셀리아의 모습이 우습고도 귀여웠다. 나는, 성당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녀를 안은 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