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살랑이고 있었다. 초원의 향기가 부드럽게 내 가슴을 간지럽혔다.
"어때. 생각보다 나쁘지 않지?"
나와 나란히 누운 네르웬이, 나른한 눈빛으로 초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네. 생각보다... 기분이 편안해지네."
수도 근처에 초원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황궁에서 사는 것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지만, 답답함을 참을 수는 없었다.
"야영은 지긋지긋할 줄 알았는데."
여정 후반부에는, 하루하루가 야영이었다. 텐트를 잃어버렸을 때도 있었고, 텐트가 있다 해도 그 얇은 천으로는 끔찍한 대지의 냄새를 막을 수 없었다.
하나하나, 이전에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일로 변하고 있었다.
검술 단련, 들판에 나오는 것,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들의 웃음을 보는 것.
"세계수에서는 뭐라 안 해?"
"연락도 안 하더라. 뭐, 하면 하는 대로 기분 좋진 않았을 것 같지만... 당장은 걱정 안 해도 돼."
"뭐,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겠지."
황제가 되고 난 다음에는, 좋든 싫든 그들과 교류해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열매를 따 왔어! 세계수의 열매보다는 못하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야!"
네르웬의 표정이 밝았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내 입을 가득 채웠다.
"황족들, 낌새는 좀 어때?"
"뭐,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 병사를 해산시킨 황족도 없고... 느낌이 흉흉해."
딱히 그녀가 정보전의 스폐셜리스트라거나, 암살자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프다. 그 압도적인 시야와 청각만 가지고도,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당장은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우리도 세력을 확실하게 다지고 즉위식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도 상황을 정리하고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인걸."
그녀의 금빛 머리칼이, 마치 채도 높은 밀밭처럼 흔들렸다.
"..."
나도 모르게,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조금은 경험적으로, 나는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을 싫어했다. 내 냄새를 맡을 만한 거리에 들어오면, 네르웬은 어김없이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막았으니까.
몸을 가까이 들이대는 것조차도 무서워했던 나다. 여유롭게 냄새를 맡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처음 맡아 보는 네르웬의 냄새는, 달콤한 과일나무처럼 매혹적이었다.
"네 몸... 바꾸는 건, 역시 안 되는 거지?"
"네가 싫거나 역겹다고 하면 최대한 노력해 볼게. 하지만... 이것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기보다는 미뤄진 것처럼, 그녀의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았다.
세계수에서 들었던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용사를 사랑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으니까.
"그들이 만든 본능에 휘말리는 거잖아."
"그것 때문에 누군가를 혐오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든 고쳐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 덕분에 에네렐을 사랑하고 있잖아."
"..."
"게다가, 반항을 안 해본 것도 아닌걸? 네게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왔지만. 진짜 내가 어떤 엘프였으니, 원래는 어땠어야 한다느니... 굳이 그걸 따지는 바보짓을 하고 싶지는 않아."
"다행이네."
"너를 싫어했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랑한다는 감정이라는 거, 싫지 않으니까. 내 삶에 이유가 있는 거잖아. 얼마나 행복한 기분인데."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문제에 집착하고, 이뤄도 삶이 나아질지 나빠질지 모르는 행위에 신경을 쏟는 것보다,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마, 이해 못할 거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내 삶을 누군가 필요로 해 준다는 사실에는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느끼는 압박감에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으니까.
"솔직히, 슬플 때가 없는 건 아니야. 결국 이것 때문에, 그 어처구니없는 '오작동'때문에 네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도려내고 싶은걸."
"뭐, 지난 일이니까."
말한 나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가볍게, 나는 그 일들을 지난 일로 치부해 버렸다.
더 화를 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평생 잊지 말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울고 싶지 않았다. 초원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안해. 진심으로, 다시 한번 사과할게."
"또 왜?"
네르웬은 내 앞에서 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언젠가 내가 네르웬을 떠올릴 때 내게 화내던 모습이 아니라 이 고개 숙인 머리를 떠올릴 정도로 많이 봤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널 괴롭힌 게 내 자의가 아니라, 그냥 엘프의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행동이 된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사랑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릴 테니까."
"뭐, 너답네."
"그래서 평생 사죄할 거야. 지금 내가 네게 느끼고 있는 마음... 이게 진짜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게."
네르웬의 표정이 진지했다.
"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어."
기본적으로, 엘프는 인간을 같은 종족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 존재에게 정체불명의 감각을 느끼고, 그걸 피할 수 없다면 무섭기야 하겠지.
"아니, 넌 평생 이해 못 할 거야."
"뭐?"
"너는...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절대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순간 한판 붙자는 말인 줄 알고 주먹을 꺼내려 했지만, 네르웬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쨌든...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더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
네르웬이 조심스레 내 품 안에 들어와, 내 냄새를 맡았다.
"내가 뭘 하든, 내가 기분 좋아서 하는 거니까... 네가 예전에 씻고 돌아올 때, 야한 냄새를 풍겼던 것처럼."
금발의 엘프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잠깐 멍하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자, 잠깐. 뭐라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더라. 네가 혼자 씻으러 갈 때 뭘 하고 왔는지."
"아니, 그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었고!"
최대한 그들에게 음흉한 눈빛을 보내지 않으려 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나라고 성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혼자 씻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너도... 어느 정도는, 참기 힘들었던 거잖아?"
나도 젊은 남자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미녀였고, 자의든 타의든 그들의 야한 모습을 볼 만한 일도 적지 않았다.
그걸 보고 야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 광경이 눈에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약점이 노출된 기분이었다. 하긴, 그녀의 후각을 생각하면 물 따위로 내 성욕의 냄새를 씻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끔이었다고. 게다가, 후반에는 그럴 만한 힘도 없었고."
"알아, 알아...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을 테니까. 그럴 생각도 있는 거 아니야?"
"..."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상, 나는 말 그대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나를 시초로 새로운 황가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 내가 많은 아이를 낳는 것은 의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상대가 너라면 좀 그렇지."
외모의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엘프의 외모는 말 그대로 완벽했으니까.
"그들이 너를 만든 의도에 굴복하는 것 같잖아. 속이 쓰리다고."
"나도 그것 때문에 걱정했는데...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더라. 애초에, 태어난 이유 때문에, 본능 때문에 그 행위를 즐기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하지만..."
종족 보존과 번성이라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인간이 교합을 그렇게 즐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그 목적에 대해 저항할 수 있고."
"응?"
네르웬은 주머니에서 작은 막 하나를 꺼냈다. 탄성 있고 얇은, 무언가에 씌우기 위해 만들어진 막.
"야, 그거..."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 봤어. 이거라면 뭐... 네 씨를 받는다거나, 아이를 낳는다거나 하는 것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네르웬의 야한 미소를 보자, 이 문제가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작은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계수가 그녀를 어떻게 만들었든, 그 목적을 따를 이유도 억지로 거부할 이유도 없다.
그저,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기고, 웃을 수 있는 이유로 웃으면 될 뿐이다.
"우리도 오래 앉아 있었나 보네. 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조금 씻어야겠다. 냄새 나는 것 같아."
조금 부드러워졌을 뿐, 그녀가 내게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치가 떨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화가 나지 않았다.
같은 원인이 그녀의 감정을 지배하여 흘러나온 같은 말인데도, 거기에는 말도 안 되는 따스함, 아니 그보다도 조금 뜨거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있잖아, 에네렐. 같이 씻으러 갈래?"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 앞에서도, 나는 끝까지 고민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상황이 지나간 다음에도,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증오의 감정은 옅어지고 희미해졌지만, 내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네르웬이, 아니 다른 모든 여자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갔다.
그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옅은 각오라도, 이 순간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확신이 될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