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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12화 (212/217)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 황족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평생 한 번도 입지 않았던 호화로운 옷을 입은 채 걸상 위에 앉았다.

보석은 꼭 필요한 부분에만 달려 있었지만, 하나하나가 차마 값을 물어보기 무서울 정도로 거대하고 귀중한 보석처럼 보였다.

옷은, 조금 무거웠다. 물론 진지하게 내 힘으로 들지 못할 옷이라면 일반인이 입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 심리적인 문제일 것이다.

"자비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노신들이 이 옷을 입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이 자리에 앉으니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앞에 선 황족의 옷도, 내 복장에 못지않게 사치스럽고 권위적인 옷이었으니까.

"말해 보아라."

그들이 서로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호재였다.

나와 협상하는 자리에서도, 믿을 수 있는 대표 한 명을 보내는 대신 파벌에 따른 대표를 보내 혼잡스러운 상황이 일어났으니까.

"저희는 용사님이 이 제국에 기여하신 바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닐 겁니다."

늙은 황족의 부드러운 말과 달리, 그가 손에 건넨 서류의 양은 적지 않았다.

"짧지 않군. 이 정도라면, 미리 건네줘서 읽을 시간을 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정치에 대한 조예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런 만남이 있기 전 물밑 교섭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글은 읽을 수 있었지만, 그리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전문 용어와 현학적 문구들로 채워진 협상문은, 내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 시간이 필요할 테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실익이 없는 만남이었지만, 당장 수도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잠재우는 데에는 우리가 협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늙은 황족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이 황족이 그들 파벌의 대표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을 돌려보내려 했지만, 황족 중 누구도 일어나는 이가 없었다.

"...음?"

"그, 저희 쪽의 제안 사항도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저 서로를 감시하게 위해 우르르 몰려 나온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내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

"설마..."

내 불길한 상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건지, 그들은 각자 다른 협상안을 내게 들이밀었다.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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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을 수 있는 정치가라고 해 봐야, 뻔히 정해져 있었다.

협상단을 모두 물린 나는, 천천히 그녀의 자문을 듣고 있었다.

"이 부분, 조세에 관해 재량권을 보장해 달라는 말... 이건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조건이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합법적으로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될 테니까요."

"안 그래도, 이 조항은 볼 때부터 느낌이 싸했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초야권, 불법적 징발이나 모멸적인 행동 전부... 이 조항을 허용한다면 전부 귀족의 재량하에 이루어질 겁니다."

"전부, 그들이 내지 못한 세금을 대체해서 이루어지게 되겠지."

평범한 제국민을 노예로 팔거나 감옥에 가두는 행위는, 아무리 제국법이 말랑말랑해도 쉽게 허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습적으로 세금을 미납한 시민을 노예로 팔거나 옥에 가두고, 여타 다른 방식으로 대신 세금을 지불하게 하는 행위는, 훨씬 더 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럼, 이건 어때. 이 조항도 문제가 있나?"

"사냥에 대한 자유...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귀족들에게 무언가를 허용한다는 건 단순히 그걸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냥에 사용될 숲을 관리하기 위해 시민들을 탄압하고, 그 숲에서 사슴이나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

내가 알던 사냥이라고 해 봐야, 여정 중에 네르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멧돼지 사체를 가져오는 정도였다. 그런 사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사냥을 위해 백성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 의미로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이 역시, 개별적인 사냥에 제국의 허가를 요구해야 합니다."

"쉽지 않네."

어느 것 하나, 악용될 여지가 없는 조항이 없었다.

"황족과 귀족의 명예를 보장시켜 줄 권리... 이것 역시, 말장난일 뿐입니다."

"왜?"

"이 조항에 의하면, 새로운 황제는 그들의 명예를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그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일이 있다면... 역시 재판이겠지요."

"돌아버리겠군."

그러니까, 이 놈들은 명단에 들어간 귀족과 황족에 대한 면책특권을 요구하는 것일까. 사실, 더 읽어보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쁠 정도였다.

"역시, 내가 그들에게 준... 정신적 충격이 부족했나?"

수백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어느 정도의 운도 들어가 있겠지만, 그들 중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그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물러설 수 없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지지하는 귀족과 황족이 있을 것이고, 그들은 이런 조건에도 만족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요."

전 황제의 죽음은, 귀족들에게는 축제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거쳐 내게 들어온 보고를 읽어보기만 해도, 그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건가."

엘레노어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은,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아직 용사가 얼마나 강한지 체감하지 못했습니다."

황궁에서의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다고 한들, 제국의 귀족은 많고 병사는 많다.

그들 중 일부는, '전부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용사를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를 기대하고 과한 조건을 당당하게 들이밀었거나.

"...좀 무섭네."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엘레노어는, 그날 이후로 내게 깍듯이 존대를 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새 황제로, 그리고 그녀 자신을 그를 섬기는 기사로 인식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 책임지는 위치가 되는 거잖아."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힘이 무한해지는 만큼, 그 책임 역시 무한해진다.

만일 내가 엘레노어나 다른 신하를 부르지 않고 내 독단으로 이 합의안에 동의했더라면,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너처럼 행동하게 될까."

엘레노어는, 결국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그건 결국 나를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든 파시어든, 진심으로 나를 혐오하거나 역겨워해서 괴롭힌 게 아니었다.

그저, 잠시 눈을 돌린 것이다. 내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곧 황제가 된다. 남은 황족들이 저항해 봤자, 내가 황제가 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라지만, 책임이 생긴다.

"당신은, 절대 제 전철을 밟지 않을 겁니다. 에네렐.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늘 그랬듯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왜?"

"누구보다 많이 아파했던 사람이니까요.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이 올지라도, 당신은 꼬박꼬박 그 희생에 슬퍼해 줄 겁니다."

"..."

사실, 그리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뿐이라는 것이, 내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정 짓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제 부족한 이름이나마...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에네렐, 당신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그랬던 방식으로는... 절대로."

하지만 엘레노어가 보여주는 따뜻한 미소에, 나는 차마 그럴 리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문항들, 전부 확인은 해야 할 테니까."

물론, 이 어처구니없는 협상문을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강하다 한들, 그 넓은 제국을 돌아다니며 칼질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결국 통치는 귀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는 무력 행사를 멈추고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

어떤 조항을 어떤 이유로 용납할 수 없는지, 전부 결정을 지어 놓은 다음 그걸 내 머리로 달달 외워야 했다.

"다음 조항입니다..."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몇 초 지나기도 전에, 나는 멍하니 엘레노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다 타버린 재 같았다. 한평생 자신을 불사른 다음, 폭우를 맞고 잠잠해진 다음에야 너무 많은 걸 태웠다는 것을 깨달은 재.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날카롭고 강철 같은 기세는 수그러들었지만, 누군가를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은 채.

"에네렐?"

"...아니, 미안해. 다시 시작하자."

엘레노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뒤, 다음 문항을 읽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내가 제대로 협상문에 집중하기 시작한 건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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