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11화 (211/217)

"수고하셨어요!"

셀리아와 다른 수녀 몇몇이 따라와, 잔뜩 지친 나와 다친 엘레노어를 치유했다.

"후..."

신성력을 잃은 셀리아였지만, 그녀가 성녀였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성녀의 몸이 연비와 연료가 둘 다 어마어마한 신형 차나 마찬가지였다면, 지금 셀리아의 상태는 새로운 연료가 들어오지 않는 상태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혼자서는 신성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성직자가 그녀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면, 그걸 증폭할 수는 있었다.

진짜 성녀였던 그녀가 그랬듯이 혼자서 기적을 행사할 수는 없겠지만, 일반적인 성직자의 치유보다는 훨씬 강한 회복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끝났어요!"

너덜너덜해진 엘레노어의 몸은,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셀리아의 뒤에 있는 수녀들은 금세 이마에 땀이 맺힌 채 힘들어했지만.

다행히도, 셀리아는 다시 교회에 섞여들어갈 수 있었다. 배교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 온갖 비난을 듣지 않을까 고민했던 셀리아였지만, 의외로 수녀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하면서 넘어가 주었다.

그녀가 받는 신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셀리아는 강아지처럼 내 곁에 다가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다거나 귀여웠다기보다는, 그냥 부드러웠다. 그녀의 하얀 머리칼은, 만지는 감촉이 순수하게 좋았다.

"그 옷, 불편하지는 않냐?"

"이렇게 예쁘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어 본 건 처음이라서 좋아요!"

"뭐, 네가 그렇다면야."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메이드복은, 작은 체구와 순백색 머리칼에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셀리아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 옷을 입기 위해 탄생한 사람처럼, 옷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힘들지는 않고?"

"저는... 이런 식으로라도 에네렐 님의 곁에 있을 수 있어 너무나도 행복한 걸요."

"그래."

반쯤은, 내 사정에 맞춘 인원 분배였다.

"신성력을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다시 무능한 저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그녀를 가까이 둔 것에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막 대하기 편했다.

"다른 사람들은 좀 불편해서."

나는 황제가 되기를 선택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남아야 한다면,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돕는다 한들, 남은 황족의 인성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마을과 영지를 구원한다 해도 손해일 것이다.

꼭 마왕이나 괴물이 인간을 죽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중간지대 앞에서 봤던 것처럼, 인간은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부, 불편하세요?"

"그냥... 그런 게 있어."

아슬아슬하게 제국을 유지시켜 주고 있던 노신들은, 내 결정에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이 혼란을 잠재울 만한 힘도 가지고 있었고, 일단 전직 용사였으니 황가의 가호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었다.

전 황제의 유언이 나를 지목했으니 반발을 살 이유도 없었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전 황제 충성파나 조용히 엘레노어를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면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황실에서 일으킨 소란 때문에 내 인성에 의문을 표한 노신도 있었지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황제 후보들을 쭉 늘어보면 겨우 '의문을 표할 만한' 인성은 합격점을 매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황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사람 쓰는 게,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많다고."

노신들도 최대한 내 의견을 존중해 주려 했다. 정확히는, 내가 황제 수업에 지쳐 그 직위를 포기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제국의 역사나 예법을 배우고, 정치와 귀족을 배우고, 역대 황제의 대략적인 업적을 배우고.

지식을 배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쓰는 법을 배우는 건 좀 불편했다.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다른 사람을 시켜야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편하겠네?' 하고 생각했던 나도, 실제로 해 보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옆에 있는 주전자에서 차를 따르는 것도 내 손으로 해서는 안 되고, 옷을 입거나 벗는 것도 다른 사람을 시켜야 했다.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내 명령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걸 24시간 내내 보고 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노신들과 협상을 해 보려 했지만, 그들의 태도는 완고했다.

"그 정도로 힘들어요?"

셀리아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과하게 나를 걱정할 것 같아, 나는 휘휘 손을 저었다.

"그렇게 힘든 건 아니야. 몸은 편하지."

노신들은, 그들의 나이 때문인지 내 생각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하면 편한 일을 굳이 남에게 시키는 건, 느린 데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정통성이나 무력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에 준하는 권위는 없다는 점이 그들의 위기의식을 자극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렇게 강하니까 괜찮은 거 아니야?'라고 항변해 보기도 했지만, 행동으로 권위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그 힘을 써서 다른 이를 쓰러트려야 통제력이 생긴다는 노신들의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뭐, 너는 편하니까."

좀 아이러니하게도, 용사 파티원에게 무언가 시키는 일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다른 메이드들보다야 훨씬 내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말을 잘못 알아먹거나 쓸데없는 오해로 벌벌 떠는 일도 없었다.

조금 불편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일도, 일면식도 없는 메이드에게 시키는 것보다는 내게 조금이라도 빚이 있는 그녀에게 시키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아무튼, 수고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엘레노어와 헤어진 채 황궁을 돌아다녔다.

"...넓네."

손님으로 가득하던 황궁은, 이전에 비하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왕국의 유학생이나 제국을 보러 온 관광객들은, 위험한 황궁에 있는 대신 각자 대사관이나 그들이 사 둔 저택으로 흩어졌다.

복도는 넓었고, 정원은 한산했다.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셀리아를 제외하면,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이라도 갈까."

"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다. 아무 목적도, 생각도 없이 걸어 다니는 건 사치나 다름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내 귀환에 필요한 재료를 찾기 위한 여행에서도, 일분일초를 쉬지 않고 달려갔던 건 아니었으니까.

바뀐 건, 내 정신이었다.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이었지, 편안한 여유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목표를 이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그런 생각들을 벗어던지기 전까지는, 여유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복습 같은 거야. 이 세계에 대한 정보는, 아무리 얻어도 부족하니까."

내 세계에서도, 정치인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그릇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공격받곤 했다.

대놓고 내 앞에서 흉을 보는 놈들은 많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습을 소홀히 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다.

텅 빈 도서관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눈에 보이는 책 하나를 뽑아 펼쳤다.

셀리아가 보였다.

문득, 나는 이 광경을 어디선가 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너와 한 번 여기서 만났던 적이 있었지."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탓하려던 건 아니었어."

나는 차마 책을 읽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만일 내가 그날 셀리아의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보다는 일이 잘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뭐, 큰 의미는 없었겠지만.

내 귀환은 실패했을 것이고, 황제는 나와 엘레노어의 관계를 오판했을 것이며, 네르웬은 내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네."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아예 처음으로. 내가 그들을 처음 만난 날로 돌려야 할 것이다. 어중간한 선택으로는 관계가 깨지는 걸 피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라도, 아마 그걸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마왕 퇴치는, 인간관계를 제쳐 두고서라도 벅차고 힘든 일이었다. 내가 용사 자리를 차지한 채 그 여정을 다시 떠나라니,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가요?"

할 수 있는 걸 전부 했다. 내 감정을 토해냈고, 그녀들의 진심을, 바닥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들이 속죄를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 보았고, 내가 그들의 생존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는지 느꼈다.

그러니, 이 결말에 후회는 없다.

"힘들지는... 않겠어요?"

"모르지. 어느 정도 상황에 익숙해지거나... 내가 꼭 여기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황제 자리를 놓아줄지도."

"정말요?"

"가정에 불과해. 황족 중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오든 내 기준에는 차지 않을 거야."

가까웠다. 셀리아의 웃음은 변함없이 밝았지만, 거기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무지에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었다. 근거 없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짓는 혼자만의 웃음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슬퍼하고 아파했는지 이해했던 셀리아가, 그걸 전부 넘어선 채 내 행복을 위해 만든 웃음이다.

역시, 웃는 모습이 우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다. 적어도 보는 사람을 우울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아니니까.

나는 그녀를 앞에 둔 채,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었다.

필사적인 각오도, 고통스러운 인내도 없이.

그냥, 이 순간을 이어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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