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검은, 너무나도 자비롭게 병사들을 향해 나아갔다.
"크아아악!"
마치 거대한 둔기에 맞은 것처럼, 그 검에 당한 병사들이 허공을 날았다.
다리가 부서지는 으슬으슬한 소리와 함께, 황족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긴 창으로 대응해 보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오히려 어설픈 나무 창자루는 성검에 닿는 순간 버터처럼 잘려 나갔다.
"주, 죽고 싶지 않아!"
"도망쳐!"
죽음을 각오했던 기사들은,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들의 각오와 헌신, 희생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뒤에 남겨둔 채, 용사가 앞으로 전진했다.
"원군을 불러! 화살을 쏴!"
"진형 갖추라고! 뭐 하는 거야!"
황제의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그를 막아서려 했다. 그가 용사인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용사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격렬한 저항은 그의 걸음을 조금도 느려지게 할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간 병사들은 그의 몸에 창을 꽂을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용사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계속 나아가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그 단단한 살갗은, 어설픈 공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황족의 병사들이 찌르거나 벨 수 있는 건, 단지 그가 입고 있는 옷가지 뿐이었다. 그마저도, 그가 진지하게 피하려 했다면 맞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머,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용사님을 도와라! 제국을 위하여!"
겨우 정신을 차린 임시 단장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늦게나마 도착한 황궁 경비병들과 백금 기사단들은 그 고함에 정신을 차린 채, 무기를 가다듬고 전장에 달려들었다.
"하지 마!"
그리고, 용사가 그걸 막았다.
"...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용사는 그들을 황급히 멈춰 세웠다.
"혼자 할게. 집중도 안 되고,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적들을 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태연한 말투였다. 그저, 무거운 짐을 옮기려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평안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그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의 검이 적을 베었다.
"아, 안 돼! 우리도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상대가 누구라 해도 황족이나 귀족은 가차 없이 병사들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면 한 명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게 실패했을 때 어떤 피해를 입는지도 뼈저리게 느껴 본 이들이었다.
"빠져라! 작전은 실패다! 일단 후퇴해!"
"누구 마음대로 빠지겠다는 거야! 우리 병사들만 소모시켜 놓고, 너희 병사가 죽을 때가 되니 몸을 사리겠다는 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하지! 젠장, 처음부터 우릴 속일 계획이었군!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의 목이라도..."
하지만, 그들은 지휘체계가 통일된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이 약속했던 것은, 싸움과 승리였다. 그 과정에서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누가 더 많은 피해와 위험을 감수할 지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떠든 황족들이었지만, 실패했을 때를 고려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죽지 직전까지 얻어맞아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황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그들 중 가장 정보에 어두운 이들도 알고 있을 만큼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성직자들의 집중 치료를 받는다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복귀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은 걸릴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사실상, 자신이 누굴 지지할 것인지 정한 제국의 모든 병사와 기사들이 그들의 편에 서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싸워야 한다고!"
그래서, 패배를 감수할 수 없었다.
기사들을 학살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이유로 엘레노어의 인기가 떨어졌지만, 황궁을 침범했다는 것은 그걸 아득히 뛰어넘는 불경이었다.
"그, 그래도 저건..."
"이 늙은이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거야? 용사라며! 저기서 우리 병사를 쓸어 넘기고 있는 사람이 용사라고 했잖아!"
"...야단났군."
"그래. 엘레노어라면 모를까, 용사가 황위 다툼에 끼어든 거라고!"
결국, 엘레노어가 황제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그녀는 스스로 황가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고, 즉위식을 마치더라도 반쪽짜리 황제일 뿐이다.
사태를 관망하는 '자칭' 애국자들이나 중립을 지키던 변경백들은 절대 그녀에게 협력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잠깐 그녀의 세력이 커지더라도,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용사는 다르다.
"저건, 황가와 상관없이 적법한 후계자란 말이다! 저놈이 즉위식을 거치면, 우리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고!"
"하, 하지만... 어떻게, 저걸 이기란 말이냐?"
나이 든 황족은 단순히 병사들을 쏟아붓는 것으로 저런 괴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죽여! 앞으로 나가! 도망치는 놈들은 내 손으로 죽이겠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용사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 죽는 사람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쓰러트리며, 용사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항거할 수 없는 죽음처럼,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별일 없었어. 눈에 띄는 사람도 없었고, 아마 죽은 사람도 없었을 거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엘레노어의 상처는 씻은 듯 회복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 어때. 이왕 이세계에 떨어졌으면, 황제 노릇 한 번쯤 해 볼 수 있는 거지."
"제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분이 그 일을 즐기셨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입이 기네. 다시 시작하자."
내 검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엘레노어는 저항하지 않은 채 그걸 맞았다.
단순한 화풀이로 보일 법한 행위였지만, 내 눈은 나름 진지했다. 엘레노어의 눈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어때?"
"옆구리... 확실히, 이 정도라면 일반인이라도 생명의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각도에 따라, 이 검격이면 갈비뼈가 피격당할 확률도 고려해야 합니다."
나는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채, 조심스레 뼈가 없는 곳을 쓸어내려 보았다.
"으읏..."
"아, 미안. 아무튼 그... 생각보다 넓진 않네. 실전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겠어."
"목숨만을 놓고 생각하면, 사지를 노리는 편이 몸통을 노리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안전합니다. 충격으로 인한 쇼크사를 제외하면 생명에 지장이 없으니까요."
"음... 다시 해보자."
객관적인 인식으로, 내가 더 강해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마왕이 다시 부활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 수련은, 그냥 테스트였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게, 사람 모형의 움직이는 마네킹을 두고 하는 훈련.
"아프지는 않아?"
물론, 나는 편리했다.
움직이고, 몸놀림도 좋으며, 타격을 입을 때마다 적당한 피드백까지 날려 주는 연습 상대가 그녀 말고 또 있을 리 없었으니까.
게다가, 엘레노어도 어지간히 인간을 초월한 기사였다. 내가 '일반인이 맞아도 죽지 않을 정도'의 어설픈 공격을 가하는 걸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견딜 만 합니다."
저항하려면 저항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쉽게 맞서려 들지 않았다.
적당히 단단한 마네킹을 준비하려 했던 내게, 이 훈련을 제안한 것도 그녀였다.
"...하긴, 그런 사람이었지."
"오히려, 기쁩니다. 제가 에네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를 증오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는 에네렐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냐?"
그녀는,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웃고 있는 에네렐과 파시어, 네르웬, 셀리아의 모습을.
하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이 나를 보고 울먹이거나 찡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밝게 웃는 것이 과거를 덜 떠올리게 만들었다.
웃어 달라는 말이 조금 위협적으로 들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웃어 주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게 억지웃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이전부터 바라 마지않던 일입니다. 계속 시작하시죠, 에네렐."
"...좋아."
마치,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정말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이렇게 편안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느낌은, 새로운 감각이었다.
그녀와 검을 맞댄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 혐오와 분노 대신 발전을 느끼는 감각은 분명 처음이었다.
"어깨는 확실히 유효하군요. 어지간히 각도가 틀어져도 목을 치지는 않을 것 같으니, 머리를 박살 내지만 않는다면 확실히 제압과 불살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이 각도, 다시 해 보자."
무작정 강하게 휘두르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딱 원하는 양의 힘을 주어 성검을 떨어트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보람이 있었다. 완벽한 각도와 적절한 힘이 들어간 공격을 엘레노어의 어깨에 퍼부은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대련 내내 그랬던 것처럼, 엘레노어가 나와 함께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