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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09화 (209/217)

"낌새가 좋지 않습니다."

좁은 방 안에, 고귀한 혈통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이름 높은 귀족과 황가의 피가 흐르는 황족들이 한데 모여, 서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한 명도 빠짐 없이 다 모였군. 이렇게 모여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황좌라는 목표를 향해 서로 싸우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반목만큼 야합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음지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암습을 시도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고만고만한 황족들과 협력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그 경쟁자가 없었다.

남은 황족 중 절반이 힘을 합쳐 선두에 선 황족을 끌어내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황족이 모여 음모를 꾸미는 건 그냥 어처구니없는 가족 모임에 불과했다.

"우리들은 그냥... 잘 화합을 한 거지.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나와 장난치는 거냐!"

황가의 자손이라고는 하지만, 명예와 품위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친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같은 배에서 같은 부모를 두고 나온 이들도 싸우게 되는 것이 황제 자리인데, 이들은 심지어 황제의 자녀조차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피에 황가의 혈통이 섞여 있을 뿐이다. 부모도, 형제도, 사는 곳도 전부 다른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있을 정보력이면, 그냥 앞으로도 몰라도 돼."

"미친 놈이!"

"...이 정도로 하지. 얼간이 한두 놈이 판을 깨는 건 사양이니까."

나이 든 황족 하나가 그들의 싸움을 말렸다.

황제의 자녀가 아니라 황족 간의 싸움이었고, 얼마나 피가 섞여 있어야 이 싸움에 참가할 수 있는 건지 정해진 수치도 없었다. 십대의 혈기 넘치는 황족과, 쉰이 넘은 나이의 노쇠한 황족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판국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당연히 이 방 밖에 있는 놈을 막기 위해서 뭉친 것 아니겠나."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엘레노어를 말하는 거야?"

"그녀 외에 누가 있겠느냐."

"진짜로 그 창녀를 무서워하고 있었단 말이야? 하, 다 겁쟁이들이었네."

황제가 즉위한 직후라면, 저 건방진 황족은 이렇게 큰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비아냥거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엘레노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도, 다른 이들 앞에서 뻔뻔하게 소리칠 수 있었던 이유도 아이러니하게 엘레노어 때문이었다.

"목숨이 야망보다 더 중요한 놈들은, 괜히 꼼수 쓰지 말고 도망치는 게 어때?"

그의 세력은 그리 특출나지 않았지만, 그보다 세력이 강한 이들이 마치 유성처럼 떨어졌으니까.

엘레노어의 손에 참살당한 기사단이 적지 않았다. 그걸 눈앞에서 본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 기사단들은 그 세력들의 핵심 전력이었다. 어설프게 질 낮은 기사들을 끌어모아 빈자리를 메운다 한들, 그들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네놈의 기사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해서, 그녀를 얕볼 생각이냐?"

"당연하지. 그뿐만이 아니야. 애초에 그년이 왜 나를 건드리겠어? 당장 어디 쳐들어가서 황족 목부터 따고 다닐 생각이면, 나보다 먼저 뒈질 놈들이 좀 있는데."

"크윽..."

"난 누구처럼 바보같이 기사들만 보내지 않을 거야. 뭐, 아무리 강해 봐야 결국 인간이잖아? 창병이든 궁병이든 몇천 명씩 쏟아부으면 지쳐 뒤지겠지."

나이 든 황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틀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황좌를 차지해야 할 것 아닌가?"

"난 내가 아니면 다 의미 없는데?"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당연한 사실을, 뭔가 대단한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처럼 떠들지 마라."

"..."

"엘레노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래서 그년이 뭘 어쩌겠어? 그년은 인식이 너무 나빠. 자기 기사단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년이라고. 낌새가 수상하면 어쩔 건데?"

젊은 황족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엘레노어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황위 싸움의 변수였지만, 정작 그녀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다.

"이렇게까지 무모했던 이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예측할 수 없다. 뭘 원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예측할 수 없어."

"그게 왜?"

"즉위식.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이 든 황족의 말에, 젊은 황족이 몸을 흠칫 떨었다.

"당장 황궁을 점령하고 있는 건 그녀다. 이미 황궁의 무기들을 제 것처럼 쓰고 있는 데다, 어설프게나마 성직자와 마법사, 기사와 황족도 대동할 수 있지."

"그거, 딱 의식을 할 수만 있는 거잖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 의식을 경솔하게 치르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과 시민, 다른 황족의 지지를 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력으로 즉위식을 치러 봐야, 제국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 정말 그게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하나? 억지로라도 '즉위식'을 거친 순간, 황제 경쟁에서 우위를 가져갈 텐데."

"제정신이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제정신이었을 때의 그녀는, 살인검을 뽑아 수많은 제국의 기사들을 베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제국의 기사들을 동원해 황녀를 죽이겠다는 생각도 그리 제정신인 생각은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녀를 황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성녀와 마법사, 엘프와 용사까지 틀어박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네.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지."

"그렇다면, 그들을 선제공격하자는 건가?"

"그건 좀 위험한 생각이지. 가능하다면, 우리들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있는 게 좋아."

나이 든 황족은, 창문을 통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컨대, 즉위식만 치르지 못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걸 위해 모였고."

/////

"물러서지 마라! 이곳이, 너희들의  최후의 전장이 될 거라고 생각해라!"

임시 단장의 명령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급하게 투입된 그들이었지만, 정보에 둔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 상황에 의연히 대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길 수... 있는 겁니까?"

"아니."

임시 단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희망을 잘라냈다.

"우리가 용맹하게 싸운다면... 아니, 그렇다 한들 의미 없는 짓이다. 우리는, 헛된 일을 하다 죽는다."

아무도 그들을 이끌어 주지 않았다.

승리와 명예, 정의와 용맹의 상징과도 같았던 엘레노어는 이제 백금 기사단을 떠났다.

"하지만, 이건 그 더러운 찬탈자들을 막고 제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우리가 싸우는 한, 적어도 제국은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라질 것이다."

찬탈자들은 노신들이 이끄는 제국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병들을 움직여, 알맹이 없는 황궁을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싸우자. 가장 용맹한 기사들이여!"

남은 이들은 많지 않았다. 명예에서 눈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기사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황족을 모셨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사들은, 스러져 가는 백금 기사단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낙향하거나 방랑을 떠났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가장 약하고 가장 어리석은 기사들이었다.

"으..."

그리고 거기에는, 한 귀족 영애 출신 기사도 끼어 있었다.

검술은 턱없이 부족해 기사의 자리를 차지하지도 못할 수준이었지만, 그 고귀한 혈통 덕분에 기사단의 이름이라도 빌려 쓸 수 있었던 여자가.

"오고 있어요!"

황궁 근처에서는 들리지 않았어야 할, 수많은 인간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검을 잡았다.

그리고 귀족 영애 출신 기사는,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죄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용사가 분노를 터트린 것에는, 물론 수많은 요인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칼을 들이민 건 그녀의 실수였다. 그때는 그가 엘레노어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물러나라! 네놈들이 어딜 위협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

"창녀의 자식, 사기꾼의 기사단이 말이 많구나! 황성에 네놈 같은 비겁자들이 설치도록 놔둘 줄 알았나!"

하지만, 죽음으로 갚으면 된다. 그녀는 입술을 꽉 악문 채 검을 들었다.

"죽여라!!!"

수많은 군대가 달려들었다. 백금 기사단이라면, 이들을 능히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쓰러지고 난 후에, 그들과 비슷한 양의 군대가 다시 이곳을 공격할 것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지고 난 뒤에는, 다른 기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백금 기사단은, 뒤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소란스럽네."

그는 이 급박한 상황을 마치 조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태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어떻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쪽이 백금 기사단인가?"

그들이 봉쇄하고 있는 황궁이다. 어설픈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검집에서 검을 뽑자. 아무도 그 갑작스러운 등장을 비난하지 못했다.

성검이 뽑혀 나왔다.

"그, 그렇습니다!"

"그럼 저쪽이 그 귀족이랑 황족 연합군 같은 거고. 갑자기 황궁을 공격해 들어온 거고."

그는 기사들과 임시 단장을 지나쳐,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옳게 보셨습니다."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미안한데, 내가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 열심히 노력해 보고 있는데... 이게 쉽지는 않더라."

성검을 본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 명의 남자가 그들 모두를 막아 세우고 있었다.

"더 앞으로 들어올 거라면 조심해야 할 거다. 안전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자연스럽게 기사단에 앞에 선 남자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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