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하다. 활로가 없다. 답답하다.
네르웬도, 셀리아도, 심지어는 그 엘레노어마저 쓰러트린 나는, 전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파시어를 이겨낼 수 없었다.
방황하던 엘프를 제압하고, 죄책감에 빠져 있던 성녀에게 길을 알려 주고,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던 기사를 더 강한 힘으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파시어는 달랐다. 그녀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 내가 이겨낼 수 있는 종류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그 눈에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네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존중하마. 이런 우리라도 용서해 준, 네 자비를."
"용서가 아니라! 젠장, 앞으로 몇 배, 몇십 배 더 괴롭힐 테니까... 목숨만은 남겨 두라는 말이잖아!"
"하아... 그렇구나. 미안하다. 나이를 먹으니 관념이 굳건해져, 세상을 곧이곧대로 불 수 없게 되는 것 같구나."
흥분한 쪽은 나였다. 적대감을 불태우는 쪽도 나였다.
파시어는 아무 미련 없이,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맙구나."
답답함으로 가득 차 있던 나는, 그녀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지했을 때... 나는, 내 죽음에 슬퍼할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글쎄다."
나는 그 의견에 좀 회의적이었다.
그녀와 인간적인 교류를 했던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파시어의 삶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으니,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파시어라면, 누구에게든 그 속마음을 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 조부모님은 진심으로 내게 사랑을 베푸셨다."
"..."
"그렇기에, 나는 그분들이 죽는 걸 두려워했지. 사라지는 것을, 영원한 이별을 슬퍼했지."
파시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에 남은 미련을 모두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느리지만 쉬지 않고 말을 토해냈다.
"하지만, 내가 과연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었을까..."
"여기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냐? 용의 눈, 생각보다 시각이 좋진 않은가 보네?"
그래도 무시당하는 건 기분 나빴다. 그녀가 죽길 바라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에네렐. 네가 지나치게 자비로운..."
"나뿐만이 아니야. 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몇백 년을 살다 보니까, 몇 달 사귄 사람들은 인간관계로도 안 보이는 거냐?"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서 파시어와 말싸움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그녀가 초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네 비밀기지에서 널 죽이고 나왔을 때, 밖에 있던 마법사한테 얼마나 원망받았는지 알아?"
그녀의 힘이 충분했다면, 나를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이려 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눈빛이었다.
"그 마법사는... 그저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재능은 있었으니까.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리석었지."
나는 결국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네가 그때 변이 마법을 걸었던, 그 사람들 기억나? 등에 털 달린 양반들... 나는 걱정했는데, 그 사람들은 나름대로 잘 살고 있더라. 널 기억하고 있었어."
"아아, 그들은, 그래. 유용했다... 음. 이건 좋지 않구나. 인간을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네게 배웠는데도, 이런 말을 내뱉고 말다니."
어쩌면, 파시어가 그들에게 베푼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겠느냐. 그냥 부드럽게 넘어가 주거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어떻게든, 그녀가 살고 싶다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파시어라면 분명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불합리하고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도,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너를 원망하지 않았어."
"의미 없는 친절이었을 뿐이니라. 진심이라고는 한 올도 들어가 있지 않은, 그냥 내 이해관계와 그들의 이득이 일치했을 뿐인."
그럴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에 그녀의 악의가 들어가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에 대한 친절과 선물에 파시어의 호의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슬퍼할 거라고. 너 때문에. 네가 죽는 것 때문에."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거짓인 건 아니었다. 파시어가 적의 없이 행한 멸시 때문에 내가 그녀에게 복수를 퍼부었던 것처럼, 그녀가 호의 없이 베푼 친절 때문에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시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 있는 용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인간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파시어가 나와는 다른 생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마지막을 평안히 떠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고맙다. 네게는, 얼마 남지 않은 평생 동안 갚지 못할 빚을 졌어..."
"적당히 하고 정신 차리라고!"
"하지만 말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온몸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공포가 아니다. 탄식이다. 반성이다.
좋을 대로 억지를 부리던 어린아이가, 차가운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내가 죽는 것이, 그토록 억지스러운 일이더냐?"
"뭐..."
"몇백 년을 살았다. 값비싼 마법 재료를 물처럼 쓰고, 영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썼다면 세상에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줬을, 이 우월한 지능을 허비하며."
"파시어..."
"그저,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 욕망을 위해, 꿈을 위해 억지로 붙들어 놨던 이 생명을 놓아주는 거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작고 어린 외양에도 속은 걸지도 모른다. 그녀의 정신은 이미, 세월 속에서 마모된 걸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리고... 남은 이들이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 당연한 일이다."
파시어는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듯이, 담담하게 그녀의 죽음을 인정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이제 오면 인정하지 못 할 일도 아니겠지."
마지막 말을 읊조리듯이, 그 거대한 용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는 억지로 살아 있는 사람이지, 살아 있는 것이 마땅한 인간이 아니다. 그럴 가치도, 그래야 할 이유도 없으니."
인정할 수 없다.
그녀가 이렇게 평안히 죽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네가 내 목을 끊어 주지 않겠나?"
"싫어."
"그대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 몸을 진짜 용과 구분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으니."
"어쩌라고."
"이곳에 남기로 하지 않았나. 공적이 있어서 나쁠 일은 없을 게다. 이 몸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면, 나름대로 도움이 될 거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남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세계는... 내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할 거다. 내 몸 정도라면, 네 뜻을 관철하는 일에 도움이 되겠지."
파시어의 손이, 그 거대한 용의 앞발이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걸 가져가라. 내게 직접 복수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운 일이라면, 어디 박제라도 해 두는 건 어떠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하지만, 알고 있었다.
파시어는 무의미한 말들을 섞어,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말만큼이나, 내가 버티고 있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었다.
"절대, 내 손으로 너를 다시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건 좀 슬프구나. 이 몸, 꼴에 용이라 죽을 방법을 생각해 두지 않았으니."
"...뭐?"
파시어의 말은, 이미 아슬아슬하던 내 정신을 더욱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당연히 네 손에 죽을 거라 생각했다. 이 몸도, 일단은 용의 몸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찢고 베어낼 수 없지."
"그건..."
"이 몸으로 쓸 수 있는 마법으로는, 내 몸에 손톱만한 상처를 주는 것이 전부다. 그보다는, 거대한 바위에 전력으로 달려들어 머리를 박살 내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르지."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보다는, 처음 세웠던 계획대로... 네가 나를 죽이는 게 깔끔하리라 생각했다."
"몇 달은 버틸 수 있다며. 적어도, 그때까지라도..."
"네가 그걸 바란다면, 나는 기꺼이 따르겠노라. 하지만, 그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
"나는 언제라도 미쳐 날뛸 수 있다. 운 좋게 네가 옆에 있다면 모를까, 때가 좋지 않으면 다른 이들을 해치고 말 게다.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일이더냐?"
늘 그랬듯이, 내가 틀렸다. 그녀가 옳았다.
파시어는 가장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모두를 위해 올바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끝에 희생되는 사람이 그녀라 해도, 예외를 두지는 않았다.
"그렇다 이거지..."
나는,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검을 뽑아 들었다.
가능성은 없었다. 검으로 물을 베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모아 옅은 검기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포기하게 되더라도, 마지막에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고 말게 되더라도.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아프면 말해라. 일단은..."
파시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싫었다.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법칙마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증오의 불길이 희미하게 내 검을 감쌌다. 그게 파시어를 태우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