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여? 너를?"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역시, 곱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애들하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다 들었다며? 막을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물론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파시어가 뭘 원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말했지만, 네 시나리오는 진부하다고. 하다못해, '실화에 기반을 둔' 작품이었으면 봐줄 만도 했겠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누구 마음대로 악역을 맡으려고 하는 걸까.
파시어는 나를 속이려 했다. 누군가가 짓지 않았던 죄를 저질렀던 것처럼 기만하고, 나를 속였다.
설령 그 기만으로 피해를 보는 이가 셀리아 자신이라 하더라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파시어가 심판받는다 해도 그게 그녀의 의도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정의로운 일을 했다.'라는 착각을 심어주기 위해, 그녀의 계획에 휘말려 파시어를 죽이는 일은, 기분 나쁜 일이었다.
"에네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조금은 익숙한, 파시어의 타박이 용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악의는 없는 것 같았다. 이전과 비슷한 어조, 비슷한 내용인데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너는 이미 셀리아를 지켰지 않으냐. 네가 그녀 앞에 있는 한, 나는 무슨 수를 써도 그녀를 먹고 너를 돌려보낼 수 없다."
파시어의 말이 옳았다. '먹는다'라는 말이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리서 마법 화살 한두 개를 날려 셀리아의 숨통을 끊는 정도로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이미, 내 계획은 갈기갈기 찢겨 흩어졌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대는 모두를 지켰다. 셀리아도, 네르웬도, 엘레노어도."
"너는 왜 빼냐?"
파시어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쭉 펴진 용의 목 부분은 퍽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다.
달과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밤에 깨어 저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보일 불빛들이다.
아름답지만, 그뿐이다. 용사 파티의 여정 동안에도 질리도록 봐 왔던 밤하늘이다.
그 광경이, 순간 덧없게 느껴졌다.
"형편없는 시나리오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하지만... 이미 관객이 올라와 있다. 연기자들은 분장을 마쳤다."
"너, 설마..."
"한 명은, 무대 위에 올라와서 뭇매를 맞아야 하지 않겠느냐."
파시어의 말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미 용의 몸을 얻었다. 돌이킬 방법은 없다."
파시어의 말에,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럴 리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몸을 바꾸는 건 가능했잖아. 이제 와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새로운 육체를 만들 자원도, 시간도 없다. 시체에 들어가거나, 다른 인간의 몸에 들어간다 한들 거부반응이 일어날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대책 없는 짓을 한 거야. 어?"
파시어는 별을 올려다보던 고개를 낮춘 채, 나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그녀는 몸을 눕혔다.
내가, 그녀와 마주 볼 수 있게.
"미안하구나."
용의 눈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짧은 단어와 거친 말, 거대한 눈으로 파시어의 감정이 느껴진다.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에네렐, 너를 확실히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어.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내가, 뭐 복잡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구나. 이상하군. 정말로, 분명히... 나를 증오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 포기했다는 눈빛이 싫었다.
파시어다. 엘레노어가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파시어는 어떤 상황에서도 답을 만들어낼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떻게든 머리를 감싸 안은 나는, 최대한 빨리 방법을 생각해보려 했다.
"마법 재료, 얼마나 있어야 하는 거야? 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면, 분명 저번에 썼던 것과 비슷한 양의 재료들이..."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재료가 있다 한들, 나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단시간에 만들 능력이 없다."
조급해졌다. 답답해졌다.
"이 육체는... 일시적인 물건이니라. 애초에, 살아남기 위해 만든 몸이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 그럴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효율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그녀다. '가짜 마룡'을 만든다 한들, 비효율적인 기능들을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일단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 응? 내가 남의 일이라 이렇게 말하는 거 맞긴 한데, 용으로 사는 게 솔직히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니잖아."
조금 불편하고 답답하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런 몸이라고, 파시어가 마법을 쓰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꼭 죽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그녀를, 꼭 여기서 죽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영원히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석 달이면, 이 용의 몸에 내 이성을 잡아먹히겠지."
"젠장..."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과정에 '몇 달'이 소모된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이며, 거대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호르몬의 변화, 약물의 투입이라는 단순한 신체 변화로도 커다란 충격을 받는 것이 인간의 정신이다.
마룡의 몸을 얻은 그녀가, 이성을 유지한 채 버틸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영원하지 않다.
"너, 꿈이 있던 것 아니었냐? 그,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살게 해 주겠다던 꿈 말이야!"
아득했다. 허황되었다.
모든 인간에게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흘러가는 시간과 필멸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을 제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걸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 꿈이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
"저길 봐라."
그녀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용의 몸으로 땅에 몸을 붙인 채 하늘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덧없다고 생각했다. 저 하늘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별은 항상 저 하늘에 있었으니까. 착각해 버리고 만 것이다."
파시어는 아련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했던 건, 사람이었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 누구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사람. 그들과 함께한 기억, 추억... 그걸 돌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불안했다. 이대로 그녀가 말하게 두면, 그 끝에 파시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건 인정할 수 없었다.
파시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뭐, 살다 보면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또 만날 수 있겠지. 진정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보자."
"아니. 나는 이미...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에 끼어들어 가기에는 너무나 추악한 몸이 되어버렸다."
"되돌릴 수 있을 거다."
근거는 없다. 어쩌면, 내게도 확신이 없다.
그저 내가 그걸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을 파시어에게 전염시키려 하고 있었다.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 터인 내 꿈을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켰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
"그 꿈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분명...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내가 생각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꿈이야."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실패하지 않았더냐."
서서히 고개를 내린 파시어는, 그 거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황궁에서... 네가 에리니스에게 몸을 맡겼다면, 그녀의 권능을 복수와 파멸을 위해 사용했다면."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
"그건 네 자비였다. 네 의지였고... 하지만, 너를 만든 사람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실패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는 것처럼,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꿈이 만들어낼 이상향이... 언젠가 올 수도 있지. 하지만, 그곳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을 것이야."
죽음으로부터 한 번 자유로워졌던 그녀였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이 닥쳐올 때는 너무나도 평안해 보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가 그걸 허락해 준다고 했어? 네가 언젠가 죽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 돼. 오늘은 안 돼."
파시어의 멸시,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무시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파시어가 그녀의 계획대로, 아니 심지어 그녀의 계획이 실패했음에도 죽음을 맞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인생은 길잖아. 너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길 테고."
"에네렐..."
"언젠가는...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당장은 몰라도, 네가 꿈꾸던 그 이상향에 들어갈 만큼, 좋은 사람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르잖아."
"미안하지만..."
파시어는 용의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실패한 사람에게 기회를 다시 줄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고룡이,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타일렀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