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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04화 (204/217)

엘레노어라 하더라도, 이걸 버틸 수는 없었다.

그녀의 검은 저 멀리 날아올라, 힘없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 충격을 받아내지조차 못한 엘레노어는, 튕겨 나가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죽진 않았지?"

즉사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셀리아가 생각났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는 성녀의 힘을 잃은 상태였다.

아니, 그 로브가 있으면 당장 치료 자체는 문제 없이 할 수 있으려나.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시군요."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내 마음이다."

어쩌면, 옳은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를 심판하는 것, 혹은 복수하는 것. 그게 더 깔끔하고, 올바른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리고 싶다.

황제가 엘레노어를 거둔 것이 '군살' 정도의 약점이라면, 지금의 나는 온몸이 살로 가득 찬 괴물일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엘레노어의 눈빛은 아주 약간,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설픈 인정과 충동으로 만들어진, 나라는 사람을.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저는, 아무 가치도..."

"그건 내가 정해."

쓰러진 사람을 각박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더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크으으윽..."

그녀의 가슴 위에 한쪽 발을 올려놓은 나는, 서서히 그 발에 체중을 더했다.

"네가 그 너만의 '의무'를 다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건 아니지."

"으으..."

"반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살아 있기만 하는 너에게도... 누군가는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마, 그 저주스러운 그녀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면, 그걸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더 반항할 생각이냐?"

그녀의 가슴에 올라가 있던 발을 떼고, 자세를 낮춰 쪼그려 앉아 엘레노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이제 남은 힘도 없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

헛웃음을 지은 나는, 털썩 주저앉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어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쨌든, 살았잖아. 너도 그렇고, 셀리아도 그렇고, 아마 파시어도 그럴 거고."

"그건..."

엘레노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씩,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네가 비겁하건 말건, 여기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리고 난 네가 어떻게 느끼든 신경 안 쓸 거야."

우습고도 신기했다. 커다란 귀를 펄럭여 하늘을 나는 코끼리를 보는 것만큼.

"그런데, 그, 그냥... 옳지 않은 일인데, 속죄해야 하는데, 당신을 돌려보내야 하는데..."

그만큼이나, 엘레노어의 이 감정은 상상해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겹게도, 기쁘다고 느껴져서, 그녀가, 제가 살아남았다는 게, 당신의 자비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할 수 있다는 게, 이기적이고 추악하게도, 다행으로 느껴져서..."

울고 있었다.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기쁜 얼굴로.

"이건,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지금이라도 목숨으로 사죄해야 하는데..."

"네가 마지막까지 내게 엿을 먹이고 싶은 거라면, 해 봐. 혀 깨물고 죽는 것까지 내가 어찌할 수 있겠냐."

"시도해... 시도해 봤습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무의미하고, 가치 없고, 무서워서... 죽음을 두렵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터인데..."

울고 있다. 쓰러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눈의 양옆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

차갑다고 생각했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띈 무언가라고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인간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불가항력적이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띈 채, 엘레노어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됐다. 너무 아프면 뭐, 걸어서 셀리아라도 만나 보라고. 아니, 네르웬도 근처에 있으려나..."

네르웬이 약초를 빚어 만든 연고도, 신성력만큼은 못하지만 꽤 쏠쏠한 치유량을 가지고 있었다.

뭐, 엘레노어도 지금 당장 위험해 보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늘이 끝나고 나면, 적당히 다 둘러업은 다음 어디 신전이나 병원에라도 처박아 두면 해결될 것이다.

"에네렐."

"아, 또 뭐."

고개를 돌려 엘레노어를 바라보자,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번져 있는 눈물 자국과, 이곳저곳에 생겨 있는 상처를 가득 안은 몸으로,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 상체를 겨우 세웠다.

"감사... 합니다..."

그리고, 뻣뻣한 몸을 억지로 세워 그걸 굽혔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시 쓰러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불안해서 살짝 다가가 코에 손을 대 보니, 숨은 잘 쉬고 있었다.

"깜짝 놀랐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느껴진다. 인공적인 거대한 마기, 흉험하고 살인적인 기운이.

그리고, 나는 굳이 그걸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파시어..."

쓰러진 엘레노어를 남겨둔 채, 나는 그 마기의 진원지를 향해 걸었다.

달빛이, 엘레노어의 몸을 따스하게 비춰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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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나?"

검은 용이었지만, 대체 재질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그놈의 비늘은 달빛을 선명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마룡, 아니 마룡이 되지 못한 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파충류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건 꽤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 지 알고 있으니 무섭지는 않았다.

"대답해. 너, 말 할 수 있는 거 알아. 누군지도 알고."

거대한 용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답을... 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니."

조금 거칠었지만, 확실히 파시어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네가... 이걸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숨기려고 했으면 좀 더 철저했어야지. 나와 싸웠을 때 조금만 더 잔인했었더라도,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는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시어가 챙겨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을 찾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어설펐다. 잔인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어. 어쩌면,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방심?"

"내 계획은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검은 용의 입 안에서, 자그마한 불꽃이 일렁거렸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죽이던 사악한 마법사가, 정의롭고 명예로운 용사의 손에 잡혀 그 최후를 맞이한다."

파시어는 아무렇지 않게, 잔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퍽 괜찮은 이야기 아니었나."

"진부해."

그녀는, 용의 얼굴로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던가... 그래도, 부디 너그러운 얼굴로 지켜봐 줄 수는 없었는가. 초보 극작가라,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어."

"관객이 뭐, 극작가의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 이야기였어."

"그런가... 이번에도, 부족했군."

나는 성검을 굳게 잡은 채,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했던 얘기 반복하는 건 싫은데. 혹시, 너도 불만 있어?"

"그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네. 에네렐, 네가 이곳에 와서 했던 말은, 모두 선명하게 듣고 있었으니."

"다행이네."

나는, 지쳐 있었다. 그리고 파시어는, 말로 누군가를 제압하는 일에 그 연륜만큼이나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지쳐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너를 적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네 결심이 그토록 굳건하다면, 내 구차한 말로 너를 설득할 생각은 없다."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너도 싸워 볼 생각이냐?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없는데."

분명 용은 강하다. 저게 용이 아니라, 용의 형상을 한 무언가라고 해도, 그게 강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불을 뿜을 수 있는 목과 폐,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그 무지막지한 근육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싸워? 내가? 너와?"

파시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비효율적인 일이다. 애초에, 그런 상태인 너를 이 몸으로 이기란 말이냐?"

"...역시 무리겠지?"

"엘레노어의 눈을 보고, 나는 아무리 너라도 그녀를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그 검의 도움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엘레노어의 강함은 그저 그녀의 각오에서 나왔다.

"그 엘레노어가, 무서울 정도로 강했던 그녀가 네 앞에 쓰러졌다. 그런 너를, 내가 어찌 싸워 이기란 말이냐."

용의 형상으로 헛웃음을 짓는 파시어를 보고, 나도 함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셀리아를 먹고, 그 다음에 네게 심장을 가져다주라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건 우습고도 억지스러운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해 봤지만, 다행히 파시어는 나를 막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 너까지 고집 피우면 좀 짜증 날 줄 알았거든. 뭐, 그럼 돌아가자."

나는 싱긋 웃은 채,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장은, 분노보다 안도가 더 컸다. 파시어에 대한 원한을 풀어내는 것은 조금 뒤로 미뤄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야, 그러고 보니까 그, 마법으로 애들 들고 다니면 안 되냐? 봤으면 알겠지만, 내가 좀 요란하게 싸우고 와서. 걔네를 좀 들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조금 힘들 것 같구나."

차갑다. 파시어의 목소리가, 슬픔과 아픔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왜?"

"그대는 오늘, 여기서 나를 죽여야 할 테니까."

파시어는, 내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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