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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203화 (203/217)

"예전부터 싫었어. 정말, 이가 갈리도록 짜증 났지."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이다. 깎여 나가지 않았다. 성장하지 않았다.

"뭐만 하면 의무, 의무... 정말, 진절머리 쳐질 정도로 혐오스러웠다고."

어쩌면,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입으로만 옳은 것, 바른 것을 떠드는 나에 비해, 그녀는 조금의 희생을 감수할지언정 착실히 세상에 득이 되는 일을 해나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희생되는 쪽에 있었다. 감정적으로든, 실제 위치로든.

그래서 더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제 실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죄드리려 합니다."

엘레노어는 위에서 찍어 내려오는 무자비한 검격을, 완벽한 자세로 흘려 막아냈다.

내 힘을 최대한 끌어낸 나지만, 그걸 휘두르는 나는 여전히 어설프고 약했다.

평온한 상태에서도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었던 검이다. 감정이 동요된 상태라면, 검의 궤도는 이전보다 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용사의 힘이다. 미약한 검기나마 뽑아내는, 지키려는 사람의 힘이다.

에리니스의 힘이 있다. 한 번 갈라섰다고는 한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선택받은 전사였다.

올바른 목적, 올바른 감정, 올바른 신념과 아주 약간의 공경을 더한다면.

복수를 위해, 분노를 품고, 내 감정을 관철하기 위해 에리니스의 이름을 부른다면.

"틀렸어!!!"

여신의 힘이, 내 몸에 깃든다.

그 검격이 얼마나 어설프다 해도, 그녀가 내 검을 얼마나 완벽한 자세로, 완벽한 순간에 막아낸다 해도.

더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를 찍어 누를 만큼, 거대한 권능이.

"비슷하지만, 다르단 말이야!"

엘레노어 역시, 바뀌지 않았다.

"어째서..."

제국이라는 것을 포기했을 때,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원망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 분명 저일 테니까요."

"원망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냥 좀 바뀌라고!"

나는 쉬지 않고 검을 내리쳤다.

"의무, 좋지. 그걸 향해 달려가는 사람? 멋있긴 하지. 그런데... 그래도 너는, 주위 사람들을 좀 보란 말이야!"

"그건..."

"내가 시발,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공감하라고! 그게 싫으면 하다못해 슬퍼하기라도 해!"

하다못해 작은 위로의 말 한 마디만 있었더라도.

아니면, 그녀가 여정 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조금 위로하기만 했어도.

어쩌면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공감과 위로에는 비용이 든다. 정신적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용사 파티의 여정은, 그런 '군살'이 허용될 정도로 만만한 여정이 아니었다.

여정 종반에는 나를 공공의 적 삼아 스트레스를 토해냈던 걸, 묵묵히 받아줘야 할 정도로 몰려 있었으니까.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의무니까 이를 악물고 지키고, 그 밖은 칼 같이 쳐내 버리는 사고방식. 그 자체가 싫다고!"

용사 파티로서의 여정 동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버리고 나를 가혹하게 몰아세웠던 것처럼.

"그래서, 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속죄는 바뀐 사람이 하는 거지. 넌 바뀌지 않았잖아. 그냥, '의무'의 자리에 나를 올려놓았을 뿐이지."

그것도 엄청난 충격이고 거대한 변화다. 평생 지켜 왔던 가치를 한순간에 버리고, 나를 그 자리에 앉혔으니까.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 아픔, 내 고통, 그녀가 내게 한 일에 대해 그녀 역시 아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바뀌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네 목표가 되었네. 내 귀환이 네 의무가 되었고, 그걸 위해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조차 쓰지 않지?"

황실의 혼란, 제국의 분열, 셀리아와 파시어의 목숨.

엘레노어도 아플 것이다. 그런데, 견뎌내는 거다. 그건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니까.

그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남은 것들을 잘라내는 것이.

"...우선 순위를 정해야 했습니다."

"그 사고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싫었어."

붉은 기운이 더 강해진다. 이제는, 달빛보다 더 환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아직 널 충분히 때려 두지 못한 것 같네."

"에네렐. 하지만... 그런 약한 사고방식으로는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뿐입니다."

"뭐?"

"황제가,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자신의 의무에서 등을 돌린 자의 최후는, 비참할 뿐입니다."

힘겨워하고 있다.

거대한 성처럼 굳건했던 그녀의 검에, 서서히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말 사이사이로 검이 꽂히고, 막힌다.

그녀라 해도 영원히 버틸 수는 없었다. 몸에서 상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네 부모마저 파는 거냐."

"부모라 할지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 저는 더 이상 그들을 존경할 수 없습니다."

"그래?"

"욕망으로 저를 낳았습니다. 탐욕으로 저를 키웠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저는, 당신과 만나 그대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네가 여기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더 고통스러워!"

엘레노어의 검이 느려진다.

지금 나는, 신의 투사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검을 들고 버티는 게 한계였다.

아니, 이것마저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떤 인간도, 어떤 검사도, 이 힘을 가진 존재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건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인생을 의무에 바친 사람이, 결국 다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야?"

뭐,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들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피해 없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리석지 않은 행동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차마 잘못된 행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부와 영광을 버리고, 둘 모두를 속이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했던 그녀의 어머니.

자신의 딸은 아니었지만, 결국 엘레노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황제.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 행동 자체가 그릇되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방기입니다."

"그렇다 해도!"

조금은, 황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그대와 저를 맺어 다음 황제를 만들어 했다는 계획에!"

"시발, 나랑 황제는 남남이잖아. 나는 그 양반한테 그래도 되는 거지. 그래도 넌 안 되는 거 아냐? 아버지잖아!"

"그 의무를..."

"애초에, 그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너였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책임은 고통스럽다. 불편하고, 번거롭고, 지루한 일이다.

그걸 해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자신의 욕망이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이 너를 사랑으로 대해 줬으니까,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황제가 너를 아껴 줬으니까! 그래서, 의무가 너를 묶을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엘레노어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런 사람들마저, 나를 위해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는 거잖아. 그럼 내가 그걸 '아이고, 감사합니다.'하면서 인정할 것 같아?"

인간 엘레노어는, 싫어하기에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었다.

아니, 너무나 명확한 사람이었다. 그 공과 실이 분명한, 미워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존재.

하지만, 기사 엘레노어는 아니다.

"의무는, 이유가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말했잖아. 너는 황제의 딸도 아니었고, 그냥 욕망의 산물에 불과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싸웠지."

"그건 제가 기사이기 때문에..."

"아니, 그건 그 사람들이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의무가 아닌데도, 너를 지켰기 때문이야."

그리고 엘레노어는, 의무라는 명목하의 그들의 감정까지 깔아뭉개려 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나를 위해서.

그걸 내가 원할 리 없었다.

"그건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태어난 게 겨우 저였다면, 처음부터 없는 것이 나았습니다!"

"아니."

수도에 있었을 때,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엘레노어를 동경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위에서 들리는 모든 이야기가 그녀의 무용담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길거리에 나가면 그녀에게 친절을 받았다는 사람이 있었고,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없는 것이 나았다니, 그럴 리 없지."

엘레노어의 과거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현재를 혐오하는 나도, 심지어 그녀 자신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당신도 제게 검을 들이밀고..."

"이건, 복수다."

그녀의 의무 아래 짓눌린 인간의 복수.

엘레노어가 이제 와서 내게 얼마나 많은 부채감을 느끼건,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건 내 알 바 아니었다.

거대한 힘이 검에 맴돈다. 붉은 기운과 분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최대한 조심해 볼 테니, 한 대 맞고 정신 차리라고."

"크윽..."

엘레노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순히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뭐, 이런 말 몇 마디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입니다!"

엘레노어가 필사적으로 내 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자고 있으라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안의 힘을 끌어올렸다. 성검이 꿈틀거렸다.

이내 성검은 요동치며 움직여, 반죽처럼 쭉쭉 뻗어 나갔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붉은색의 판이 되었다.

내 몸을 충분히 가리고도 남을 정도의 거대한 방패를 든 나는, 그걸 쥔 채 엘레노어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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