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유아적인 내 각오를 들이밀어 봐야, 무너질 뿐이다. 짓눌릴 뿐이다. 엘레노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회한에.
그렇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힘을 모두 끌어모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였습니까. 이렇게 많은 고통과 죄책감이 당신을 얽매고 있었던 겁니까."
"사람 말을 들어! 내가 너희들 따위에 부채감을 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본능이다.
내가 지구인으로 살아왔던 시간들이 만들어낸, 나라는 존재.
기쁨, 슬픔, 분노, 절망, 혐오.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용사의 힘을 넘겨주고 황궁에서 지냈던 반년 남짓한 시간과,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필요할 때만 얼굴을 비추었던 반년 남짓한 시간.
그리고 짐꾼으로 살아왔던 2년. 적지 않은 시간이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수많은 죽음과 셀 수 없이 봐 왔던 시체도, 나를 무디게 하지는 못했다.
죽는 건, 싫다. 파시어의 심정을 솔직하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구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결별이라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내게 선택권을 빼앗아 간다. 분노도, 증오도, 복수도, 용서도, 묵인도.
죽은 이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선택권을 빼앗아 가는 일이다.
힘겹게, 그녀의 검을 쳐낸다.
몇 번이고 위험한 상황이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상처가 벌어진다. 이미 한 번 화살에 맞아 자잘한 피가 흐르던 몸은, 엘레노어에 검이 찔리고 베여 너덜너덜해졌다.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릇된 일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짐을 떠넘기면서도, 당신이 그걸 어떻게 느낄지 생각지 못했습니다."
분명 그녀도 지쳤을 텐데, 흔들리지 않는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쓸 수 있는 모든 걸 써야 한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제국으로 돌아가서 정치나 좀 하라니까!"
하지만 내 힘은 한정되어 있었다. 짐꾼으로서 엘레노어와 몇 년 정도 대련했던 수준의 검술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감정을 뽑아내야 한다.
"나는, 지켜낼 거라고!"
푸른 기운이, 검 끝에 아른거린다.
"내 거야... 내 거라고."
거대한 소유욕과, 그걸 수호하겠다는 마음이. 탐욕이 성검을 가득 메운다.
이렇게 뽑아낸 검기인데도, 엘레노어가 용사였을 때 뽑아낸 검기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여렸지만.
그래도 이건 내 진심이었다.
"아직도... 그걸 담고 계셨던 겁니까."
"처음 용사의 힘을 받았을 때부터, 네게 용사의 힘을 넘겨주었을 때, 온갖 고통을 견디고... 이겨내지는 못했을지언정, 참아냈을 때에도."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감정을 억세게 부여잡아, 검을 쥔 두 손에 불어넣는다.
"이건, 버리지 않았다고."
휘청거리고 희미해졌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지켜낼 거다. 그게 누구든지."
"저는, 셀리아는 당신을 방치했습니다! 아니, 더 나쁩니다! 당신을 증오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외를 둘 수는 없겠네."
엘프의 숲에서, 네르웬을 지켜낸 것처럼.
"당신은 어째서,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까."
다시, 그녀의 검이 쏟아졌다.
내 검에 맺힌 검기가 엘레노어의 검을 튕겨냈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검을 막아내지 못해 팔에 상처를 입는 일도 줄어들었다.
엘레노어의 검도 어지간한 명검인지, 용사의 힘으로도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다. 그녀와 나의 격차는 컸다. 검술가로서의 그녀는, 나와 아득한 먼 곳에 있었다.
"아직도 그 무의미한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까. 어째서."
그녀의 말이 내 신경을 자극했다.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누구 멋대로 그걸 무의미하다고 하는 거냐."
"그게 사실이었지 않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기사가 되기를 요구한 것은, 민간인이었던 그대에게 모든 짐을 떠넘긴 건. 명백한 죄악이었습니다."
"네 일은 마음대로 생각해. 그걸 후회하건, 소중히 여기건 그건 네 자유니까."
이를 꽉 깨문다.
해법이 보일 것 같았다. 용사의 힘으로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힘으로는 부족했다.
그녀에게는 쌓인 게 많았다.
"하지만, 내 희생을! 내 헌신을 무의미하다고 매도하지는 마!"
집념이 성검을 감싼다.
"끝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어.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너와 황제의 말에 속아 헛짓거리를 한 걸지도 모르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처럼 엘레노어의 검을 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때의 나는, 가치 있는 존재였다고! 지금보다 훨씬 더!"
일관성 없는 말이다.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셀리아에게는 내 과거를, 그들을 혐오하고 부정하며 내 선택을 저주하던 그때의 나를 부정하겠다는 말을 했던 내가.
이제 와서는, 그보다 더 과거의 내가 모욕당했다고 느껴서 분노하고 있다니.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몰랐을지도 몰라. 이 세계가 얼마나 아프고 위험한 곳인지 깨닫지 못했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약속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런 나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걸 지키려 했던 나는, 자랑스러웠다고! 멋있었다고! 비록 추하게 무너졌을지언정, 그 시작은, 시작은...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게 아니었다고!"
선택받아, 싸울 각오를 하고 떨어졌던 나.
그리고 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여기고, 그 힘을 내려놓았던 나.
결국에는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위해 작은 일이나마 대신해 주려 했던 나.
용사 파티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엘레노어의 단련을 받아들였던 나.
네르웬과 파시어의 멸시와 비난을, 애써 이해하고 포용하려 했던 나.
비록 끝이 좋지 않았다 한들, 내가 버티지 못했다 한들.
그걸 시도했던 나는, 내게 절대 부끄러운 기억을 물려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랑스럽다고! 그런 시도라도 해 본 내가, 첫 전투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내가, 너희 같은,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내가..."
평범한 지구인의 삶을 살았더라면, 이런 전투에 끼어들 수 있었을까.
이전에는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삶이었고, 나는 내 보수적인 기대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버텨 왔다.
"네가 뭔데, 그걸 비난하는 거야!"
"당신이 지지 않아도 되었을 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거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내가 선택해서 했으니까!"
느껴진다. 역시,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가 올바른 감정과 정확한 의도,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면 넌 항상 그딴 식이었지."
모든 분노에 이유가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마구잡이로 엘레노어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다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무만 앞세웠으니까."
"그렇다면, 이 몸을 죽이고 가십시오. 아주 잠깐만, 잠깐만 더 기다리시면 됩니다."
엘레노어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룡이 마지막 준비를 마치고, 의식이 거행되기 직전이라면, 얼마든지 이 몸을 내어드릴 테니까요. 심장을 찌르는 게 거부감이 드신다면,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것도..."
"하?"
"당신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한 채, 당신을 짓눌러 제 욕심과 제 영광을 취하려던 인간이었으니까요."
목구멍에서, 억센 말이 솟구치는 걸 억지로 멈춰야 했다.
이거, 정말 해도 되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관성 없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저것 가리면서 싸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의 너를, 네 멋대로 깎아내리려 하지 마!"
내 말을 들은 엘레노어는,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그녀가 검을 아래로 내려놓았지만, 나는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한 발짝 더 내디뎌, 힘을 쏟아 성검을 휘둘렀다.
"그때도 비슷한 이유로 역겨웠고, 증오스러웠지만, 적어도 너는... 그때, 욕심 따위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었어!"
"그건..."
"동경했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산이나 폭포를 보는 느낌이었어.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그녀의 눈에 감정이 들어가기 시작한 건, 마지막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였다.
마왕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싸움이 쉽지만은 않았다. 용사의 힘을 복원하는 것도, 마왕군의 군단장과 싸우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냈다.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걸 버틸 만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녀가 그 의지로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그건, 절대 비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다. 본인, 엘레노어의 입이라 해도 그걸 비난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걸 죽도록 혐오했을지언정, '욕심'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입 닥치란 말이다!"
"어느 장단에 맞추란 말입니까... 이렇게 정처 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조금 지쳤는지, 엘레노어의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나를 안쓰럽게 보는 것 같아, 다시 화가 치솟아 올랐다.
"정처 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게 무의미하다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모르겠으니까요.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몸은, 일이 끝나면 언제든지 내어드리겠다고."
"나도 처음부터 말했잖아. 내 목표는 모두를 구하는 거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부르기 위해.
"그게..."
하지만, 엘레노어는 내 검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용사의 힘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력한 힘의 편린이, 붉은 조각이 되어 검에 따라붙고 있었으니까.
"그걸 위해, 힘이 필요했을 뿐이야."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