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다가온다.
더 이상 말을 섞는 건 시간 끌기에 불과했다. 그것마저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내게 더 많은 시간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의 검이다. 쳐내는 것도,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방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건 말 그대로 훈련이었다.
그때 내가 불합리하다고 느껴졌던 그녀의 검격은, 내가 받아낼 만한 위치의, 내가 볼 수 있을 법한 공간으로, 버틸 수 있을 만한 힘으로 내리치는 공격이었다.
이건 아니다.
진짜로 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가해지는 공격은, 몇 배 무겁고, 빠르고, 이질적이었다.
"꽤 하는데..."
"마음을, 다잡았을 뿐입니다."
다르다는 생각은 했었다. 내 감각이 아무리 무디다 한들, 몬스터를 향해 내리치는 검과 훈련 중에 내리치는 검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격은 그걸 아득히 벗어난 경지에 있었다.
막지 못해서는 안 된다. 살인검의 힘을 얻었다고 한들, 그것마저도 온전히 쓰지 않고 있는 그녀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살의 없이 쓰는 것이다. 단두대의 날을 뭉툭하게 만들어, 타격용 무기로 쓰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일이다.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내 힘이 더 강하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자세로도 그녀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고, 제대로 된 방어에 실패해도 엘레노어는 섣불리 다음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깊이가 다르다.
오크 로드를 죽이고, 흰 나뭇가지와 싸우고, 중간지대의 거대한 괴물들을 사냥하고, 그 외 수많은 인간과 괴물들과 검을 맞댄 나였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그녀가 했던 것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모자랐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받았던 훈련을 '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고된 훈련을 받았던 그녀다.
소수의 기사단으로 산적을 소탕하고, 괴물을 소탕하며 실전 경험을 숨 쉬듯 쌓아 온 그녀다.
무엇보다, 용사였다. 현존하는 인간 중 그 누구보다 많이, 생사를 넘나드는 강적과의 싸움을 해 왔던 그녀다.
내가 오크 로드와 싸웠을 때는, 그 피부를 검으로 베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두껍고 질긴 피부에 정확한 각도로, 강력한 힘으로, 완벽한 순간에 검격을 날릴 검사가 많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내가 쥐고 있던 검이 성검이었다 한들, 어지간한 기사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그때 내가 느꼈던 충격과 무력감을 엘레노어는 그저 검 한 자루로 내게 쏟아붓고 있었다.
완벽한 각도, 완벽한 지점, 완벽한 순간에 내 검과 그녀의 검을 맞대, 한참 모자란 힘으로도 내게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진짜, 무시무시하네!"
이건 싸움이라기보다는 기예에 가까운 행위였다.
몇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다트를 표적지에 명중시키는 곡예사처럼, 그녀는 완벽한 검격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버텨내는 만큼, 그녀는 튕겨 나간다. 용사의 힘을 가지고 휘두르는 어설픈 검격이라 한들, 어지간한 오거나 거인에 비견될 정도로 강대한 검이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이를 꽉 악문 채 그걸 버텨내고 있었다.
각오가 다르다. 엘레노어의 일생이 들어간 신념이, 그녀를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더 공격적으로 검을 휘둘러 그녀의 균형을 빼앗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저기에 닿으면 나라고 해도 다친다.
엘레노어의 실력을 생각하면 실수로라도 심장에 칼이 박힐 일은 없겠지만, 여기서 쓰러지면 아마 당분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릴 수밖에 없다. 엘레노어의 검은, 그만큼 매섭고 날카로웠다.
게다가, 나는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네르웬은 내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그녀를 찾고 쫓는 것은 어마어마한 체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몸 이곳저곳에 박힌 화살 세례는 덤이었다. 이제 와서 피 몇 방울 나는 것 정도야 따끔하기만 할 뿐이지만, 엘레노어 같은 검사를 상대할 때는 그 '따끔한 수준의' 피해도 치명적이었다.
셀리아를 설득하며 소모된 정신력도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환각을 보는 것, 그녀와 대화하는 것, 셀리아의 애원을 거부하고 내 의지를 관철시키며 다시 한번 환상을 보여 주는 것.
완벽한 상황에서도 이 엘레노어를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용사의 힘이 가져다주는 회복력을 감안해도, 승기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읏!"
"다음에는, 자르겠습니다."
왼팔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녀의 공격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에는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팔이 베이지 않았으면, 가슴이 베였을 것이다.
"아프네..."
엘레노어의 체력 또한 급속도로 소모되고 있었다. 입에서는 거친 숨이 흘러나왔고,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레노어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압사할 것 같다. 무겁다. 아무리 그녀라 하더라도, 이런 기예를 재능만으로 얻을 수는 없다.
나보다 훨씬 많은 시간 동안, 온갖 고난과 고통, 시련과 아픔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강한 의지와 신념, 각오와 투기로 그 모든 것을 떨쳐냈을 것이다.
우월하다. 보고 있는 내가, 나름대로 평범한 축에는 속한다고 생각하는 내가 비참해질 정도로 높은 곳에 있다.
"여기까지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아무도 당신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파시어나 셀리아가 죽게 된다 한들, 그건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파시어를 내 손으로 죽인 다음에도, 내가 느낀 것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급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이겠다고 했다.
시체를 사들이다가 범죄 조직의 자금책을 마련해 준 건 사고라고 하더라도, 당장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살육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 내게 죄악감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 대한 학대도, 무관심도, 멸시도 그들이 스스로 저질렀던 죄입니다."
"그렇겠지."
"그걸 어떻게 속죄할지도,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일입니다."
하지만 파시어를 죽였을 때 내 가슴을 덮친 건, 상실감이었다.
아무리 싫어하는 가족이 있다 해도, 그가 좀비가 되어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도.
그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실감을 느끼고 말 테니까.
"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은, 이 세계는 당신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피를 마셨습니다. 당신이 더 이상 희생하지 않는다 해도,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다시 검을 쥐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싫다고. 내가, 너희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엘레노어의 인생이 나보다 깊다. 그녀의 각오가,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의 뜻에 굽혀 줄 이유는 없었다.
"아플 뿐입니다. 그대는,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당신이 노력했다고 기억하겠습니다."
나는 말 대신,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엘레노어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내 검을 막아냈다.
"내가... '적당히 이 정도로 노력했으면 충분하지.'라고 생각하고, 물러설 것 같았어?"
아무리 그녀의 검이 날카롭다 해도, 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녀가 먼저 지칠지도 모른다.
내 몸에는 이미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지만, 당장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네 말처럼, 나 때문에 너희들이 죽는다는 죄책감 때문에... 내키지도 않으면서,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고!"
어쩌면, 나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짐승처럼,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깊은 생각도, 고결한 의지도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엘레노어가 얼마나 강한 각오를 가지고 있더라도, 내가 그녀의 뜻을 존중해 줄 이유는 없다.
그녀의 검이 휘둘러진다. 여전히 압도적이고, 여전히 완벽하다.
엘레노어의 공격은 내게 상상도 못한 위치에서, 상상도 해보지 못한 속도로 들어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냈다.
떨리는 다리를 땅에 처박고, 흔들리는 손으로 검을 잡은 채, 그녀의 날카로운 공격을 어설프게나마 쳐냈다.
"나는,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내가 살던 곳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영원한 이별이란 것은 아주 나이가 많이 든 사람, 혹은 불행하게 병이 생긴 사람의 전유물이었던 환경이다.
그런 상황에서 생긴 내 인식은, 어쩌면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건 내 본능이었다. 내 감각이었고, 내 생각이었다.
엘레노어의 결의처럼 회한과 아픔, 반성과 진보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파시어도, 네르웬도, 셀리아도, 너도.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달콤한 사탕을 먹고 싶다고 울먹이는 어린아이처럼 어리석다. 엘레노어의 감정과 결의를 땅바닥에 짓밟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