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96화 (196/217)

"깨어 있구나?"

셀리아는 과욕을 부렸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만 해도 충분했을 것을, 억지로 왜곡을 넣었으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 모든 기운이, 거대한 관 안에 몰려 있었다. 아마 저 안에 셀리아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걸음 걸었다. 내게 힘이 생겼다는 것이, 이곳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직도 발걸음은 무겁고, 수많은 감정들이 내게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내 의지가 더 강했다.

"누굴 눈뜬장님으로 아는 거야. 내가 기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생생한 기억은, 내게 남아 있었던 증오와 슬픔, 멸시의 잔불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나를 물러나게 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단순한 반골 기질이었을지도 모른다. 셀리아가 원하는 것, 내가 여기서 물러나 조용히 귀환을 기다리는 것을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고 있다고. 아니, 잊어버렸어도 그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면 기억날 수밖에 없지."

어설픈 감정의 폭포 사이로 나를 밀어 넣으면, 내가 멋대로 그들을 증오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 증오가 내 기억을 덮지는 못했다.

"너, 표정 그딴 식으로 짓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어!"

마지막 순간, 셀리아는 불만이 가득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더 슬프고, 애처롭고, 지쳐 있는. 아픈 모습으로 나를 바라봤었지.

"나랑 눈 마주쳤을 텐데? 내가 그딴 식으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거냐!"

조작이다.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기억이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녀의 망상이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다. 용사 파티가 나를 괴롭혔던 기억, 엘레노어의 수련과 홀로 씻는 내 모습, 파시어의 심부름과 셀리아의 요구.

어느 것 하나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속지 않을 수 있었다.

"어딜 내 기억을 오염시키려고..."

헛웃음을 지으며, 나는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미안해요."

이제야, 셀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목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파동 같은 느낌으로, 내 뇌에 직접 그녀의 감정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건, 매우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나 하나의 감정조차 인식하기 힘든데, 셀리아의 감정이 끼어들어 온다니.

"준비하고 있었어요. 에네렐을 돌려보내기 위해, 몸을 씻고 있었죠."

말이 무겁다. 그녀의 슬픔이 흘러들어온다.

불쾌하다.

셀리아의 감정을 전이 받은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에 자신의 능력으로, 죽으려 했던 나를 억지로 일으켜 살렸으니까.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그녀가 품고 있던 희망을 아낌없이 내게 쏟아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가 느낀 절망, 슬픔, 고뇌, 고통, 우울, 절망. 그뿐만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름 붙지 않은 부정적 감각들이 내게 흘러들어오고 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느낀 이 감정들은 셀리아가 느꼈던 감정들의 편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걸 내게 주겠다는 거냐?"

"분명, 돌아가면... 행복해지실 테니까요."

"너를 죽이고?"

아주 조금, 편안한 감정이 새어 들어왔다.

조금이나마 숨을 쉴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내가 한 말에 반응했다고 생각하면 기뻐할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나, 아무것도 모르고... 에네렐을 괴롭게 만들었어요. 그때 내가, 그 주문을 걸지만 않았다면."

"하!"

우습다. 한 번 짧게 웃고 나니,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셀리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속죄니 사과니 떠들고 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는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드는 걸까.

"에네렐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저는, 바보같이... 제가 그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당당히 말하신다면, 아마 에네렐의 말이 맞는 거겠죠."

"그래..."

그걸 직접 본 내 입장에서는, 차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제가, 제 독단적인 생각으로, 에네렐을 괴롭게 만든 건 변하지 않아요. 에네렐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을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고요!"

짜릿하다. 그녀의 고통과 슬픔이, 내 심장에 전기 충격을 쏟아붓는 것만 같다.

"여기 처음 돌아왔을 때, 제가 다른 수녀들과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아무렇지 않게 에네렐의 이야기를 하면서, 에네렐의 이유 없는 친절에 대해 말하면서!"

관심 없다.

"에네렐이 사실 저를 좋아하던 것 아닐까, 하는 친구들의 말에... 그럴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고요. 조금만... 조금만 더 에네렐에게 관심이 있었으면, 그런 망상 대신 사과를 했을 텐데."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저는 나쁜 사람이니까, 음, 제가 먹힐 때까지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다음에 마룡의 심장을 빼내면, 분명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

"제가 그때 드렸던 희망도, 제대로 된 희망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바보가, 그냥 신성력만 믿고 억지로 에네렐을 세뇌한 것뿐이에요."

어리석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생각이 어렸다.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너, 그때 내 머리를 건드렸던 사람이 너 하나였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누구의 힘을 쓰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것 없어?"

"네?"

셀리아의 파동은, 표정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숨김없이 그녀의 감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주문은... 인정할게. 대단했어. 엄청났지.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그때까지 내 머리에 손을 댄 사람이 너 하나였을 것 같냐고."

흔들린다. 파동이 요동치고 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가능성에, 셀리아의 감정이 동요하고 있다.

"...네?"

"너, 그때는 성녀였잖아. 정말 몰랐... 그래, 몰랐을 수도 있었겠네."

어떨 때는 다른 존재, 어떨 때는 같은 존재. 참, 편리하게도 붙었다 뗄 수 있는 관계였으니까.

"내 부활에 실패했을 때, 나는 이미 에리니스의 힘을 썼다."

붉은 빛,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충동, 복수에 대한 갈망.

"뭐...라고요?"

그러고 보면, 셀리아는 싸움에 꽤 늦게 합류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그녀 역시 내가 용사로서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신성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내가 한다고, 내가 해! 그 새끼들을 죽이든, 살리든, 복수하든, 용서하든 내가 한다고! 네가 뭐길래 내 선택에 끼어들어!

붉은 목소리. 내게 끊임없이 복수를 부추기던 그 목소리.

그건 셀리아의 어설픈 회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속박이었다. 내 정신을 모조리 구속하는 신의 개입이었다.

신의 힘을 대리하는 셀리아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그걸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복수의 여신, 에리니스였어. 뭐,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네 어설픈 신성 주문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을 거다."

옆에서 잔뜩 신이 난 채 중얼거렸던 성검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화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신의 압박은 무시무시했다. 내가 정당하다는 생각, 이 폭력이 정의롭다는 인식, 내가 참을 수 없을 거라는 마음, 복수를 행해야 한다는 충동.

그 모든 것을 내게 선사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거기서 깽판을 친 건 전부 에리니스의 잘못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건..."

"결국, 내가 선택한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강했다. 복수의 여신과 뜻이 일치했기에 나는 거기서 성검을 잡았고, 일치하지 않게 되었을 때 성검을 내던지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나다. 나 외에 어떤 누군가가 내게 '설득'을 할 수 있다 해도, 결국 그걸 인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나다.

"복수의 여신이 옆에서 왱왱거리고 있던 걸 참은 나다.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너 따위의 그런 하급 신성 주문이 내게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그, 그때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나는, 쓰러졌으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용사의 힘을 막 받아낸 내 몸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 상태에서 에리니스의 권능에 힘입어 분노를 쏘아내기까지 했고, 다시 그 분노를 에리니스에게 돌려 신과 맞서 싸우기까지 했다.

싸우다 보면, 피로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지금 이렇게 흔들리고 있지만, 나는 아무 신성 주문도 쓰지 않았잖아."

애초에, 덤에 불과한 일이다. 선물을 포장하는 포장지 수준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사람을 설득하는 데, 꼭 그런 주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의 신성력은 꽤 생생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길거리에서 슬로건만 외치고 다니는 것보다 관련 증거 자료를 영상으로 제출하는 것이 설득에 효율적일 것이다.

거기에 편안한 음료 몇 잔과 늘어질 듯 포근한 의자에 앉혀 준다면, 설득력이 더 오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뿐이다.

"내가, 인정한 거다."

셀리아의 그 감정에, 미래에 대한 희망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네 유아적인 발상으로는, 무조건 네가 잘못해서 내가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나는 내 의지로 움직였다.

내 의지를 잡지 못해 흔들렸고, 내 의지로 선택한 일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웠을지언정.

이 세계에 떨어져, 내 의지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려와."

긴 침묵이, 나와 셀리아 사이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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