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닿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아릴 듯한 검은 안개가, 그 오두막을 가득 메운 채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여기인가..."
셀리아의 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인위적이었다.
성녀였던 셀리아가 뿜어내는 청량하고 따뜻한 냄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성녀가 아닌 셀리아의 일부가 응축되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다.
위험하다. 용사고 뭐고, 견딜 수 있는 양의 슬픔이 아니다. 고통이 아니다.
"이 안에 있다는 거지?"
내 혼잣말에 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몸을 열심히 단련한 사람이라도, 우울증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이걸 힘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엘레노어가 했던 것처럼 용사의 기운을 응축시켜 검기로 만든 뒤, 오두막채 날려 버린다면 모를까.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저 안에 들어가는 순간, 저것과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용사의 힘이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존재 한 명의 의지가 필요할 뿐.
어쩌면 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셀리아는 이 안에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파시어는 아직 그녀를 먹지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룡이 되기 직전의 파시어와 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
하지만, 약한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네르웬은 분명, 셀리아의 '설득'이 내게 더 유의미하게 다가올 거라 했다.
그렇다면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 검은 안개와 우울한 감각마저, 셀리아가 내게 해 주는 말이라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앞으로 걸음을 한 발짝 내디뎠다. 검은 안개가 내 눈을 막았다.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용사의 감각은, 시각이 어지러워진 상태에서도 어디에 오두막이 있는지, 문이 있는지 선명하게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한 걸음 더 디뎠다.
-언제까지 저 짐꾼을 데리고 다닐 생각인 겁니까?
-엘레노어의 지시니, 이 약한 마법사가 어찌할 수 있는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
-전투에는 도움도 되지 않을 뿐 더러... 하다못해, 보호는 받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선을 알짱거리면서 냄새를 풍기니, 도저히 참을 수가...
용사 파티의 여정 동안, 잠자리가 항상 편안했던 것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밤에, 나는 텐트 안에 몸을 눕히자마자 곯아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매번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텐트 구석에 누워 있을 때, 다른 이들이 나를 자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대화를 들을 만한 기회도 있었다.
대부분은 평범한 대화였다. 그날 있었던 전투에 대해 서로의 업적을 칭찬해 주고, 다음 진로에 대해 논의하고, 식량 상황이나 마왕군의 움직임을 걱정하는 평범한 대화.
하지만, 아주 가끔 내가 잠에 들지 못했을 때, 그들의 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하!"
거칠게 숨을 토해낸 나는, 힘겹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검은 안개 속이다. 아직 오두막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런 식이라 이거지..."
오기에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더 디뎠다.
이번에는, 환각이나 환청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직접적인 감정들이 흘러들어왔으니까.
슬프다.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 홀로 빠져 있는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진다.
몇 걸음만 뒤로 물러나면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몇 걸음을 걸어왔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슬픔이 나를 감싼다.
그 누구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에 따른 슬픔이,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는 회한에 대한 슬픔이 나를 덮친다.
한 걸음 더 걸었다. 이번에는, 우울이었다.
홀로 좁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계의 빠져들 때 느낄 법한 우울이 느껴진다.
내가 해 왔던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는, 아무도 그걸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심지어는 나마저도 그걸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거대한 우울이 나를 감싼다
"이건... 좀 어렵네."
차라리 눈을 딱 감고 크게 뛰어 오두막 안에 몸을 던질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위험성이 너무 크다.
당장 발 한 짝 디디기도 힘든 상황에 점프를 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고, 이 환상과 감정들이 어지러이 겹쳐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면 정말로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건 셀리아의 감정이었다.
"이런 원리였던 거냐..."
아무리 성유물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성녀로 분장시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이 오두막 안에 걸린 마법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셀리아에게 남은 '성녀로서는 필요 없는' 감정을 뽑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나하나 느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해 보자고."
다음 걸음을 디뎠다. 이번에 느낀 감정은, 허무였다.
"후우..."
주저앉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 이 어두컴컴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다.
숨을 쉬는 것,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것, 검을 뽑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죽는 것과 사는 것, 서 있는 것과 눕는 것, 웃는 것과 우는 것.
이 모든 것을 구분 짓는 막이 무의미해진다.
그저 관성만 남아, 내 팔과 다리를 잡아끌고 놔주지 않을 뿐이었다.
나를 멈추라고 유혹한다. 아니, 유혹하라기보다는 너무 덤덤하고, 타락이라고 하기보다는 너무 무미건조하다.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 어떤 무의미한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다.
"크흡..."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땅에 무너져 있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흙의 맛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나 참,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
나를 막으려 하고 있다. 어느 정도까지 셀리아의 의사가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 각오가 더 강하다. 내 욕망이 더 강하다.
"멋대로, 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애초에, 그녀는 내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었다. 강요할 수 있었던 위치도 아니었다.
그냥, 그건 사소한 의견 제시일 뿐이었다. 그 의견을 채택한 건 나였을 뿐이고.
"어디, 한 번..."
어느새 나는, 셀리아가 있을 오두막의 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문을 거칠게 열자마자, 나는 의식을 잃고 눈을 감았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과거의 기억들이 몰려들어 왔다.
/////
죽이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인내하기를 포기했다.
처음 여행을 떠났을 때 굳게 먹은 마음은, 어느새 곱게 갈려 나가 있었다.
"3시간 뒤에 출발이다. 일어날 수 있겠나, 짐꾼?"
엘레노어의 차가운 목소리가 난도질했다.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검에 흠씬 두들겨 맞은 나는, 몸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빚이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을, 사람을 구하겠다고 써버린 것은 나였다.
여섯 명을 살렸다. 철없는 여행가들이었다.
내가 여기서 해낼 수 없다고 입을 다무는 순간, 엘레노어는 그걸 인정해 줄 것이다.
어떻게든 내가 쉴 수 있을 만한 시간을 더 확보해 주고, 셀리아의 신성력이나 파시어의 마력을 소모하더라도 내가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걸로 끝이다.
다시는 다른 이들을 구하게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이 파티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나였다. 그녀들에게는 넉넉한 시간과 여유로운 일정이라도, 나는 버티지 못했다.
후회는 없었다. 내가 용사가 되었다면 이들을 따라다닐 수는 있었겠지만, 엘레노어가 손쉽게 죽일 만한 마물을 죽이기 위해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을 테니까.
"제가... 된다고 했으니까요."
말을 꺼내는 내 입을 막고 싶었다.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죽을 만큼 괴로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용사 파티를 설득할 때, 절대로 우리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 했다.
그 말은 지켜야만 했다. 내가 그걸 지키지 않으면 엘레노어와 다른 파티원들은 내게 다음 기회를 주지 않을 테니까.
엘레노어는 침낭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주위에 있던 강을 찾아 걸어갔다.
어차피, 이 상태라면 네르웬이 내 냄새를 지정하며 텐트에서 나를 쫓아낼 테니까. 괜히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다는 지금 움직이는 게 나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고, 나를 무엇보다 힘들게 만드는 건 내 억지였다.
하지만, 싫다.
홀로 차가운 몸에 물을 씻는 것이 혐오스럽다.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저주스럽다. 죽이고 싶다. 증오스럽다. 혐오스럽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마왕을 죽이고,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돌아와 누운 뒤, 체감상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아침이 되었다. 엘레노어가 나를 깨우자, 나는 황급히 일어나 다시 여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피곤하다. 잠에 든 건지 깨어난 건지 인식하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나는 이제 익숙해져 버린 업무를 수행했다.
늦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준비를 마친 뒤, 내 준비가 끝나는 것을 차가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네르웬은 코를 막았다. 엘레노어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검을 쥔 채 나를 보았다.
셀리아와 파시어는 각각 불만과 짜증이 가득 섞인 눈으로, 당장이라도 한 마디씩 할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하."
그걸 보고 나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