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네르웬의 몸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 위에 올라탄 나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서서히,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위에 있는 게 마물이나 진짜 적이었으면 단검을 뽑든, 그 유연함을 이용해 몸을 비틀어대든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겠지만, 그녀는 전부 포기한 채 축 늘어졌다.
"져버렸구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죽여라."
"글쎄."
"...이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군."
그녀는 눈을 꽉 감은 채,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부디, 간청드립니다. 죽여 주세요. 그리고 제발... 돌아가 주세요. 자유롭게 살아 주세요..."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손이 바람을 가르며 네르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아, 아얏... 아?"
하지만, 정말 죽일 듯이 때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에서 뺨을 살짝 때려 주었을 뿐.
네르웬은 본능적으로 붉어진 볼을 어루만졌다. 눈을 똑바로 뜬 엘프의 모습은,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싫다면?"
"그렇다면,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겠지. 네가 없는 세계의 고통 속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다. 너희 모두. 죽게 두지도, 방치하지도 않을 거야."
이유도, 당위도 없는 그저 소망이었다. 욕망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왕 퇴치를 위해 떠난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쩌면, 선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것을 보고 우는 아이처럼, 그저 울부짖으며 그 혐오스러운 것을 눈앞에서 치우라 애원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영원한 단절을. 흘러나오는 피와, 쓰레기처럼 방치된 시체들의 모습을.
그저,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네가... 우리에게 얽매일 이유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얽매인 게 아니야. 내가 너희를 얽매이게 할 거다.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어."
네르웬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진하게.
그녀가 숨을 들이킬 수록, 힘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의지가 흐려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네가 내게 해준 것, 잊지 않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네게 종속된 몸으로 태어났던 내게, 처음으로 자유를 찾아 준 것."
"아, 그건 세계수 놈들이 좀... 많이 짜증 나게 했지.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당했던 이유 없는 폭력에, 미약하나마 배후가 있었다는 말이었으니까.
물론, 네르웬의 잘못이 있다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 구속을 혐오 대신 묵인, 이해로 표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가해진 혐오가 오롯이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나였다. 네르웬의 출생에 충격을 받고, 세계수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선택이다. 네가 선물한 자유로 행한, 내 의지로 처음 고른 결단."
네르웬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어쩌면, 이미 한참 전부터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최고의 궁수였고, 길잡이였고, 아마 세계수 밖에 있는 엘프 중 제일 강한 엘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용사의 몸에 익숙해진 내게 싸움을 건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수명을 깎아가며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나를 죽이더라도... 남은 이들의 계획을 지켜봐 다오. 모두 널 위해서, 너를 돌려보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니까..."
"아,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네르웬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참 연약한 몸이었다. 어떻게 활줄을 당기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몸이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만큼 약하다.
"싫은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으며 네르웬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녀가 자신의 길을 찾은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네르웬이 내게 했던 일을 떠나, 불치병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는 말과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한 첫 번째 행동이 날 위한 것이라는 것도 고마웠다.
네르웬이 내게 속죄할 일이 있다는 것과 별개로, 나 또한 그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선물이었다. 고마웠다.
"나는, 그걸 인정할 생각이 없어. 말했잖아? 아무도 죽게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네르웬의 선물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음만 받을 생각이었다.
"어째서... 왜?"
"왜라니. 뭐, 네가 자유를 찾았다는 건 다행인 일이고, 그게 날 위한 일이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그걸 따라야 할 이유는 없어."
내가, 더 중요하다.
네르웬은 분명 그 선택을 하기 위해 수많이 많은 유혹과 욕망, 갈등을 넘어서야 했을 것이다.
내게 활을 겨누는 것, 내 말에 거역하는 것마저 온 몸이 떨릴 정도로 고통스럽다던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숭고한 일이다.
나를 멸시하고 모욕주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그녀를 얽매고 있던 사슬을 느끼고, 그 모든 유혹과 굴레를 벗어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분명,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담은 일이 될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던가."
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그녀의 정신이 얼마나 숭고해졌는지와 무관하게, 네르웬의 몸은 지금 여기, 내 밑에 깔려 있었다.
내가 그녀를 죽이고 싶다면,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죽지 않아."
네르웬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절규했다.
"왜, 어째서!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네게 죄를 지은 사람이다! 그걸 깨닫고, 너를 위해 희생하기로 각오를 다진 사람이다! 살아 있는 한, 너와 같은 세계에서 숨을 쉬고 있는 한 너를 괴롭게 할 사람이다!"
"내가 싫다고."
경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죄를 저질렀으니까', '언젠가는 나를 괴롭게 만들 테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이미 해 봤다.
그리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이유 따윈 상관 없었다. 미래에 대한 예상도, 뒷감당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 선택이었다! 내 자유였다! 나는, 너를 위해 더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했다! 이걸..."
"아, 그렇지. 그렇지만..."
나는 자세를 숙였다. 네르웬의 얼굴과 내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나도, 더 고통스러운 길이라 해도... 그걸 선택한 자유가 있지."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
한 사람도 더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네르웬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다가, 구슬픈 눈물을 흘렸다.
누워 있었기에, 눈물은 그녀의 볼 밑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양 갈래로 흩어져, 관자놀이와 볼 사이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
"뭐, 이렇게 오래 얘기하고 있을 생각도 없었어. 너도 순순히 양보할 생각은 없지?"
애초에, 네르웬을 설득하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었다. 그냥, 잠시 시간을 써 대화를 해준 것 뿐.
"으으..."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잡고 머리를 끌어올렸다. 이거, 몸을 돌려야 하는 건가.
나름대로 싸움에 대한 데이터가 쌓인 나도, 쉽게 그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싸움에 익숙해졌으니, 인간이라면 어떻게 목숨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얼마나 세게 어느 부위를 맞아야 그녀가 딱 알맞은 시간 동안 기절하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다.
셀리아가 성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다리 한쪽을 잘라 오염되지 않게 그녀의 몸에 올려 둔 뒤 빨리 다녀오면 치료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지금 수행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다.
"...무력화시킬 필요는 없다. 이미, 내게 남은 의지는 전부 꺾여 버렸으니까."
네르웬은 숨을 코로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기를 반복했다. 네르웬은 포기한 것처럼 슬프고 처연해 보이면서도, 조금은 편안해 보였다.
"나는, 결국 무릎 꿇어 버렸구나. 살아 있을 자격도 없으면서, 네 얼굴을 똑바로 볼 자격도 없으면서... 추하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네 자비를 먹고 살게 되겠구나."
"자비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고."
"하지만..."
"믿어 줘. 이번에는 정말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을 테니까."
네르웬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라. 저쪽으로 가다 보면 셀리아가 나올 거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쪽에서 수상쩍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셀리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탁한 기운이라 쉽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네르웬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곳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녀와 만나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거다. 내 변변찮은 말솜씨보다는 훨씬 더... 의미 있는 설득을 해 주겠지."
"불안한데..."
마룡이 이미 태어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기운이다. 네르웬의 말에 의하면, 이미 늦은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조심스레 일어났다. 아직 쓰러져 있는 네르웬의 몸에는, 내 몸에서 떨어진 피와 흙더미가 어지러이 묻어 있었다.
"다시 덤벼들 생각은 아니지?"
"그렇게 두려우면, 나를 죽여도 좋다. 아니면, 다리 한쪽을 자르고 떠나도 좋다."
"최대한 네가 피해가 없는 쪽으로."
"그렇다면, 명령 한 번이면 족하다. 이미, 나는 그에 저항할 의식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
나는 헛웃음을 지은 뒤, 네르웬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명령했다.
"네르웬, 이건 명령이다. 너, 지금 꼴이 말이 아니거든? 저 앞에 호수 하나 있더라. 좀 춥긴 하겠지만, 거기서 깨끗하게 씻고 와. 내일 아침에 보자고."
"아아... 기꺼이."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그리고."
하지만, 내 명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네르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셀리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우스웠다. 그렇게 귀환을, 그들에 대한 복수를 간절히 원하던 내가 그걸 막기 위해 싸워야 한다니.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