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웬은 한 번도, '불편한'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엘프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재능과 적성, 잘하는 것과 즐기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엘프에게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대다수의 엘프들은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조경사의 재능이 있는 엘프는 무엇보다 조경을 즐겼다. 전사의 재능을 타고난 엘프는 무엇보다 전투를 즐겼다.
숲을 수호하는 임무를 타고난 엘프는 인내심과 관찰력이 뛰어났고, 사냥을 하기 위해 태어난 엘프는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들의 피 냄새를 즐겼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엘프는 만들어진다. 구태여 태어나는 엘프에게 모순과 심적 고뇌를 심어 줄 이유가 없었다.
네르웬 같은, 실패한 엘프가 아니라면.
"내 미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 여행, 실패할 거다."
에네렐이 없을 때 다른 파티원들을 모두 불러 모은 파시어는, 단언하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알려졌던 불사조의 유해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엘레노어의 질문을, 파시어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 버렸다.
"알려진 것과 실제로 불가능한 것은 다르다. 불사조야 실제로 있었고, 유니콘도 어디, 오지를 몇 년 정도 잘 찾아보면 나오긴 할 테다... 그렇게 나온 놈을 설득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마룡의 심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건 못 구한다. 장담할 수 있어. 그냥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언젠가는 나오겠지... 하고 돌아다닐 뿐이다. 에네렐은 돌아갈 수 없다."
셀리아가 파시어에게 달려들었다.
"그, 그럴 리 없어요. 이렇게 노력하고 있잖아요. 다 같이 최선을 다해 찾으면, 언젠가는..."
울먹이듯 말하는 셀리아의 머리를, 파시어가 따스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힘들더냐?"
"...나 때문에, 나만 아니었으면."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엘레노어의 신뢰 어린 눈빛을, 파시어는 시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방법이 있다면, 하겠습니다."
"뭐, 말은 잘 하는구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파시어에 쏠려 있었다. 작은 마법사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내 기준에서도 다분히 비윤리적인 일이다. 세계에는 비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고. 나는 결단을 내렸지만, 너희들에게는 아직 확신을 듣지 못했다."
-에네렐을 돌려보내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겠느냐?
/////
끝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네르웬은 그 제안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다.
자유로워졌다고 한들, 그녀의 '태생'은 아직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에네렐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는 것만큼이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당연하고, 편안한 행동이었다.
에네렐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도, 평생 그를 볼 수 없게, 맡을 수 없게, 도울 수 없게 되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너무 어렵다 싶으면 그냥 마지막까지 고민해도 된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탓하지 않을 테니."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연한 감각이었다.
"계획에 네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파시어와 셀리아, 엘레노어는 에네렐의 귀환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네르웬은 아니었다.
무력했다.
"차라리, 이 감정이 조금 더 빨리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실없는 한탄을 흘리던 네르웬에게, 파시어는 아무렇지 않게 해답을 내려 주었다.
"아, 사랑 말인가."
쉽게 꺼내지 못한 단어였지만, 파시어는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처럼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그건 어떻게... 아니, 제가 그럴 자격이 있을 리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자격의 문제가 아니네. 칼에 맞아 숨통이 끊어진 이들은, 그럴 만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죽는가? 아니지. 감정은 폭력적이고, 육체는 그걸 압도하니."
"..."
"세계수에서 너도 같이 듣지 않았나. 그들이 단순히 '성욕' 하나로 너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고."
그건, 네르웬의 역린이었다. 다른 파티원보다 그녀를 열등하게 하는, 자신에게 더 많은 분노를 쏟아낼 수밖에 없게 하는 요인.
그때 짐꾼이었던 그는 엘레노어와 싸웠다. 대부분은 죽는 사람을 어떻게든 살릴 것이냐 죽게 놔둘 것이냐가 주제였고, 이 주제로 싸웠던 건 파시어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 외에 그에게 가혹한 훈련을 강요하거나, 심부름을 강요하고 멸시하기도 했지만 주된 이유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는 평균적인 인간만큼, 아니 마왕 퇴치를 위해 여정을 떠나는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을 씻었다.
그만큼, 네르웬의 분노에는 이성이 없었다. 그저 역겨움이라는 순수한 감성만 남아 있을 뿐.
"저번에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줬던가... 대관식을 치를 때, 수많은 조건과 대상, 효력을 따져 보면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고."
"들어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왕관을 쓴 이에게 황가의 가호를, 종교적 지도자 앞에 무릎 꿇은 이에게 신의 가호를, 황제의 홀을 든 이에게 제국을 수호하는 이들과의 계약을.
"그런 원리다. 사랑이나 호의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용사의 힘에 걸고, 성욕을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에 걸었지. 그렇다면, 지금 네 몸은 그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네르웬은 그제서야, 그녀가 그 법칙을 철통같이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로 황제에게 화살을 쏴 죽이려 하다니. 정상적인 엘프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를 납치하려 들었으면서, 그 다음에 바로 평생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한다니, 일반적인 사람의 감정 변화가 아니었다.
"하, 하하..."
한 번,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본능은 그녀를 얽매고 있었다.
"아직..."
네르웬은 결정하지 못했다. 무엇이 진정 그를 위한 선택인 건지, 그녀 안에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
괴물을 사냥하던 중, 네르웬은 숲에서 에네렐을 만났다.
그때, 이미 네르웬은 파시어의 계획을 전부 들은 다음이었다. 그리고, 그라면 절대 그걸 허용해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으려 드니까, 파시어와 셀리아를 희생시켜야 하는 의식을 허용할 리 없었으니까.
그의 따스한 눈을 보고, 네르웬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어떻게든 맡지 않으려 했던 그의 냄새가 후각을 유린한다.
네르웬의 머리에 행복한 기분이,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뭉게뭉게 퍼졌다.
복종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당장이라도 그에게서 진실을 숨기는 것을 그만두고, 평생 그와 함께하고 싶다.
그의 팔이 네르웬의 몸에 덮인다. 위로받는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이 순간이라면 그는 그녀를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헛웃음을 지으며 뒤를 따라오는 것 정도는 허용해 줄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행복한 상상이, 네르웬을 잠식했다. 사랑을 원하는, 에네렐을 원하는 그녀의 본성이 몸을 잠식했다.
"그런가... 역시 그랬구나. 그들이 틀리지 않았어."
그리고, 네르웬은 억지로 그걸 끊어냈다. 산더미처럼 쌓인 미련의 덩어리를 털어내고,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욕망의 강을 지워 버렸다.
그녀는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 그는 그녀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에네렐은 돌아가야 한다. 용사 파티라는 닻에 발이 묶여 이 세계에 잠기는 대신, 그가 있어야 할 곳에서 평안을 찾아야 한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그녀의 모든 본성이, 육욕이, 감정이 제발 그를 따라가라고 애원한다.
네르웬은 머릿속에서 그걸 수도 없이 끊어냈다.
"따라와도 괜찮아."
너무나도 상냥하고 물러터진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부드러운 말을 꺼낸다.
이건 타격이 컸다.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면, 추하게 기어 그의 뒤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괜찮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네르웬은 수많은 생각과 유혹에 휩싸였다.
지금 당장 빌고, 따라가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의 뒤를 따라...
"아."
터벅터벅 걸어가, 나무 사이로 사라진 그의 뒷모습에서, 어렴풋이 추억이 느껴졌다.
네르웬은 에네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세계수에서, 흰 나뭇가지와 싸우던 그의 모습을.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네르웬에게 그건 구원이었다.
평생 자신이 사슬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 주었으니까.
"그때... 너는..."
세계수와 엘프들의 압박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지 않았다. 그저, 그토록 혐오스러웠을 엘프의 의사를 물었다.
그걸 받아들여 준 뒤, 무려 흰 나뭇가지와 싸워 협상하는 것까지 성공해냈다.
네르웬이 받을 자격이 없는, 거대한 배려였다. 그의 커다란 증오에도 꺾이지 않는, 거대한 신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지..."
그녀가 의무라는 사슬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한 마음이었다.
더 이상 그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가 더 이상 양보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