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유의미한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다.
셀리아가 이 방에 들어왔던 건 내가 수도를 떠나기 전이라고 했다. 파시어라면 모를까, 셀리아처럼 감정이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이 그 오랜 기간 나를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내가 볼 수 있는 건, 아무리 잘 찾아봐야 셀리아의 과거에 불과했다.
그녀가 어떤 수녀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 아직 여기 계셨네요! 명단을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상념에 빠져 있는 나에게, 수녀 중 한 명이 다가와 종이 몇 장을 건네주었다.
"고생하셨... 습니다."
단순히 이름과 나이만 적힌 것이 아니었다. 수녀가 건네준 종이에는 그들의 집에 찾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들이 어디서 일하는지 지도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뭔가 찾으셨어요?"
"...아니요."
무언가, 찾긴 했다.
구석에 박혀 있던 낡은 일기장에는, 그녀가 혼자, 아니 누군가와 교환하며 쓴 글들이 적혀 있었다.
아마 여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다. 성녀라면, 굳이 그런 수단이 아니더라도 신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으니까.
그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여신이 나를 보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닿지 않을 메시지를 얼마나 절박하게 보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여신의 모습과 태도를 생각하면, 내 꼴을 보며 같이 비웃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지나친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다는 것은, 예상 밖에 있는 사건이었지만.
그리고, 그 뒤에 셀리아의 답이 적혀 있었다.
여신이 보낸 문장들이 셀리아에게 전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셀리아가 쓴 일기는 여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과,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이걸 봤으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셀리아가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안다.
그러니까 나는, 새로운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용사님?"
"아, 네..."
나는 미련을 접어둔 채, 터벅터벅 성당을 걸어 나왔다.
애써 눈을 돌리고 있던 타인의 감정들이, 내 머릿속을 잠식해 왔다.
그녀가 내게 왜 그 주문을 걸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손익을 따지자면, 완벽히 무의미했다. 모든 사람의 상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죽지 못했다. 살아 버렸다. 살아 있음에 대한 분노와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셀리아도, 파시어도, 엘레노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조금만 더 분노를 제어하지 못했다면... 아니, 제어라는 표현도 이상하다.
나는 분노에 미쳐 날뛰던 게 아니었다. 내 행복을 위해,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과정에 복수의 여신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살아남은 순간, 아주 약간의 살의만 더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파시어는 죽었다. 내 손에 죽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꾸미려 했든, 나를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나만 없었으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녀의 꿈은 깨졌다.
엘레노어에 관한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내가 죽었고 엘레노어가 용사로 밝혀졌다면 제국은 이보다 훨씬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황위 다툼으로 싸울 필요도 없고, 엘레노어의 정통성을 의심받을 필요도 없다.
설령 그녀가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고 해도, 황족 중 그녀가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사람 하나를 고르면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다.
현 황제가 했던 것만큼, 평화롭고 지혜롭게.
네르웬은 갈증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같은 엘프에게서 버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수의 대전사로서, 끊임없이 충동을 이겨내며 치료를 받거나 그녀의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손해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아니지."
나는 성당 앞에 선 채, 멍하니 내가 했던 일을 돌아보았다.
오크 로드를 죽이고, 술집에서 일하던 퇴역 모험가 하나를 구했다.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했던 엘프 한 명을 지켰다. 아니, 지켰다는 말은 좀 과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영지 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던 중간지대에서의 다툼을 막았다. 그 안에 틀어박혀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마기마저 쓸어 버렸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리 싫지는 않았다.
용사 파티의 얼굴은,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가증스럽던 셀리아의 웃음도, 역겨웠던 파시어의 미소도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삶의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기대해 왔던 행복한 미래라고 하기에는 좀 초라했다. 그래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이 감정은 그저 내가 그 일들을 '과거'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기억이 희미해졌을 뿐, 그때의 나는 그녀들과 함께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안정된 자세로, 앞으로 걸어갔다.
/////
"혹시, 성녀님을 보셨습니까?"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문을 두드려야 했다.
다행히,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주었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 대뜸 나를 겁박하거나 내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무슨 일로 성녀님을 찾으시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그게... 최근 모습이 안 보이셔서, 찾을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용사라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순순히 셀리아에 대해 알려 주었다.
"저기, 북쪽 문에서 한 번 마주쳤습니다. 밤에 어디론가 쭉 걸어가고 계시던데, 말은 못 걸어 봤습죠."
"그때 말고는 본 적이 없으시고요?"
"저쪽... 시장 거리 있잖습니까? 거기서 한 번 정도 뵌 것 같고... 그것 말고도 그 근방에서 한두 번 본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도에 그녀가 목격된 장소를 체크했다.
숙박시설을 쓰지 않았다는 정보는 확보했다. 그녀가 들어갈 법한 귀족들의 저택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저 근방인데..."
하지만, 그녀를 봤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여신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니, 정보는 충분히 많았다.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 나는 수많은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
문 앞에 쪼그려 앉은 나는, 펜으로 그녀가 목격된 곳을 표시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지도에는 수많은 점이 찍혀 있었다.
늘 입던 성녀의 하얀 옷을 입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얼굴을 아는 신도는 적지 않았다.
그녀의 목격담을 조합하면, 작은 원을 만들 수 있었다.
"이쪽인가..."
나는 그 원의 중심부까지 쭉 걸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오롯이 내 직감으로 그녀의 위치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네르웬처럼 추적에 능하고 냄새를 잘 맡는 건 아니니, 셀리아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신성력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 거대한 신성력의 자취를 따라갈 수라도 있지만, 그녀는 이제 성녀였던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러니, 찾아야 할 건 그녀의 흔적이 아니었다.
"...이건가?"
이 모든 계획에 파시어가 관여되어 있었다면, 셀리아를 어떻게 '사용'할지도 그녀의 손이 닿아 있을 것이다.
용사 파티 중 가장 지식이 많은 사람도, 계획을 세울 만한 사람도 그녀였으니까.
조금,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다못해, 일이 잘 돌아가는지 아닌지는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죽기 전 파시어의 표정이 눈에 아른거렸다.
근처를 슬슬 돌아다니며, 마력의 흔적을 찾았다. 당연히, 수도 없이 많은 흔적들이 있었다.
하지만, 파시어의 마력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오래 만난 마법사는 파시어 하나밖에 없었으니, 익숙한 마력을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여긴 허탕인가."
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네 번째 마력의 흔적을 찾아가 봤지만, 수상한 것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 마력의 흔적의 끝에는, 누가 봐도 수상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길거리에 있는 평범한 집이다. 수없이 많은, 비슷한 집들 사이에 있는 그냥 건물.
하지만, 파시어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지하 어딘가에서, 그녀의 마법이 날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안에 계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좀 미안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나는, 방 안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여길 보호하기 위해 걸어 뒀던 그녀의 마법이 시전자의 죽음으로 사라졌거나.
카펫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지하실이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용사라고는 해도 이렇게 쉽게 알아챌 수 있다면, 분명 언젠가 들킬 곳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잘못 짚었을지도 모른다. 시체가 몰려 있던 곳은 이것보다 훨씬 더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지하실의 문을 열고 내려가자, 어딘가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누구냐!"
사람이 아니다. 아니, 사람이다.
분명 내가 어디선가 봤던 이들이다.
"무기 내려놔! 하, 누구신가 했더니 짐꾼 님이셨구먼. 그간 안녕하셨소?"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 안에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