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로브... 그건, 어디에 쓰이는 물건입니까?"
이름은 수수했다.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엘레노어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분명히 사용법이 있을 것이다.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만... 사용법이라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실례지만, 조금만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관리자라고는 한들, 그 안에 있는 모든 보물의 사용처와 효능을 완벽히 아는 건 아닌지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효능이... 명확한 물건은 아닙니다. 성직자들이야 뭐만 하면 '신의 섭리가 깃든 물건'이라며 칭송하기만 할 뿐, 그걸 어디에 쓸 수 있는 물건인지는 쉽사리 알려 주지 않으니까요."
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효능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것보다, 아예 엮인 전설이 무엇인지 알려 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말씀하시죠."
"고대에, 평범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여신을 믿지 않았으며, 다른 신을 섬기고 여신에 대한 모욕을 일삼던 사악한 이교도였지요."
"흠..."
"그런데 어느 날, 사악한 신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 신은 탐욕스럽게 제물을 갈구하며, 그 여인이 있던 마을의 인간을 바치라 했지요."
"그래서요?"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했습니다. 여신께서는 그녀의 자비심에 감명받아, 이 로브를 내려 주셨지요. 그녀는 그 뒤로 여신의 자비를 설파하고 다녔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성자와 성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 여인에 대해,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본래는 다른 신의 지도자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브를 잃어버린 순간 모든 힘을 잃어버렸다는 말도 있었지요."
"그것 말고는, 더 없습니까?"
"아무래도 신의 손길이 직접 닿은 물건이라 그런지... 안에 담긴 신성력의 양이 다른 유물보다 훨씬 압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꼭 그 로브를 가져갈 필요는..."
"그걸 쓰면, 누구든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일반인들은 그걸 써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고, 몇몇 성직자들은 마물을 퇴치할 때 그 로브를 쓰긴 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왜죠?"
"이미 그들 안에 신의 사랑이 충만하기에, 로브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리송하다. 많은 신성력이 담겨 있지만, 그걸 쓸 수는 없다. 성직자는 쓸 수 있지만, 그게 정말 영구적이고 유효한 힘이었다면 당장 용사 파티가 사용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어디에 필요한 걸까.
엘레노어가 직접 쓰려는 건 아닐 것이다. 파시어라면 사용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가 '황궁의 보물고를 턴다.'라는 계획을 생각해냈다면 더 귀중한 무언가를 가져갔을 것이다.
"사실, 그 물건만 도난당했다면 제가 감옥에 있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살인검이 없어졌다는 게 문제였죠. 참, 황녀 전하도... 어찌 그런 일을 하셨는지."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일반인은 사용할 수 없어서 필요 없고, 성직자는 '신의 사랑을 이미 충분히 받아' 필요 없는 물건을 써야 할 이유가.
"하."
셀리아였다. 그녀를 일시적으로나마 다시 성녀로 만들려 하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게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용사 귀환 의식에는 마법사와 성직자가 필요하다. 의식을 실패시킨 게 파시어라 했으니, 이미 한 번 성공한, 검증된 성직자인 셀리아를 다시 쓰는 건 이상한 판단이 아니다.
그렇다 한들, 황궁의 보급고를 터는 것보다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성녀가 아니라 다른 성직자로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는 의식이었으니까.
꼭 그녀여야만 하는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찾기 힘들었다.
성녀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굳이 성녀로...
"흠."
아니다. 잘못 생각했다. 단지 내 '귀환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그녀가 웃을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녀라면 그 일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환각을 밥 먹듯이 보는 그녀의 죄책감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 더 끔찍한 무언가가 있다.
"성녀, 신성한 여자, 신성한..."
순간, 용을 연구하던 마법사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용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파시어가 그 용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그걸 예측했거나 유도했을지, 아니면 이곳으로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용이 셀리아를 먹게 되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고귀하거나 신성한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을 찢어 놓고 고문하거나...
마법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불확실한 예측에 불과했지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셀리아를 찾아야 한다. 최대한 빨리.
"감사합니다!"
"하시려는 일이 뭐든, 잘 되셨으면 좋겠군요. 제국민 중 한 명으로서, 용사님께는 언제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창고 관리자는 감옥 안에서도 허허 웃으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 인사에 화답해 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쏜살같이 감옥을 빠져나가고 싶었으니까.
/////
내가 바로 뛰어 들어간 곳은, 원래 그녀가 몸담고 있던 성당이었다.
커다랗게 성당 중앙에 조각된 여신상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에리니스를 닮아 있었다.
나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 신상을 바라보다, 수녀들의 시선에 정신을 차리고 용건을 꺼냈다.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셀리아가 여기에 있습니까?"
"잠시, 당신이 누구신지부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주교가 굳은 표정으로 내 신분을 물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젊은 수녀 하나가 팔짝 뛰어 달려왔다.
"용사님! 용사님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
"셀리아, 용사님과 함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의외였다. 셀리아는 이곳에 오지 않았던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성당에 돌아오는 것은 리스크가 큰 도박이었다.
신성력을 잃은 성녀에게 무슨 비난이 돌아갈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언제 그녀를 봤는지 기억나십니까?"
"음... 용사님이 떠나기 전이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감쪽같이 속았네요."
"네?"
"셀리아가 용사님 얘기를 할 때는, 계속 '짐꾼 씨'라고 했으니까요."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때가 언제였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내가 폭주하기 전에도, 그녀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필요 없는 정보였다. 그녀가 나에 대해 뭐라고 했건,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시간을 생각하면, 적당히 성당을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음, 축하 파티에 짐꾼 씨가 없어서 아쉽다는 얘기나, 여정 중에... 이유 없이, 잘 해주셨다고?"
나는 그녀가 어떻게 말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셀리아가 어떤 목소리로, 어떤 톤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유 없이, 잘..."
헛웃음과 슬픔, 분노와 안타까움이 새어 나왔다.
"그렇군요."
"그래서, 성녀님하고는 잘 되셨어요?"
수녀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몰려들어, 나와 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잘 되다니, 그게 무슨..."
"아, 아니었어요?"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용사님이 황궁에서 막... "
"야,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면 어떡해!"
"허, 헙!"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최근에는, 웃을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차마, 그 다음을 알려줄 수 없었다. 말할 만한 게 없었다.
"그냥..."
"뭐, 싸우기라도 한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셀리아가 얼마나 순둥순둥한데."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우스웠다.
내가 그녀에게 받은 상처를 시시콜콜 알려주는 것도 우스웠고, 내가 그녀에게 한 일을 알려주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와 친하거나, 행적을 알 만한 사람은 있습니까?"
"글쎄요. 셀리아야, 어렸을 때부터 우리와 함께 지냈으니까... 저희보다 친한 사람은 없을걸요? 다른 용사 파티원들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파시어는 내 손으로 죽였고, 엘레노어는 당장 무슨 일을 일으킬지 예측할 수 없다. 네르웬은 찾을 수조차 없다.
"음... 그러면, 셀리아를 봤다고 하던 신도들의 이름을 적어 드릴게요. 주소까지 적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저, 정말입니까?"
"왜 우리에게 안 오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나 했는데... 뭐,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죠? 꼭 좀 찾아서, 얼굴 좀 보자고 해 주세요. 아주 그냥 혼쭐을 내 줄 테니."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 수는 없었지만.
"뭐, 혹시 찾으실 게 있으시면, 저쪽 복도 끝에 있는 방이 셀리아의 방이거든요? 한 번 찾아보세요. 중요한 게 나올 수도 있잖아요?"
"아니, 그래도 남의 방인데..."
하지만,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레 셀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녀의 냄새가 느껴졌다. 물건을 정리하는 형태나 자그마한 베개와 이불, 방의 형태마저도 셀리아다웠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