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작별을 앞둔 용사 파티가 내게 집착한다-186화 (186/217)

"이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오늘따라, 엘레노어의 환한 미소가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해가 지지 않았지만, 마차는 넓은 초원 위에 서 있었다. 말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사람들도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검을 허리춤에 매어둔 채, 스튜를 조리하고 있었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는 없는 크기의 아담한 냄비였지만,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냄비는 향기로웠다.

"대단해요, 네르웬! 정말로 이렇게 향기로운 식사를..."

"뛰워 줄 것도 없어, 셀리아. 이렇게 다양한 풀이 많이 자라는데, 엘프가 맛없는 음식을 먹을 이유가 없잖아?"

네르웬이 싱긋 웃었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그녀는 웃고 있었을 텐데, 그 미소가 이색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파시어, 준비 다 됐어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오래 걸리나요?"

"다 끝났다. 참, 과분한 대접을 받는구나."

마법사가 음식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파시어 정도의 마법사라면 음식을 바꿀 수는 있다.

오래되어 말라비틀어진 비스킷에 물을 한 컵 부어 봐야 눅눅한 비스킷이 될 뿐이지만, 지금은 재료도, 마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스튜를 끓이고 있는 불을 살짝 빌리고, 물을 살짝 얹어 적절한 수분을 빼내 비스킷에 넣고, 그걸 다시 태워 바삭한 식감을 만드는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대마법사가 하기에는 너무 사소하고 작은 일이었지만, 파시어는 스튜와 함께 먹을 비스킷을 맛깔나게 조리해냈다.

"이제 마룡의 심장만 구하면, 이 여정도 끝이구나."

"뭐, 그렇다고 바로 헤어질 건 아니잖아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어, 왔네요! 에네레에엘!"

머리에 조금 물을 묻힌 채, 에네렐이 터벅터벅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성녀님!"

"서, 성녀님?"

이상했다. 그가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특정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그가 나를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파, 파시어. 원래... 그랬던가요? 우리, 마룡의 심장을 찾으러..."

"마룡의 심장?"

작은 마법사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마룡의 심장이 필요하지 않았더냐. 에네렐이 오기 전에 준비를 끝내야 할 텐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쏟아졌다.

"자, 잠깐만요. 상황을, 정리해야..."

정리해서는 안 된다는 충동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머릿속에 악마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야 한다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성녀다. 이 머릿속에, 악마 같은 게 들어올 리 없다.

"내가, 성녀, 였던가?"

수많은 의문들이 심장을 찔렀다. 성녀가 아니라면, 언제 아니게 되었을까. 배교였다. 배교가, 언제 있었던 일이었지. 유니콘의 피를 찾기 위한 동굴에 들어갔을 때 생겼던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배교를 했던가. 여신에게 칼을 들이민 기억은 없었다. 그건, 조금 더 붉고, 조금 더 흉흉한...

"아아, 아아아아아아!!!"

괴로워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에네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네르웬과는 멀찍이 떨어진 채로.

애초에, 에네렐은 왜 씻어야 했지? 다른 사람과 떨어져,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지금은 언제지? 마왕을 죽이고 난 다음? 만약 그 전이라면, 마룡의 심장은 대체 왜 필요한 거지?"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처럼, 에네렐은 일행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래, 마룡의 심장이 필요했지. 지금 성검을... 엘레노어, 그대가 가지고 있던가?"

"그럴 리가... 어? 제가 왜 이걸 가지고 있는 겁니까?"

엘레노어는 허리춤에서 번쩍이는 성검을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 용사는 에네렐이었고, 엘레노어는 그를 따라 나온 기사였다. 잠시 몸을 씻기 위해 검을 맡겼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허리춤에서 검이 나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아, 안 돼..."

파시어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 검을 가리켰다.

"필요해서 그런데, 잠깐 빌릴 수 있겠느냐?"

"아, 마룡의 심장이 필요하시다고 하셨죠. 드리겠습니다."

파시어는 자신의 키만 한 검을 들고 낑낑거리다, 결국 땅에 검 손잡이를 박아 두고 스스로 움직였다.

"아, 안 돼."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셀리아? 이미 다 합의한 일이었잖느냐."

파시어는 살짝 허리를 굽혀, 성검이 그녀의 심장 주위를 도려내게 했다.

"아..."

피가 쏟아진다. 아무도 지탱해 주지 않는 그녀의 살점이 하나둘씩 땅으로 떨어진다.

핏기가 가시지 않은 가슴 부위의 살덩이들이, 땅에 떨어져 요동친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에 들어온다.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살을 도려내고 있었다. 자세를 바꾸느라 조금 몸을 비틀긴 했지만, 땅에 박힌 성검은 충실하게 파시어를 도려냈다.

아직 땅에 박히지 않은 성검의 가드에 피가 끼얹어진다. 분명 새하얀 색이었을 그녀의 살점이, 대지와 핏물에 얽히고설켜 진흙처럼 더러워진다.

"아, 맞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파시어가 일어나 나를 보았다. 가슴에 뻥 뚫린 구멍으로 갈비뼈와 남은 살점들, 그리고 심장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직 부족했구나. 이 심장은 아직 마룡의 심장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마룡의 심장이 왜 필요했더라.

에네렐을 돌려보내기 위해 필요했다. 그렇다면, 그가 돌아가야 할 이유는.

"어... 어?"

입이 찢어진다. 그녀의 머리가 비현실적인 길이로 솟아오른다.

밑턱은 너덜너덜하고, 입은 커다랗게 변했다. 파시어는 그녀의 몸보다 더 거대한 크기로 입을 벌렸다.

이빨은 뾰족해지고, 안에서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다. 남아 있는 얼굴의 흔적들은 아마 저 하늘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볼 수 있는 그녀의 앞모습은, 그저 그 거대한 턱과 목구멍이 전부였으니까.

무섭다. 도망치고 싶다. 괴롭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에네렐이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괜찮으세요, 성녀님?"

그리고 그는 처음, 우리의 관계가 그리 나빠지지 않았을 때, 막 마왕을 죽이기 위한 여행을 떠났을 때 짓던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짜 파시어, 가짜 엘레노어, 가짜 네르웬, 가짜 초원과 가짜 스튜를 만들었지만 가짜 에네렐은 차마 만들 수 없었다는 사실을.

파시어가 나를 물었다. 그 거대하고 뾰족한 이빨이 내 배를 찔렀다. 그녀의 턱이 들어 올려지고, 이빨과 악력에 찢겨 나간 내 하반신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진다.

다음은 없었다.

/////

"흣!"

환상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셀리아가 볼 수 있는 거라곤 어둠밖에 없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신성력이 그녀를 감쌌지만, 포근하거나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저 끈적거리는 물감처럼, 그녀 위에 칠해져 셀리아를 다른 존재로 보이게 했다.

"에네... 렐..."

약속된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할 일, 셀리아가 할 일, 에네렐이 할 일을 할 수 있게 유도해 주는 이들의 일까지.

뻔한 꿈이었다. '모두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소망이 잔뜩 담긴, 비열하고 이기적인 꿈.

모두 제멋대로였다. 웃고 있는 에네렐을 본 적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밖에 없었으니, 그 시간을 기반으로 상상한 에네렐이 그녀에게 '성녀님'이라는 말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신성 주문으로 에네렐이 보게 된 것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환상일지 몰랐다.

꿈은 제멋대로 '기쁜 것'만 골라 짜기워 환상을 만들었다. 마왕을 잡기 위한 여정인지, 그의 귀환을 위해 떠난 여정인지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그녀에게 '행복해 보이는' 것만을 골라서.

하지만, 이것마저도 실패했다. 그녀가 한 일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헛된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의 복수가 이루어지게 놔두어야 했다.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녀 자신의 희망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죽음 속에서 평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데.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그의 감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도, 이 순간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으니까.

작은 관 밖으로, 그녀의 절망이 새어 나왔다.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상상이, 아니 그녀가 행동하지 않으면 곧 일어나게 될 미래가 밖으로 빠져 나왔다.

지옥이었다. 그녀가 만든 악마와 그녀가 뿜어낸 지옥불 속에서 셀리아가 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일 것이다.

언젠가 행복해질 거라는, 반드시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그녀의 환상이 그저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인 망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온다 해도, 거기에 용사 파티가 끼어 있을 자리는 없다고 단념하는 것이.

몸에 덮인 신성한 유물들은 빛을 잃고 잠들었다. 거기에 담긴 힘은 아직 그녀 안에 있었다.

셀리아는, 자신을 '먹어 줄' 용이 하루빨리 모습을 드러내기를 빌고 또 빌었다.

"잘못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신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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