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엘레노어에게 검을 휘두른 검사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기사도, 그걸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가 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무리 그녀라 해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투라면 결국 그녀의 검술과 노련함으로 인해 엘레노어가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여자다. 그 수련과 재능에 비하면 그 성별은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지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엘레노어를 오래 본 사람들은, 그녀가 연전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이 '사생아 죽이기' 작전에 투입된 기사들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족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죽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혼자 날뛰다가 다른 모든 황족의 견제를 받아 쓸쓸하게 죽는 것보다는, 황족 안에서도 세력을 만들려 애썼다.
황족 사이에서도 '사악한 황제 때문에 억울하게 핍박받는 동지'라는 연대 의식이 있었다. 그들을 지지하는 귀족 간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각자 섬길 황족을 찾아 떠났을 뿐, 그들은 황제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황제파 혹은 귀족파의 기치 아래 뭉친 이들이었다. 당연히, 다른 귀족과의 교류와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프란츠를 섬기는 기사는 선봉이었다. 그들은 먼저 엘레노어를 쓰러트렸을 때 얻게 될 명예와 이익을 상상했지만, 그 뒤에 그만한 기사단이 서넛 더 준비되어 있었다.
뒤에 합류할 기사들은, 먼저 엘레노어와 싸우려 드는 기사들을 '적당히 황녀의 힘을 빼고 죽어갈 머저리들'이라 생각했다.
이 모든 전말을 아는 귀족들은, 이번에야말로 황녀가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주, 죽었어!"
"단칼에..."
"뭘 망설이는 거냐! 빨리 협공해!"
엘레노어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에게도, 이 광경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녀가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둘 중 하나였다.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똑똑히 봤거나, 아니면 그녀를 지지하거나.
전자는 그녀가 사람을 죽일 때 상대를 가릴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몬스터라면 모를까, 도적 떼를 죽일 때도 몇 번씩 생각해서 검을 휘두르던 그녀였다.
반란을 일으켰다 해도, 그게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항쟁이라면 아예 검을 놓고 싸울 정도로 철저한 기사였던 엘레노어가, 같은 제국의 기사를 그리 손쉽게 죽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후자는, 엘레노어를 그저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엘레노어는 영웅이었고, 이 혼란스러운 사태를 종식할 구원자였다.
용사 사칭에 관한 잡음이 들려올 때마다, 그들은 중간지대에서 용사와 엘레노어가 함께 이뤄낸 일들을 떠올리며 그걸 부정했다.
상식적으로 둘의 사이가 그렇게 나빴으면, 어떻게 같이 모험을 떠나며 싸움을 막을 수 있었는가. 일시적인 다툼이 있었을 뿐이고, 외부인이 그걸 굳이 알려 들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런 말로 엘레노어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제대로 된 황족은 없었고, 수도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당연히 과거, 황제가 있던 시절을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누구보다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며 정의를 실현하던 이는 다름 아닌 엘레노어였다.
그들은 엘레노어의 말조차 믿지 않았다. 그녀에게 황제의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마저, 겸손이나 의도가 있어서 하는 거짓말, 혹은 그녀를 적대하는 세력의 음해라고 생각했다.
직접 황녀와 독대할 수 있는 이는, 지지층 중에서도 많지 않았으니까.
몇몇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설령 그녀가 황제의 딸이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수도에 살고 있다. 괴물은 성 밖에 있는 숲에서 등장하고, 숲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물가가 조금 오르거나 바깥나들이가 힘들어지는 정도를 제외하면 큰 피해를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당장 병사 간의 항쟁,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나타날 괴물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엘레노어를 믿고 있는 이들은, 엘레노어가 강력한 검술과 그 선한 품성으로 저 기사들을 교화하리라 믿었다.
단칼에, 기사의 몸이 베여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커, 커흑..."
엘레노어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달려드는 다른 기사를 베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뼈가 젤리처럼 베이고, 살점은 물처럼 잘려 나갔다.
"아, 안 돼. 저건 못 이겨. 안 된다고!"
몇몇 기사들은 도망쳤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적어도 처음 달려들었던 그들의 대장이 몇십 합은 버텨 줬어야 했다.
검술의 패배라고 볼 수도 없었다. 물론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한 건 그의 실수였지만, 기껏해야 팔이 잘려 나갈 상처였다.
그들이 입은 갑옷도 보통 갑옷은 아니었다. 전력을 끌어올리지도 않은 채, 첫 합 만에 야채를 자르듯 베어 넘길 수 있는 갑옷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검과 검의 싸움이 아니다.
저 검과 기사가 잡고 있는 검이 부딪히면, 순식간에 조각날 것이 틀림없었다.
"도망치지 마! 계속 싸워!"
남아 있는 기사들은, 불안감 속에서도 도망친 이들의 미래를 비웃었다.
그들은 평생 비겁자라는 딱지를 안고 살 것이며, 만에 하나 이 기사들이 승리를 쟁취했다 하더라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남아서 싸우는 편이 나았다. 엘레노어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기력을 소모하는 필사의 일격으로 그들의 대장을 죽인 걸지도 모른다.
남아 있는 기사들은, 그런 희망을 품에 안고 엘레노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베여 나갔다.
"제국의 기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다니! 이 비열한 창녀가... 죽어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엘레노어의 실력을 인정했지만, 결국 죽은 기사들은 다른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한 합도 버티지 못하고 그들이 무너진 것은, 그냥 그들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엘레노어가 '생각보다' 강해졌다고는 한들, 결국 진짜 기사인 그들과 싸우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이들마저, 앞서 싸웠던 이들처럼 순식간에 무너졌다.
피가 흘러내리고, 시체가 쌓였다. 뒤에 대기하던 기사들은 불안에 젖었지만, '혹시나 우리라면' 하는 기대감과 '지금이 아니면 평생 엘레노어를 죽일 수 없다.'라는 압박감에 밀려 나왔다.
다른 단원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것은, 엘레노어라는 규격 외의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만큼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들은 남은 용기를 짜내 엘레노어를 공격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비, 비열한 놈. 황실 무기고의 보물을..."
마지막으로 죽어가는 늙은 기사는, 검을 받아내고 나서야 엘레노어가 뿜어내는 힘의 원천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 이젠... 필요 없는 물건이니."
황실의 보물고에는, 금지된 아티팩트나 보물이 수도 없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녀의 힘도, 그런 보물 중 하나를 뽑아 써서 나온 힘이었다.
"죽을 거다. 죽고 말 거다..."
"나만 살아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살인검. 평범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많은 이들을 무덤으로 보낸 귀물이었다.
사용자에게 막대한 힘을 불어넣어 주지만, 그 생명을 빼앗고 몸을 뒤틀리게 하는 마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힘은 본질적으로 마기에 있다. 심지어, 인간이 인간을 죽일 때만 유효한 물건이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사용되었지만, 그 난리에도 불구하고 그 검이 사용되지 않을 수 있던 이유였다.
"그 검은, 타국의 침공이 있을 때만..."
"아, 안다. 내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건 알아."
전승에 따르면, 그걸 쥐는 것만으로도 광기에 미쳐 버린다고 하던 마검이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눈은 평안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눈앞의 인간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걸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끔찍한 참상에서 눈을 돌렸다.
막 달려온 귀족 영애 한 명을 제외하면.
"오, 오라버니?"
그녀는 반으로 잘린 기사의 몸을 찾아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레노어의 얼굴과 싸늘한 시체를 번갈아 바라본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다, 단장님. 어떻게, 그럴 수가..."
"나를 죽이길 원해서, 죽였다."
엘레노어는 무덤덤한 말투로,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죽일 만 한 일이었다. 엘레노어가 조금만 더 경솔한 사람이었다면, 이걸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그럴 만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살육으로, 제국은 약해질 것이다. 당장 수십 명의 강력한 기사가 사라졌으니 곧 그 공백이 드러날 것이다.
엘레노어가 황제가 되고 나면, 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죽은 기사의 부모는 기사일 확률이 높았고, 기사단과 관련된 귀족들은 엘레노어에 협조하지 않을 테니까.
"그럴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살육으로 엘레노어는 황제에 몇 걸음 더 가까워졌다. 그녀에 대적하는 자들은 공포에 떨 것이다.
어떤 황족도 지금 그녀가 죽인 기사단 수준의 전력을 호위로 두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당장 엘레노어가 황족의 거처를 찾아내 대낮에 모든 인간을 참살한다 해도 아무도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압도적인 힘이다. 정치력과 정당성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
말 그대로, 그녀가 '혼자'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만들 힘.
"얼마 남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더 기다리면 돼..."
엘레노어는 표정 없이 되뇌었다.
끝이 머지않았다.